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런거야?
흥미로웠던 처음 한 시간을 넘어 두 시간, 세 시간이 지나자 지치기 시작했다. 항상 조용히 공부하던 모습에 대한 환상이 너무 컸는지 내 예상보다 더 유러피안 적인 상대의 리액션에 적응이 힘들었고, 기대가 너무 컸는지 이성이 아닌 그냥 외국인 버디 같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영어 회화만큼은 조금 자신 있었던 나에게 3시간가량의 잉글리시 리스닝은 귀도 입도 다 막히게 했다. 유학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던 터라 한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도 힘겨워하는 나 자신에게 큰 절망감을 느꼈고 그냥 내 기분을 한 없이 우울하게 만든 만남이었다. 그렇게 만남은 끝이 났다고 해야 하는데, 내가 카페 아르바이트생이란 점을 망각하고 있었다. 따로 만남 약속을 잡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상황이기에 일요일은 왔고 어김없이 이 친구도 왔다.
나의 이성관계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항상 첫 만남으로 상대를 재단하고 다음 만남으로 연결시키지 않는 특징이 있었다. 첫 느낌에서 이건 아니다 싶으면 다음 만남으로 상대를 더 알아갈 기회를 만들지 않았다. 항상 사람은 3번은 봐야 한다는 조언이 나에게 뒤따랐지만 조언이 내 행동을 바꾸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만날 수밖에 없는 관계 설정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갔고 운명의 장난인지 이 날,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남자 동기가 카페에 놀러 와서 서로를 소개해줬다. 그렇게 알바 마감을 하고 셋이서 그때 가지 못했던 막걸리 집에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생각보다 프랑스 친구가 너무 재밌고 이 아이가 하는 장난들이 계속 나로 하여금 웃게 했다. 피식 웃다 점점 쿵작이 만들어져 둘이서 ‘티키타카’를 하기 시작하고 본의 아니게 상대편에 앉아있던 동기에게 소외감을 선물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헤어지고 우린 이틀 뒤에 또다시 만나 데이트를 했다.
칸막이가 있는 조용한 포차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3시간이 훌쩍 흘렀다. 상대는 내게 늘 이야기하던 이상형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다. 진중하고 담백한 무게감이 있는 사람을 만나고자 했었지만 상대는 말도 많고 장난기도 많아서 굳이 따지면 가벼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당연히 난 배울 점이 많은 사람과 안정적인 관계 속에서 연애를 하며 각자의 삶을 걸어가는 동행자 스타일의 연애를 할 것이라 늘 생각해 왔지만 상대는 장난이 난무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유발하는 친구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냥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 재밌었다. 긴장감은 없었지만 편안함이 있었고 진지함은 없었지만 유쾌함이 있었다. 내가 예상했던 나의 연애관과 너무나 다른 상대였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별생각 없이 관계가 흘러갔고 몇 번의 데이트 끝에 “Let’s make it clear(이 관계를 더 분명히 하자)”라는 말에 “Okay”라는 대답으로 25년 인생 첫 연애가 시작되었다. (이하 상대를 애인이라 칭하겠다.)
처음엔 당혹감밖에 없었다. 내가 연애를 시작한 건가, 이렇게 갑자기? 물 흐르듯? 물음표가 남았지만, 사실 연애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내 삶에 큰 변화는 딱히 없었다. 그냥 누군가가 “남자 친구 있어요?” (개인적으로 애인 있어요?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모든 사람은 헤테로가 아니라는 점을 사람들은 잘 인식하지 않는 듯하다.) 라 물으면 “네”라고 대답하는 정도. 그리고 “어떤 사람이에요?”라고 물으면 “프랑스인이에요.”라는 조금의 특별함을 가미한다는 정도의 차이점만 있을 뿐 그다지 큰 변화는 없었다. 사실 연애도 처음, 특히 국제연애도 처음인 나에게 이 관계는 내 감정에 큰 소용돌이를 치기 시작했다. 아니 연애가 이렇게 어려운 거라는 건 아무도 안 알려줬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