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지지 않는 불꽃(1)
해외여행에서 입출국만큼 시간이 많이 걸리고, 지루하고, 짜증 나는 것은 짐을 찾는 것이다. 아제르바이잔 공항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미하고는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다른 나라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언제쯤 짐이 나온다는 방송 멘트도 없고, 하염없이 기다릴 수만도 없어서, 돌아가면서 화장실에서 양치질과 세수를 했다. 여성들은 그 틈에 화장도 하고. 한참을 기다려서 짐을 찾고, 환전도 했다. 아제르바이잔 화폐 단위는 마나트(AZN)이다. 대략 1마나트가 한국 돈 700원 정도다. 가방을 끌고 출구로 나오는데 누구 하나 제지하는 사람도, 눈여겨보는 사람도 없다.
유심칩을 사기 위해 판매 데스크로 갔다. 그깟 유심칩 하나 갈아 끼우는 데도 하세월이다. 한국이면 5분이면 할 걸, 직원 2명이서 30분이 넘도록 씨름을 하고 있다. 그 사이에 버스카드를 구입하려고 공항 밖으로 나갔다. 버스카드를 구입하고 다시 공항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소지품 검사를 한다. 좀 황당하기는 했지만, 이곳의 규정이라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도 유심칩은 해결이 안 됐다. 1시간 정도가 걸려서야 그 대단한 유심칩으로 바꿔 낄 수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공항 밖으로 나왔는데, 그때서야 가방을 안 가지고 나왔다고 무심하게 말하는 우리 여행의 안내자인 딸. 별로 놀라지도 않는다. 대담한 건지, 아니면 좀 모자라는 건지. 곧바로 아들이 공항 안으로 뛰었다. 가장님의 핀잔과 성화에 나도 뒤따라 뛰었다. 검색대를 통과해서 유심칩 판매대 근처로 가니 다행히 아들이 가방을 찾아서 들고 오고 있었다.
아직도 날이 채 밝지 않은, 이슬비가 오고 있어서 흐릿하게 보이는 아제르바이잔의 첫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다. 보이는 건물들이 멋지고, 웅장하면서 예사롭지 않은 위엄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공항 건물도 굉장히 세련되고, 이채로웠다. 07시경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탔다. 20분 정도 가서 버스에서 내렸다.
저녁에 기차를 타고 조지아로 가야 하기 때문에 열차표를 미리 사야 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기차 터미널이 있었다. 웬걸, 오늘 기차표는 매진이란다. 첫날부터 여행 일정이 어그러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우리의 리더는 걱정도 안 한다. 내일 밤에 출발하는 기차표를 예매했다.
리더께서는 스마트폰으로 오늘 묵을 호텔을 손쉽게 예약했다. 앱을 이용하여 택시도 불렀다. 택시 2대에 나눠 타고 15분 정도를 달리니 고성이 나왔다. 예약한 호텔이 고성 안에 있어서 입장료를 지불해야 했다.
좁은 골목 안에 있는 호텔을 찾아갔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조금 전에 분명히 예약을 하고, 돈까지 지불했는데도 예약이 안 됐다고 했다. 딸은 예약한 사이트로 전화를 해서 확인을 하고, 직원들과도 이런저런 상의를 하고 있었다.
쉽게 해결이 될 것 같지 않아서 호텔 주변 고성을 둘러봤다. 사진도 찍고, 골목길을 배회하다가 카페 앞 벤치에서 쉬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도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가장님께서는 유심칩을 잃어버렸다고 가방을 뒤지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골목길을 샅샅이 뒤져봐도 유심칩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하기야 그 작은 것을 골목길에서 찾는 자체가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 아니겠는가. 직원들에게 근처의 다른 호텔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근처 호텔과 연결이 됐다. 또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심하게 잘 생긴 젊은 직원 2명은 미안했는지, 아니면 우리가 불쌍해 보였는지, 친절하게도 우리 짐의 일부를 끌고 호텔까지 안내를 해줬다.
옮겨간 호텔은 처음 호텔보다 더 크고, 더 넓고, 전망도 좋았다. 딸과 봄 여사가 체크인을 하는 사이 양 동지와 둘이서 왔던 길을 되돌아 골목을 샅샅이 뒤졌으나 유심칩은 보이지 않았다. 이른 시간이라 방에는 들어갈 수가 없어서 일단 체크인만 했다. 호텔 4층에 식당이 있다고 해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러 4층으로 올라갔다. 포도, 사과, 배 등 신선한 과일과 올리브, 빵, 햄, 치즈, 계란, 비스킷, 주스, 우유 등이 정갈하게 준비돼 있었다. 과일 중에는 포도가 제일 맛있었다. 씨알이 작은 청포도는 씨도 거의 없고, 신맛도 없이 설탕처럼 달고 상큼했다. 짜지 않은 올리브도 일품이었다.
식당 창밖으로 카스피해가 보였다.
바쿠 시내 어디서나 볼 수 있다는 불꽃 타워도 보였다.
호텔에 짐을 맡기고 본격적인 관광에 나섰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제법 빗줄기가 거세졌다. 고성을 빠져나와 큰길을 건너니 바로 카스피해였다.
깨끗하고 세련되게 꾸며진 해변에는 엄청나게 큰 아제르바이잔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국기가 있는 곳에서 5분 정도 걸어가니 양탄자 박물관이 있었다. 입구를 찾느라 잠깐 헤맸다.
양탄자가 유명한 나라답게 박물관에는 온갖 종류의 양탄자가 전시돼 있었다.
다양한 크기의 화려하고 정교한 양탄자는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였는데, 가격도 엄청나게 비쌌다. 우리 같은 서민들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각양각색의 양탄자를 질리도록 보고, 양탄자 조각 하나도 사지 못하고 박물관을 나왔다.
다시 카스피해 해변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가 나무에서 무언가를 따고 있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자세히 보니 올리브였다. 제법 큰 올리브 나무에는 정말로 몇 천 개는 족히 돼 보이는 올리브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올리브 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평생 동안 올리브는 질리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변에서 나와 큰길 쪽으로 가다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것도 비라고, 그새 내린 비로 도로가 넘쳐서 곳곳에서 도로 청소를 하느라고 부산을 떨고 있었다.
배수시설이 엉망인 건지, 비가 적게 내리는 지역이라 그런 건지,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길을 건너야 하는데 횡단보도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올라가니 지하도가 있었다. 지하도 출구 천장이 오페라 하우스 천장 같았다.
12시 30분경에 역사박물관에 도착했다. 의례적으로 볼 수 있는 장신구, 전쟁무기, 그릇과 복색, 생활도구, 조각품 등을 건성으로 구경했다. 사전 지식도 없고, 설명도 충분치 않고, 설명이 잘 돼 있다고 해도 읽을 수도 없고, 시차 적응도 안 되고, 배도 고프고.
대충 둘러보다가 입구에 있는 의자에 앉아 기다리니 다른 일행들도 흥미가 없다는 듯 하나둘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