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성에 관한 고찰
어디서든 찬물로 세수를 하고 손수건을 꺼내 얼굴의 물기를 닦는 사람들. 어디로든 가고 어디에나 털썩 주저앉을 수 있는 사람들. 인생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음을 잊지 않는 사람들. 커다란 사랑과 증오와 열정과 불안과 조심 없이도 계속 흐르는 사람들.
-이슬아 심신단련 중
이슬아 작가님의 책에는 더운 날 땀이 난다고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는 친구에 대한 묘사가 있다.
외출 중 비가 오면 맞고 마는 그런 바깥사람들에 대한 묘사이다.
가볍게 어디로든 툴툴 떠나는, 꼬이면 꼬이는 대로 너털웃음 지으며 털어내는 사람들을 매우 선망한다.
난 잠깐의 외출에도 비가 조금이라도 올 것 같으면 우산을 챙기고, 땀이 많이 날 것 같으면 최대한 통풍이 잘되는 옷을 골라 입으며, 약속 사이에 뜰 수도 있는 시간을 대비해서 읽을 책을 챙기는 그런 바리바리 보부상 인간이기 때문이다.
지인 중에 즉흥과 충동을 빼면 표현할 단어가 부족한 친구 P가 있다.
다음날 9시 수업이 있어도 달이 뜨는 새벽이 행복하면 일단 즐기고 보는, 다음날의 자신을 믿고 지금의 행복을 놓치지 않는 친구이다.
마감일이 다가올 때는 주로 마지막에 효율을 발휘하는데 그 순간에 터지는 순발력은 또 얼마나 센스 있는지.
갑자기 쑥 떠나고 어느 날 훅 나타나기도 하는 P는 나에겐 자유롭고 신비로운 존재이다.
그에 반해 나는 아침 수업을 대비해 몇 시간 전부터 씻을 시간, 충분한 수면 시간을 계산해 새벽의 행복을 절반으로 접고 집에 귀가했으며, 마감일이 잡히는 모든 과제는 일찍이부터 시작해서 여유를 두고 미리 끝내야만 마음이 놓였다. 물론 완성도와 크게 연관성은 없었지만 말이다. 심적 안정감은 윤곽이 보이는 계획에서 나왔다.
나는 P의 자유로운 즉흥성을, P는 나의 꼼꼼한 계획성을, 서로 가지지 못한 그 부분을 부러워했다.
오전에 잡지를 읽다 원주에 위치한 식당을 운영하는 셰프이자 여행자의 인터뷰를 보았다.
셰프가 매력 있어 갑자기 그 식당이 너무 가고 싶었고 다음 주에 원주로 여행을 가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충동적인 여행 계획까지는 좋았지만 절대 즉흥적이진 않았다.
우선, 갈 수 있는 카페를 다 찾아서 지도에 저장하고 위치를 계산해 에어비앤비를 예약했다.
여행 시뮬레이션을 돌려 언제 원주에 도착해서, 카페에 몇 시간은 있어야지, 식당 예약 시간까지 여유로울지 계산한 후에 식당 예약 디엠을 보냈다.
어떤 책을 들고 갈지, 어느 코스로 산책을 할지, 어떻게 혼자 밤을 재밌게 보낼지에 대해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 후에야 나름 '즉흥적'인 여행 계획을 끝낼 수 있었다.
한 숨 돌리며 블로그를 켰는데 친구 P가 여행 중에 짐을 잃어버렸다는 글을 올려두었다.
"짐 찾자고 떠나온 길을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할 때는 왠지 모르게 쿨한 마음이 되어버려서 곧 잘 버리고, 곧 잘 떠나버린다. (....) 무겁잖아. 발걸음이 가벼워야 더 많이 갈 수 있는 게 여행이잖아"
-유실물에 대하는 쿨한 마음은 왜일까
(출처 : P의 블로그)
나의 여행 계획이 참 귀여워 보이는 순간이었다.
와.. 난 평생 즉흥성에 대한 선망을 버리지 못할 것 같다.
물론 준비와 계획은 나의 기질이란 걸 알아서 받아들이지만, 그럼에도 내가 가지지 못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참 부럽고 멋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예약한 식당의 (아직 디엠 확인을 안 하셨지만) 셰프 분도 라이브 한 매력이 있으신데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첫 혼자 여행이 머릿속의 수많은 계획 속에서도 자유롭길 바라며!
격리 해제일을 계산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