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에서도 버스 교통카드를 찍는 일은 당연했지만 목적지를 이야기하고 버스 카드를 찍는 일은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카드를 찍었다. "어디 가시는데요?" 퉁명스럽게 느껴지던 기사님의 말에 "아, 협재해수욕장이요"라고 답하자 기사님은 띡띡 무언가를 누르시더니 금액을 입력해주셨고 카드를 찍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육지로 돌아와 제주도 버스 여행을 하는 친구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버스를 탈 때 "꼭 가는 곳을 먼저 말씀드려! 안 그럼 인상을 쓰실지도 몰라!" 친구들은 믿지 않았다. 꼭 비행기 탈 때 신발을 벗고 타야 한다는 말의 장난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듯했다
10년 전, 제주는 나에게 신기하고 신비로운 곳이었다
내가 첫 번째로 탔던 버스는 서일주 버스였다
제주시에 있는 터미널에서 출발해 서쪽을 도는 버스, 갈색의 비좁은 좌석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버스의 내부. 오른쪽에 앉으면 저 멀리 보이는 바다를 감상하며 버스를 탈 수 있어서 행복했다. "우와, 제주에 왔구나" 낮은 돌담들이 보였고, 저 멀리 흐리지만 아름다운 제주 바다가 보였다
협재해수욕장에 내려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수학여행에 왔었던 곳이네' 흐렸지만 아름다웠던 협재해수욕장과의 만남. 조금은 쓸쓸했고 다정했던 첫 만남이었다. 배낭을 메고 있었지만 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게스트하우스까지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금능해수욕장을 지나 길가에 있던 하얀색과 파란색이 함께였던 첫 게스트 하우스에서 하루를 묵었다
게스트하우스는 뚜벅이에게 참 좋은 곳이었다
비록 처음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던 나는 수건이 없어 옷으로 대충 물기를 닦아야 했고, 2층의 삐그덕 거림에 아래층 사람이 불편해할까 봐 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게스트하우스가 있어 뚜벅이 버스 여행을 자주 다닐 수 있었기에 감사한 일이었다
제주는 버스가 없는 거 아니야?
비교적 배차 간격이 짧았던 20분에 한 대씩 오는 서일주 버스를 타고 신창쪽에서 내렸다
어제 지도를 보다가 정한 유리의 성을 가기 위해서였다. 6월의 무더위와 싸워야 했지만, 맑은 날씨에 제주에 홀로 여행을 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둥실둥실 떠있었고 기쁜 마음으로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1시간을 기다려도 지도에서 말한 버스가 오지 않는다. '제주는 버스가 없는 거 아니야?' 의아했고 당황스러웠다
낯선 번호의 버스가 왔고 다른 여행자들이 타는 모습을 보며 나도 올라탔다
중간에 내려 걸어가면 된다는 기사님의 말에 '다행이다'를 외쳤고, 나는 낯선 정류장에 내려 표지판을 살피기 시작했다. '유리의 성 3km' 그때는 3km가 어느 정도 걸어야 하는지 감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나시를 입어도 더웠던 6월의 제주의 햇볕
도로 옆으로 배낭을 메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길가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던 말을 마주치기도 하고 쌩쌩 달리는 차들을 부러워하며 느린 걸음으로 1시간쯤 걸었을 때 유리의 성을 만났다. 사과처럼 달아 오른 얼굴, 땀범벅을 한 상태로 도착했다. "1명이요, 혹시 배낭을 좀 맡길 수 있을까요?" 어디서부터 걸어온 거냐고 물으시던 매표 직원 분의 다정했던 말과 해냈다는 뿌듯함으로 유리의 성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던 날
다음 코스로 이동하는 길, 무작정 길을 걷다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를 잡았다
낯가리고 소극적이었던 나였지만 자연스럽게 용기가 생겼다. "기사님, 저 서일주 버스 타는 곳으로 갈 건데 가능한가요?" 지나가는 버스를 타서 서일주 버스 정류장 아무 곳에나 내려 버스를 갈아탔다. "휴 다행이야, 아까보다 쉽게 나올 수 있었어" 안도감이 훌쩍 나를 찾아왔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제주의 버스를 기다리며
제주에는 버스가 없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 이후로 몇 번의 제주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서쪽과 동쪽을 도는 버스와 시내를 도는 버스를 제외하고는 읍면 순환버스는 하루에 정해진 시간에만 움직이는 버스였으니 버스 여행은 도통 어려운 일이 당연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해냈던 내 첫 여행지 유리의 성, 운전을 하며 그곳을 지나갈 때면 마음이 뭉클해진다. "잘했고 대견해! 멋있어"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와락 안겨 주곤 한다
"제주도 버스 여행할만해?
"제주도에는 버스가 없는 거 잘 안되어 있는 거 아니야?"
운전은 못하지만 버스로 제주를 여행하고 싶은 이들이 가끔 질문을 던지곤 한다. 제주도 버스 여행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자주 버스로 여행을 했고, 지금도 여전히 가끔은 버스 여행을 하곤 한다
하지만 제주 안쪽의 여행지를 가기는 사실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동쪽과 서쪽을 크게 도는 버스들은 자주 있는 편이지만 여전히 제주 여행의 버스 노선은 육지의 편리한 대중교통을 누렸던 우리에게는 느림의 미학을 알려주기에.
"어느 정도는 할만하고 어느 정도는 힘들어"
제주 버스 여행은, 힘들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의미가 있는 일이 되었다.
이왕이면 버스가 잘 닿는 여행지를 찾아서 뚜벅뚜벅 걸으며 여행하는 일이 순간의 행복을 느끼기에는 충만했고, 제주의 돌담과 바다를 보며 거니는 일은 행복이었다. 물론 각자의 상황과 체력이 다르겠지만, 운전을 못한다고 해서 제주의 버스가 잘 안 되어있다는 소문만을 듣고 제주 버스 여행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주 버스 여행은, 차근차근 제주를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여행을 시작했던 나는,
제주의 첫 여행지 선택부터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감사한 시간이었다
덕분에 무거운 여름날,
무거운 짐을 메고 걸었지만 첫 여행지 덕분에 돌아오자마자 운전을 배웠고, 제주의 버스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육지에서는 버스 기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거의 없지만, 어떤 제주 버스에서는 이야기를 나누며 정류장이 아닌 목적지 앞에서 내려주는 선물을 받기도 한다. 여전히 신기하고 신비로운 경험, 제주여서 가능했던 추억들. 제주 버스기사님들의 특유의 시크함이 다정함으로 변하는 순간들을 기억한다
첫 버스 여행을 통해 나는,
내 삶의 감사함을 돌아보게 되었다
육지에서의 교통의 편리함, 누군가 함께 한다는 마음의 든든함. 제주 여행을 통해 그럼에도 해냈다는 마음의 자신감을 얻어서 돌아왔던 소중한 경험, 첫 제주 여행의 내가 멋지고 대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