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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청 Feb 14. 2019

코카서스 3국 여행기2

돈의 위력

나쁜 것부터 먼저 배운다더니, 중국 공항에서 하는 짓이 어찌 그리 미국을 닮았는지, 세계 2대 초강대국의 위세를 어쩜 그렇게도 후안무치하게 부려대는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아니, 공항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다른 나라로 가기 위해 잠시 환승하는 것뿐인데, 왜 그렇게 절차가 복잡하고 유난을 떠는지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기내에서 입국 서류를 작성했는데, 환승용이 아니라고 다시 작성하라고 했다. 셀프 체크를 하라고 해서 컴퓨터와 한참 동안 씨름을 해야 했다. 열 손가락 지문 채취는 당연지사가 돼버렸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입국 심사를 통과하고, 검색대를 거치고 나서야 환승 구역으로 나갈 수 있었다.
 
아제르바이잔행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해 탑승권을 발급받아야 하는데, 체크인하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공항 직원에게 확인해보니 체크인을 위해서는 검색대를 다시 통과해야 했다. 비즈니스석은 체크인하는 곳이 일반석과 달랐다. 일행들과 떨어져 비즈니스석 체크인하는 곳에 갔는데, 공항 직원은 아무도 없고, 3~4명의 유럽인만 알 수 없는 말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20분은 족히 기다리니 직원들이 나타났다. 체크인을 하려고 서류들을 챙기는데, 세상에나, 수화물 딱지가 없어졌다. 분명히 휴대용 작은 가방에 넣어 뒀는데, 아무리 찾고 또 찾아봐도 없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입술이 바짝 마르고, 숨이 가빠졌다. 하필 그때 내게로 온 가장님은 속도 모르고 짐이 아제르바이잔행 비행기에 제대로 실리는지 꼭 확인을 하라고 일러 주고 간다. 불난데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나 잘 챙기라고 소리치고 다시 찾아봐도 역시 없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아마도 셀프 체크인인지 지랄인지를 한다고 난리법석을 떨다가 어디 빠져버린 모양이다. 좀처럼 이런 경우가 없었는데, 나의 해외여행 경력에 먹칠을 하는 순간이었다.
 
비즈니스석의 위세를 믿어보기로 했다. 내 차례가 되어 순조롭게 티켓팅이 되는가 싶었으나, 아니다 다를까, 수화물 딱지를 요구한다. 서툰 영어로 잃어버렸다고 하니 직원도 난감해한다. 얼마 후에 티켓이 발급됐다. 내 짐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모르겠단다. 헐, 무슨 해결 방법이라도 알려주든가 해야지 자기들도 모른다고 발뺌을 하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무책임하고, 무시하는 처사에 화가 났지만 꾹 참고, 떨어져 있는 딸에게 SOS를 쳤다. 상황을 설명하니 딸이 중국어로 소통을 한다. 참 기특하기도 하다. 언제 중국어는 배워가지고. 중국에 어학연수 한 번 안 갔다 왔는데. 그 직원은 한참 동안 어디다 전화를 하더니 아제르바이잔으로 가는 짐이 우리 일행들 것밖에 없으니 그중 딱지 없는 것을 내 걸로 해주겠다고 했다. 십년감수했다.
 
우여곡절 끝에 티켓팅을 마치고 일행들 쪽으로 가보니 아직도 줄을 서서 대기 중이었다. 가보지도 못하고 뒤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딸이 끌려가듯 직원하고 어디로 가고 있었다. 한참 만에 돌아온 딸에게 확인해보니 내 짐 속에서 라이터가 발견돼서 꺼내서 버리고 왔다고 했다. 가장님에게 한바탕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이래저래 참 안 풀리는 날이었다.

