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지지 않는 불꽃(2)
역사박물관을 나와서 딸의 인도로, 아니 딸이 들고 있는 스마트폰이 알려주는 대로, 바쿠에서 나름 유명하다는 식당을 찾아갔다. 지하에 위치한 식당은 비밀스러운 동굴처럼 생겼는데, 제법 크고, 널찍했다. 역시나 잘 생긴 총각 직원에게 물어서 그 식당에서 가장 유명한 코스 요리를 시켰다. 아제르바이잔 레드와인 1병과 맥주도 시켰다. 음식은 정말 푸짐하게 나왔다. 이제 그만 나와도 될 것 같은데 계속 나왔다. 맛있는 와인을 곁들였는데도 음식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식사가 끝나가는 데 화장실에 간 아들이 돌아오지를 않았다. 그냥 배탈이 나서 오래 걸리나 보다고 다들 신경도 안 쓰는데 가장님은 달랐다. 왜 아들이 안 오냐고, 혹시 화장실 안에서 쓰러진 거 아니냐고, 빨리 가서 찾아보라고. 딸은 과잉보호라고, 너무 편애한다고, 그렇게 애지중지하니 얘가 나약해진다고 투덜댔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데 이게 무슨 경우냐고 투덜거리며 화장실 쪽으로 가봤다.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직원들이 부산스럽게 화장실 쪽으로 오고 가고는 했다. 얼마 후에 화장실을 빠져나온 아들의 말을 들어보니, 일을 보고 나가려고 하는데 화장실 문이 안 열렸다고 했다. 아무리 밀어보고 당겨 봐도 소용이 없었다고. 급한 나머지 화장실 문을 세차게 두들기니 직원들이 와서 억지로 화장실 문을 열어줘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무슨 무용담도 아니고…. 그나저나 화장실 문짝 값을 물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식당 옆에 아제르바이잔 향수를 파는 가계가 눈에 띄었다. 향수라면 환장을 하는 가장님이 그냥 지나칠 리가 만무했다. 이제 향수 좀 그만 사라고 만류하는 딸을 억지로 끌고 향수 가계로 들어갔다. 덩달아 봄 여사도 따라 들어갔다. 길가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서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마냥 한참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16시경, 휴식이 필요해서, 호텔(올드이스트 호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텔 바로 옆에 슈퍼마켓이 있어서 레드와인 2병, 사과, 배, 감, 물과 음료수를 구입했다. 우리 부부는 1층 방, 양 동지 부부는 3층 방을 배정받았다. 방이 부족해서 호텔 측에서 근처 아파트에 빈방을 하나 구해 딸과 아들의 숙소로 내줬다. 호텔 측에 부탁해서 내일 투어를 예약하고, 17시 30분에 1층 로비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샤워를 하고 쉬다가 17시 30분에 로비로 나갔다. 밤이 되면 불꽃 타워에서 불꽃 쇼가 펼쳐진다고 해서 그걸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아제르바이잔은 ‘불의 나라’로 불린다. 면적은 86,600㎢로 한반도의 약 40% 크기다. 인구는 약 950만 명 정도. 동쪽은 카스피해와 접해있고, 북쪽은 러시아의 다게스탄 공화국, 서쪽으로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남쪽으로는 이란과 접해 있다.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가 전 세계 석유 소비량의 절반 가까이를 공급하기도 했다. 레닌이 ‘바쿠의 석유가 없다면 소비에트는 유지될 수 없다’는 말을 남길 정도로, 소련의 탄생 후에도 볼가-우랄 유전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코카서스의 유전 지대는 소련의 독보적인 기름 줄이었다. 석유가 차고 넘쳐 모두들 걷지는 않고 차만 타고 다녀서 그런지 아제르바이잔에는 인도가 거의 없었다. 신호등도 보기가 어려웠고, 횡단보도는 더더욱 찾기가 힘들었다. 길을 건너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었다.
20분 정도 언덕길을 올라가니 공원 주차장이 나타났다. 계단을 한참 올라가니 넓은 공터가 나왔다. 바쿠 시내와 카스피해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였고, 불꽃 타워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날씨도 좋고, 공기도 청량해서 기분마저 상쾌했다. 여기저기 셔터를 눌러대다 특이한 건물이 눈에 들어와서 이끌리듯 그쪽으로 향했다. 그 건물 안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불현듯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 ‘순례자의 길’
코카서스 산맥의 남쪽,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 위치한 아제르바이잔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힘 있는 제국은 예외 없이 지분거렸고 늘 그중의 하나가 지배한 지역이었다. 1918년 3월 볼셰비키와 아르메니아인들이 주축이 된 바쿠 소비에트와 아제르인들인 무슬림 그룹 간의 무력충돌로 바쿠에서 1만 명이 넘는 무슬림이 사망했다. 1990년에는 이른바 ‘검은 1월’ 사태로 소련 연방군이 바쿠에 진주하여, 아제르바이잔인 100여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순례자의 길’은 이들을 안치한 일종의 국립 현충원이었다. ‘순례자의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오래된 묘들은 1918년 당시의 주검이고, 계단을 오르면 첫 번째로 나타나는 묘들은 ‘검은 1월’ 사망자들이다. 사망자들의 사진이 새겨진 무덤 중 한 곳에는 누군가 금방 다녀간 듯 아직도 싱싱한 카네이션이 붉게 타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불꽃쇼를 할 기미를 보이지 않아 포기하고 내려가려던 순간 거짓말처럼 불꽃쇼가 시작됐다. 장관이었다. 그냥 레이저 쇼처럼 불빛 조명 몇 개를 건물에 비추겠지 하는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건물 전체가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거대한 횃불이 너울너울 춤을 추기도 하고, 폭포수처럼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기도 하고, 아제르바이잔 국기를 든 사람이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옮겨가기도 하고, 마치 환상의 나라에라도 와 있는 듯, 세상에서 가장 큰 동영상은 구경꾼들의 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불꽃 타워는 높이 190미터로 바쿠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다. 2007년 공사를 시작해서, 2013년에 완공을 했는데, 횃불 모양의 세 건물은 각각 호텔, 아파트, 사무실로 이용되고 있다. 불의 도시이며 조로아스터의 도시인 바쿠의 상징인 불꽃 타워는 외벽이 LED로 덮여 있어 이처럼 장관을 연출해낼 수 있다.
한참을 구경한 후 숙소로 돌아오다 호텔 옆 슈퍼마켓에서 석류와 소시지를 사고, 가져온 컵라면과 단무지, 김을 안주 삼아, 1층 우리 방에 모여 조촐한 여행 첫날밤 파티를 열었다. 달이 유난히도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