목마를 때 물 한 모금처럼

by 이은설

어떤 도움은 크고 화려하지 않아도 된다. 배부를 때 진수성찬보다, 목마를 때의 물 한 모금이 더 깊이 가슴을 적신다. 사람 사이의 온기는 거창한 손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제때 건네는 마음에서 온다. 그 마음 하나가 밤길을 달리게 만들고, 낯선 거리를 익숙한 사명으로 채운다. 그 밤, 누군가의 간절한 부름에 응답했다. 그게 전부다.

밤 9시가 다 되어 핸드폰에 낯선 번호가 떴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근무하던 여의도 댁의 할아버지였다. 내심 반가웠지만, 바로 인사드리지 않은 걸 섭섭해하신다. “아니, 먼저 인사를 해야지.” 낯선 번호였기에 당연히 몰랐다. “낯선 번호가 떠서 어머님 폰인지 몰랐어요.” “내 폰이 고장 나서 할머니 폰으로 걸었어.” 그러면서 할아버지 폰을 고쳐 달라고 하셨다. 나는 기계치다. 내 핸드폰도 제대로 못 다루는데, 근무 중에 몇 가지 기능만 가르쳐 드린 게 전부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나를 “핸드폰 박사”라고 부른다. “박사는 무슨, 저는 아마추어예요. 제가 못 고쳐요. 내일 아침 대리점 가보시는 게...” “아이고, 나는 전화하면 도와줄 줄 알았는데...” 섭섭한 마음이 전화기에서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고치고 못 고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일단 가서 결정하자. 할아버지는 사람이 그리우신 것이다. “알겠습니다. 30분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자전거 타고 갈게요.” 전화를 끊고 바로 입었던 티셔츠를 벗고 블라우스를 꺼내 입었다. 거울 쓰윽 한 번 보고 신발 신었다. 현관문을 잠그고 자전거 보관소로 갔다. 밤 9시.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이 지난 덕분에 자전거 보관소에는 여유가 있었다. 한 대를 빌려 여의도로 향했다. 평소 밤에는 외출을 잘하지 않아서인지, 거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낯선 길보다 더 앞섰던 건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었다. 아파트 앞에 도착하니 정확히 9시 30분이었다. 벨을 누르자 할아버지가 반색하며 반겨 주신다. 소파에 앉아서 할아버지 핸드폰을 살펴보았다. 비행기 모드, 음량 조절, 소리 차단 기능까지 확인했지만, 이상이 없었다. 입주요양사가 “낮에 어딘가에서 폰을 떨어뜨렸다”라고 말했다. 고장이 확실해 보였다. 삼성서비스센터의 영업시간을 확인했다. “내일 아침 9시에 문 여니까, 8시 반까지 와서 서비스센터 가서 고쳐다 드리겠습니다. 10시 병원 진료 늦지 않게 도와드릴게요.”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소득 없는 방문이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 시간 할아버지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가까이에 자식들도 있지만, 그 시간에 전화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은 나였다. 그 시간 외출은 귀찮고 싫었지만, 평소에 나를 아껴 주시는 분이기에 기꺼이 갈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운동을 서둘러 마치고 샤워를 하고, 오전에 해야 할 포스팅을 마쳤다. 아침 먹을 시간이 없었다. 8시 20분에 자전거를 타고 40분에 도착했다. 요양사가 삶은 계란 두 개를 내밀며 말했다. “아침 안 드시고 오실 것 같아서요.” 고마운 마음에 선걸음에 먹고, 음료수 한 병과 함께 아침을 삼켰다. 서비스센터에 도착한 건 9시 10분. 접수를 마치고 대기하자 수리기사가 불렀다. 예상 밖으로 여성 기사였다. 증상을 말하자, 본인이 직접 시험해 보더니 “정상입니다.”라고 했다. “어제는 전혀 안 들렸거든요.” 그녀는 전체 점검을 하겠다고 했다. 잠시 후, “이상 없습니다.” 그 순간, 둘째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님 폰 고장 나서 서비스센터에 있습니다.” 잘 오지 않던 전화인데, 이렇게 서비스센터 있으면 신기하게도 연락이 온다. 수리 없이 “정상”이라는 진단을 받고 다시 아파트로 향했다. 시계를 보니 9시 30분. 10시부터 수업인데 시간이 빠듯했다. 미리 자전거를 대여해 두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할아버지께 “지금은 잘 됩니다.”라고 확인시켜 드렸다. 그렇게 내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대문 밖까지 따라 나오신 할아버지는 내 손에 용돈을 쥐여 주셨다. “그래야 다음에 또 도와달라고 부르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그 말에 잠시 목이 메었다. 이렇게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안도. 그게 바로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였다. 나는 요양보호사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람’이다. 누군가에게는 딸 같고, 누군가에게는 친구 같으며, 그리하여 부르면 달려올 수 있는 사람 되고 싶다. 도움은 거창할 필요가 없다. 삶의 어느 순간에는, 사소한 한 걸음이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되기도 한다. 기다림의 언덕에서, 마음 놓을 수 있는 한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삶에는 타이밍이 있다. 도움은 크기보다 ‘때’가 중요하다. 지금 당장 필요할 때 건네는 손길이, 그 어떤 위로보다 따뜻하고, 그 어떤 기도보다 절실하다. 나는 이 일을 통해, 사람을 배웠다.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을 넘어서, 나는 누군가의 목마름을 적시는 물 한 모금이 되고 싶다. 필요할 때 떠올려지는 사람. 부르면 달려올 사람.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 누군가의 삶을 살게 한다. 나는 그 삶을 돕는 사람이다. 오늘도 누군가를 위해,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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