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에 관한 고찰
서울 삶, 이라는 부제목이 어울리지 않았던 격리의 날들이었다.
아침이 밝았고 원망스러울 정도로 비가 주륵 내리는 밖이었다.
나가야 하는데 나가고 싶지 않은 심술스러운 침대 위였다.
격리 해제다! 하며 신나게 일어날 줄 알았지만, 쌀쌀한 공기에 내가 한 큰 외출은 그저 방문 밖이었다.
따뜻한 차를 한 잔 끓이고 읽다만 잡지를 읽었다.
그래도 달라진 점이 있다면, 룸메이트의 요리를 돕고 설거지는 내가 했다.
혼자 있고 싶으면서 혼자 있고 싶지 않았는데, 언제나 바쁜 룸메이트는 일을 하러 떠났다.
"재밌는 하루 보내!"라는 말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가족이 곁에 있으면? 친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으면? 난 과연 재밌는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아마 부산에 있었어도, 대구에 있었어도, 혼자 있는 시간을 택했을 것 같다.
나만 그런가, 혼자 있기 싫은데 혼자 있는 게 제일 좋다.
비가 조금 그치는 것 같아 연체된 책을 반납하기 위해 일주일 만에 집 밖을 나갔다.
생각보다 오랜만에 하는 외출이 감격스럽다거나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그냥.. 그냥 나간다.. 뭐 이 정도?
분위기가 좋은데 사람은 별로 없는, 만족스러운 카페에 가서 책도 한 권 읽었다.
머리를 안 써도 돼서 읽기 편했지만, 동시에 별 게 없는 그런 책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동네 시장에 들러서 조그만 재미를 보았다.
반찬가게와 채소가게가 발길을 끌었고 장을 볼까 망설였다.
시중에 가진 현금은 단돈 2천 원이었다.
격리 해제하면 스피또를 살 거란 나만의 다짐을 지키기 위해 아쉽지만 현금을 지키는 걸 택했다.
(확진 날 꿈에서 스피또 1억 원에 당첨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는 길에 산 스피또는 꽝 중에 꽝이었고 시장, 버거킹, 떡볶이 집을 지나면서도 식욕이 안 돌아 아무것도 사 오지 않았다. 약 3시간의 외출에 금방 체력이 나가떨어져 침대 위에서 철푸덕 숨을 쉬다 벌떡 일어나서 영화를 보았다.
재미있는 하루를 보내고 싶었기에 재미를 찾기 위해 발버둥 쳤다.
와인을 한 잔 따라 마셨고 생각보다 도수가 너무 높아 취기가 금방 올랐다.
한잔만 더 마셨다간 나도 내가 어떤 충동으로 어떤 카톡을 보낼지 몰라서 맥주를 사러 튀어 나갔다.
아무도 안 좋아하는데 나만 좋아하는 맥주와 안주가 있는데 새우깡 블랙과 순하리 레몬청 맥주이다.
세 번째 들린 편의점에서 다행히 새우깡 블랙은 찾았지만, 순하리 레몬청은 단종되었나 보다.
마이너 한 입맛을 가진 사람을 위해 대중의 인기에 따라 단종되는 음식들이 줄었으면 좋겠다.
과자 하나를 다 먹는 과식 끝에 다 본 영화는 별로 재미가 없었고 남은 건 오랜만에 느끼는 취기였다.
요즘 인스타 부계정을 하나 파서 글 쓰는 독립 매거진 에디터들을 잔뜩 팔로우하고 그들의 취향을 엿보고 있다. 신기하면서도 스스로가 찌질해지는 그런.. 모순된 감정을 잔뜩 느끼게 하는 취미생활이다.
샤워를 마치고 이렇게 글을 쓰니깐 조금 재밌는 하루를 보낸듯한 기분이다.
어젯밤은 되게 신나고 기분이 업되어서 브런치에 글 쓰는 건 재미가 없었는데, 오늘은 일상이 공허하고 쓸쓸하니 글 쓰는 게 재밌다.
정말 모순덩어리인 것 같고, 내가 느끼는 재미는 환상인가 싶다.
그리고 글이 잔뜩 느끼하다. 근데 느끼한 글 쓸 때가 재밌다. 환상 맞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