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명성과 오명이 함께 한 불멸의 예술가, 파가니니
클래식 열혈팬은 아니지만, 종종 공연업계 지인들로부터 클래식 음악회 초대를 받아 다녀오곤 한다.
오케스트라의 교향악이나 피아노 협연 공연, 협주곡, 중창단의 공연 등 장르에 상관없이 클래식 음악 자체가 주는 심오한 느낌과 선율이 매력적이고 한편으로 귀풍스럽고 엄숙한 클래식 공연장의 분위기에 끌리기도 한다.
최근에 우연히 마주한 한 편의 클래식 음악영화가 있다.
원래 영화 마니아이기도 하지만 웬만한 음악 소재 영화는 빠트리지 않고 찾아 챙겨보기에, 자연스럽게 다가온 영화[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2013년)이다.
실존 인물을 소재로 했으니 당연히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세계적 음악가라 하면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헨델, 바흐, 쇼팽, 차이코프스키, 드보르작, 멘델스존 등 수많은 음악가를 알고 있는 터이지만, 파가니니라는 존재는 조금 낯설었다. 그것도 영화 부제에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따라붙다니. 위대한 음악가를 악마로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를 보면서 감상한 파가니니의 연주곡은 익히 들어 본 선율이었다. “아~ 이 음악이~“
하지만, 신기에 가까운 그의 바이올린 연주보다도 더욱더 흥미로운 건 파란만장하고 비극적인 그의 음악 인생이었다. 요즘처럼 영화, 드라마, 다큐, 예능프로 등 콘텐츠가 쏟아지는 판에 굳이 수년 된 이 한 편의 영화가 호기심을 자극한 이유는 바로 그에 대한 독특하고 신비스러운 한 예술가의 인생 스토리였다.
세계 음악사적으로 피아노 연주에서는 ‘리스트’가 최고로 손꼽힌다 하면
바이올리니스트로는 ‘파가니니’를 꼽는다고 한다.
1782년 이태리에서 태어난 그는 9세에 무대에서 자작의 연주곡을 선보이고, 13세부터 이태리 전국을 돌며 연주 여행을 할 정도로 이미 손꼽히는 연주자의 반열에 올랐다. 천재의 연주 실력은 유럽 일대를 놀라게 했고, 명성만큼이나 그는 막대한 재산을 벌여들이기도 했다.
그는 바이올린 한 대로 대규모의 오케스트라 소리를 모방해 내는가 하면, 갖가지 동물 울음소리를 흉내내고, 활이 아닌 나뭇가지로 연주하고, 현 한 두 개만으로도 연주하는 등 신기에 가까운 연주를 했다.
심지어 악보를 거꾸로 올려다보고 연주하는 등 그의 연주회를 처음 들은 이는 모두가 열광적인 팬으로 변하고, 공연장마다 그의 연주를 보고 기절초풍하는 여성들이 즐비했다고 하니,
요즘 시쳇말로 가히 ‘연주 돌(?)’이었던 셈이다. 관객을 몰고 다니는.
우리나라는 최근 ‘조성진’ 앓이가 한참이다.
2015년 그 유명한 쇼팽 국제 콩쿠르에 당당히 우승한 뒤 전 세계에 조성진 열풍이 불고 있다.
작곡가보다는 연주가로서 명성을 쌓은 파가니니는 악보 연주보다는 즉흥 연주를 했다.
음악 인생에 제자를 거의 두지 않아서 신들린 그의 화려한 연주 기법을 전수한 이도 없어, 파가니니 사후 그의 현란한 연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참 아이러니하고 신비스러운 인물이다.
최고의 음악가인 그를 당대의 음악계에서는 마치 이단아처럼 내몰았고, 오명을 씌어 비판하면서도 막상 그의 연주에는 모두들 반했다. 고난도로 유명한 [24개의 카프리치오]의 악보를 본 이들은 ‘이건 연주가 불가능하다’라고 혀를 둘렀다고 한다.
파가니니의 연주는 관객들의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의 여동생 엘리자 보나파르트도 그의 열렬한 광팬이었다. 엘리자 보나파르트가 현을 한 개만으로도 연주가 되느냐는 질문에 순간 영감을 떠올려 파가니니는 G 현 하나로 연주곡을 만들었는데,
이때부터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소문이 시작되었다.
급기야 G현은 그의 청년시절 사랑하던 애인을 목졸라 살해한 뒤 시체의 창자로 꼬아서 만들었다는,
괴소문이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연주 여행을 하며 혹사한 나머지 후반에는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결국 1840년 니스에서 그는 생을 마감한다. 파가니니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의 오명을 품은 채 사망했다. 죽기 직전 사제가 임종전 마지막으로 이 음악가의 고백을 들으려 방문했다.
“도대체 당신의 바이올린에는 어떤 비밀이 있기에
이토록 놀라운 선율을 내는 것이오?”`
“그 속에는 악마가 숨어 있소.”
마지막 숨을 고르던 파가니니는 오명을 해소하기보다는 보란 듯이,
‘그래! 내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다!’
하고 오히려 소문을 사실로 인정해버렸다. 사제는 비명을 지르며 병상을 뛰쳐나왔고 세상 사람들은 천재 음악가. 파가니니를 영원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기억하게 되었다.
관습과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형식 파괴와 자유분방함으로 당대 최고의 연주가가 된 파가니니는 깡마른 체구에 매부리코, 단정하지 않은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스타일등 외모도 독특했다. 악명이든, 오명이든 영원히 천재 음악가로서, 불멸의 존재로서 후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추앙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