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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나그네 윤순학 Oct 17. 2021

골목에서 철학하다


골목 사색의 즐거움을, 홀로 걸으며 상념에 젖는 고독의 미학을 아는가? 


예로부터 철학자들은 걷기를 즐겼다. 걷기와 사색의 최적 궁합 공식은 아주 오래되고 쉬운 연구법이었다.      

위대한 철학자를 많이 배출한 독일, 하이델베르크에는 ‘철학자의 길’이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로 1시간쯤 거리, 가까운 네카어 강에 위치한 하이델베르크는 대학도시이자 관광도시로 유명한데 도심에 칸트의 산책로라 불리는 칼 테오도르 다리가 독일의 명물 중 하나로 꼽힌다.      


예전 독일 출장길에 짬을 내 하이델베르크와 라인강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소박하고 차분한 분위기와 고즈넉한 풍광이 퍽 인상적이었다. ‘나도 이곳에서 1년쯤 살다 보면 반쯤은 철학가가 되지 않을까 “ 싶을 정도로 자연 그 자체가 바로 철학이었다. 다리 맞은편 언덕 동네는 유럽의 부호들이 한 채씩 갖고 있다는 럭셔리 별장들이 즐비한데 영국의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의 별장도 있다는 현지 동료의 코멘트도 들었다. 

      

독일 관념 철학의 아버지인 칸트는 항상 점심시간 때면 이 칼 테오도르 다리를 건넜는데 다리 위로 칸트의 모습이 보이면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시계를 맞췄다는 에피소드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로 주장한 영국의 철학자. 홉스는 걷다가 생각이 떠오르면 재빨리 메모하기 위해 아예 잉크병을 휴대용 지팡이에 달고 다녔다고 한다. ‘산책 학파’라고도 불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과 함께 걷기 산책을 즐겼고 위대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도 우연히 논두렁을 걷다가 ‘상대성이론’을 생각해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위대한 업적은 모두 학자의 연구실에서만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루소는 ‘나는 걸으면서 명상에 잠길 수 있다. 나의 마음은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고 했고 독일의 시인. 니체는 “나의 심오한 영감, 그 모든 것을 길 위에서 떠 올린다.”라고 걷기에 대한 예찬을 했다. 조선의 사상가이자 철학자, 다산 정약용도 유배지인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자주 오솔길을 걸으며 ‘목민(牧民)’을 생각했다고 한다.    

 

이젠 너무도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카미노 데 산티아고)’은 세계적인 브라질 작가. 파올로 코엘료의 삶을 바꾸어 그에게 작가의 영감을 주는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세기의 베스트셀러 ‘연금술사’, ‘순례자’는 나의 애장도서 목록이다.      


이 외에도 걷기 애호가로 아예 책까지 출간한 유명한 이들이 많이 있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나는 걷는다 끝]에서 예순이 넘은 나이에 오직 두 발로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실크로드 12,000 킬로미터를 걸었고, 은퇴한 후 일흔 나이에 프랑스 리옹에서 이스탄불까지 또 3,000 킬로미터를 걸었다고 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기 예찬]에서 “혼자서 걷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노래를 부르거나, 가만히 서서 쇼윈도를 바라보아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는 사색에 빠지기 좋아해서 걷는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사랑했다”라고 걷기에 대한 극찬을 했다.      


걷기보다 강도가 센(?) 달리기 애호가도 있다. 우리 독자에게도 익숙한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소설 쓰기는 육체노동이다. 체력과 집중력, 지구력을 키우기 위해 나는 달리기를 선택했다”라고 한다.     


영화배우 하정우도 걷기에 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로로 세간에 알려진 예찬론자이다. [걷는 사람]이라는 책까지 출간했다. 그는 무명시절부터 걷기 애호가였고. 기쁠 때나 어려운 시절에나 항상 골목과 한강변을 걸으면서 스스로를 추스르고 의지를 다잡은 기억이 있다고 한다. 그에게 걷기는 삶이었던 셈이다.     





나도 따지고 보면 이들 유명인 못지않게 오랫 세월 동안 걷기 마니아였다. 대학시절 주머니 사정이 뻔하기에 가까운 거리는 웬만하면 도보 이동이었고, 동아리 활동, 학과 모임으로 버스, 지하철 막차를 종종 놓칠 때면 택시는커녕 으레 한두 시간쯤은 ‘걸어서 집으로~ ’. 