온몸을 샅샅이 뒤지는 몸수색을 거치고, 탑승구 쪽으로 나오니 벌써 ‪12시 30분이었다‬. ‪01시부터 탑승이라 서둘러 식당을 찾았다‬. 얼마를 헤매다 찾은 식당은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어둡고 한산했다. 다들 환승 절차에 지칠 대로 지쳐 음식은 시키지도 않고, 칭다오 맥주만 1병씩 시켜서 안주도 없이 급하게 마셨다. 출국 게이트에 도착하니 5분 전 ‪01시였다‬. 화장실에 다녀오니 줄을 서기 시작했다. 비즈니스석은 출구가 따로 있고, 제일 먼저 탑승구를 빠져나가는 것을 심심찮게 본 적이 있어서 방송 멘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라 그런 시스템이 없나 보다고 포기하려는 차에 방송 멘트가 흘러나왔다. 자본의 위력은 사회주의라고 예외가 없었다. 잽싸게 탑승구를 빠져나가니 미니버스가 대기 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탈 수 있는, 콩나물시루 같은 그런 버스가 아니라 일등석 손님들만을 위한 미니버스였다. 곱게 포장된 고급 초콜릿을 먹는 느낌이 언뜻 스쳤다. 진한 돈 냄새와 함께.

차는 아제르바이잔이라고 크게 쓰인 비행기 앞에서 멈췄다. 터키 국기가 그려져 있어서 의아해했는데, 자세히 보니 아제르바이잔 국기였다. 이코노미석보다 2배는 넓어 보이는 비즈니스석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차이가 있었다. 마치 지불한 돈만큼 값어치를 해야 한다는 강박증이라도 있는 듯했다. 남의 옷을 빌려 입고, 환대받지 못한 잔치에 억지로 끌려온 것 같은 어색함과 불편함은 그곳을 벗어날 때까지 계속됐다. 탑승권에 찍힌 좌석을 찾아가니 수북하게 물건들이 쌓여 있어 앉을 수도 없었다. 베개 2개, 담요 2장, 물, 헤드폰, 그리고 작은 가방도 보였다. 가방 안에는 세면도구, 화장품, 면도기 등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나 난망해하고 있는 사이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02시 20분에 이륙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무원이 와인 리스트를 가져왔다. 고급 레스토랑도 아닌 비행기 안에서 와인 리스트라니. 15년 전 유럽 여행을 갈 때 비행기 안에서 마셨던 화이트 와인 맛에 반해서 그 후로도 쭉 비행기에서는 화이트 와인만 마셨다. 비행기에서 마신 화이트 와인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샤도네이와 슈냉블랑 중에 고민하다가 슈냉블랑을 골랐다. 음식 메뉴는 스테이크를 선택했다. 곧이어 승무원이 얇게 썬 고기와 샐러드, 바게트 등을 가져오더니 테이블에 눈같이 하얀 식탁보를 깔고 직접 세팅까지 해줬다. 나이프도 2개 포크도 2개씩. 샐러드 소스와 올리브, 버터에 와인까지 올라가니 테이블이 꽉 찼다. 슈냉블랑은 샤도네이보다 향이 더 강하고, 부드러우면서 단맛과 신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고기가 많지 않아 아껴서 먹고 있는데, 거의 먹어 갈 때쯤 빼앗듯이 먹던 것을 가져갔다. 황당해하고 있는데 진짜 스테이크가 나왔다. 아항, 이게 진짜 스테이크구나.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삶은 감자와 구운 토마토, 당근도 곁들어 나왔다. 그때서야 여유가 생겨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대부분의 비즈니스석 승객들은 식사를 안 했다. 4~5명 정도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왜? 다들 식사를 하고 왔나? 기내식 먹으려고 비행기 타는 사람도 있다는데. 기분이 과히 좋지 않았다. 와인을 2잔 더 시켜먹고, 디저트로 과일과 케이크까지 먹으니 입가심으로 홍차가 나왔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 눈치껏 리모컨을 조작했다. 한국 영화는 보이지 않아서 <The shape of water>를 선택했다. 주인공이 말을 못 하는 장애인이어서 대사가 적어 이해하기 쉬울듯해서다. 영화가 끝나갈 때쯤 졸음이 쏟아졌다. 잠을 자기 위해 의자를 조작해야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조작 버튼만 10개가 넘었다. 발판이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하고, 뒤판이 여러 각도로 재껴지는가 하면, 팔걸이도 이리저리 움직였다. 10분 넘게 리모컨과 씨름을 하다 포기를 하고 말았다. 무거운 신발을 벗고, 일회용 슬리퍼로 갈아 신은 뒤, 담요를 덮고 잠을 청했다. 고급 안마기에 누워있는 것 같은 착각 속에 이내 잠이 들었다. 현지시각 ‪04시 53분‬, 드디어 아제르바이잔 공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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