당시 팔팔하던 나에게 그리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다. 대학생 기자, 광고동아리 활동은 도무지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하기보다는 뻔질나게 사람 만나고 구경 다니고 온 동네방네 시내를 쏘다니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졸업 후 첫 직장. 광고회사에서 시작해 기획자의 삶으로 이십여 년이 훌쩍 넘은 현재까지도 ‘걸어 다니기’는 생활습관이 되었다. 전업작가도 철학자도 아니지만 기획자의 직업상 순간순간 빛나는 아이디어와 프로젝트 키포인트(key point)를 찾기 위해서 나에게도 걷기와 사색은 비용 안 들이는 주요 해결법이었다. 물론 제일 한적한 코스, 한적한 시간대에 버스 종점, 지하철 종점 끝까지 자주 찾던 나의 골몰하기 애용 법이었고, 중간중간 내려 조용하고 소박한 카페에서 향기 나는 진한 커피도 훌륭한 보조수단으로 한 역할했다.   

              

나에게도 ‘걷기’에 운동효과는 주(主)가 아닌 따라오는 부속품 같은 것이다. 모든 분야의 마니아, 애호가들에게는 그들만의 이유와 사정이 있다. 


프랑스의 위대한 문학가. 발자크. 그의 커피 사랑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매일 새벽 1시에 일어나 블랙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기 시작한다. 쉼 없이 꼬박 책상에 걸터앉아 오전 7시까지 쓰고, 목욕 후 삶은 달걀과 커피로 간단한 아침을 먹고 또다시 글쓰기 작업에 열중한다.      


점심도 커피와 곁들인 간편식을 들고 오후에도 또 커피 한잔. 그가 글쓰기를 마치는 시간은 대략 오후 6시다. 글 쓰는 내내 중간중간 마시는 커피는 감히 셀 수도 없다. 하루 16시간, 글쓰기 노동. 하루 커피 50~80잔. 힘든 문학의 노동을 해쳐나가기 위한 발자크만의 생활법이지만 그는 매일 커피 50잔을, 때로는 80잔, 100잔까지 마셨고 전해지기론 평생 5만 잔의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발자크는 돈을 벌기 위해 생애 내내 치열히 글을 썼고, 글을 쓰기 위해 초강도 글쓰기 노동을 했고, 잠을 안 자고 집중하기 위해 맹렬히 커피를 마셨다. 사실 나는 발자크의 작품보단 그의 생애 습관에 더욱 관심이 끌렸다.       


요즘 같은 디지털 세상에도 ‘육필(손글씨)’로 원고를 쓰는 조정래 김훈 작가도 글 인생 내내 그들만의 행동법, 관습법이 있어 나도 간간히 따라 하기를 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나는 한참 못 치는 걸 깨달았다.        


그냥 내가 그동안 편한 대로 걸으면서 생각하는 것. 그것이 나의 해법이었고, 평소 내 직업을 사랑하며 골목을 자주 찾고 골목에서 철학하는 법이 나의 특기란 걸 알았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시(詩)를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소박하고 정감 있는 시구인데 시인 천상병의 시 ‘귀천’의 한 대목이다. 시와 사람과 막걸리를 사랑한 노(老) 시인도 명동과 종로, 인사동 골목을 누비며 세상에 대해 골몰한 순수 예술가였다.      


나의 중고 학창 시절 최애(崔愛) 시는 서정시인. 박목월의 ‘나그네’였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나이 어린 청소년 시기에 무슨 정감과 정서를 느꼈는지 ‘나그네’는 그때부터 중년 아재인 지금까지도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오죽하면 현재 온라인 필명도 ‘바람 나그네’이고 자칭 타칭 알아주는 ‘막걸리’ 애호가이겠는가?      


오늘도 이러다 저러다 걷다 보니  집 앞 동네 골목 어귀에 다다랐다. 한나절을 골목에서 골몰하다 보니 출출하다. 예전 같으면 친우들을 불러 떠들썩하니 함께 했을 텐데, 아쉽지만 집에서 조촐한 저녁 반주 한상으로 만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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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홀한 골목을 위하여 ~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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