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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Nov 29. 2020

'미래'에 말 걸기

대화는 기술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다른 교육을 상상하다 No. 05

'미래'에 말 걸기



가르침과 배움의 의미


앞으로 10년, 우리 교육은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 걸까? 이는 결국 교육과정의 문제와 연결된다. 교육과정이란 과거에 대한 우리 사회 공동의 성찰이자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집합적 전망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교육과정의 의미를 확장할 때 가르침-배움이란 기성세대와 미래세대의 말 걸기-응답하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말을 거는 쪽이 항상 기성세대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이는 말 걸기의 착각이자 오류다. 듣지 않는 말 걸기는 자폐적 독백이나 다름없다. “라떼는 말이야”가 대표적 사례다. 가르침-배움의 위기는 기성세대와 미래세대의 소통의 실패를 의미한다. 말 걸기는 듣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목소리가 없는 자의 눈빛을 응시하는 것,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의 몸짓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캐나다의 교육자 브렌트 데이비스는 『구성주의를 넘어선 복잡성 교육과 생태주의 교육의 계보학』(2014)을 통해 인류의 ‘가르침’이라는 행위를 인식론의 관점에서 ①신비주의/종교, ②합리주의/경험주의, ③구조주의/후기 구조주의, ④ 복잡성 과학/생태주의로 나눈 바 있다. 그는 ‘가르침’이 시대적으로 어떤 경로를 거쳐 ‘발명’되어 왔는지 계보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책의 원제가 『Inventions of Teaching』, 즉 ‘가르침의 발명’이다). 이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① educating & disciplining: 

가르침이란 이끌어내는(educating) 것인가, 아니면 주입시키는(disciplining) 것인가. 사실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영화 <쿵푸 팬더>를 보면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상호보완적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처음에 스승 시푸는 포가 도저히 ‘용의 전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포의 잠재력을 왕성한 식욕으로부터 이끌어내면서 훈련에 성공한다. 시푸의 소명은 포의 잠재력을 이끌어내어 ‘용의 전사’로 키우는 것이지만 포가 어렵고 힘든 훈련을 감수해낼 열정과 끈기, 특히 스승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없었다면 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크 오즈번, 존 스티븐슨(2008)이 제작한 영화「쿵푸팬더」는 '신비주의/종교'적 관점의 가르침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② instructing & remediating: 

가르침이란 교수하는(instructing) 것인가, 아니면 교정하는(remediating) 것인가. 가르침이라는 것은 학생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내용들을 엄선하여 단순하고 기초적인 것들부터 점점 복잡하고 어려운 것들 순서로 교육과정에 담아 잘 설계된 교수법에 의해 구조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학생의 입장에서는 정상적인 발달단계가 설정되고 연령 적합도에 따라 교육내용들이 배열된다. 가르침은 평균적인 기준에 따른 진단과 치료라는 관점에서 이해된다. 교수/교정은 근대적 학교 체제의 대표적인 가르침의 유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Adriaen Jansz van Ostade(1662),「The School Master」이후 학교는 성별이나 나이에 따라 반(class)으로 나눠지게 된다.

  

③ modeling & empowering: 

머리가 크면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일반적 의미의 ‘가르침’은 ‘꼰대질’이 되어버린다. 이제 배울 만큼 배웠다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부모(교사)는 아이(학생)가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결코 고정되거나 완성되지 않는 자신의 세계를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인지 주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섣불리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modeling). “와! 나도 한 번 해 볼래!”라는 경탄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은 당연히 위험이 따른다. 하지만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다. 아이(학생)가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empowering). 이 단계부터 배움이 가르침에 우선하기 시작한다. 이상적인 가르침/배움은 학생이 교사의 의도를 따라가면서 교사가 학생의 학습과정을 조율하는 상호 안무와 같다. 

 


인류의 두 가지 과제


지난 호에서 ‘기후 특이점 문제(climate singularity)’와 ‘기술적 특이점 문제(technological singularity)’가 미래사회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이 두 가지 과제는 인간과 비인간의 새로운 관계 설정과 관련이 있다. 윤리적 관점에서 인류의 역사를 본다면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이 확장되어 온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기후위기와 대멸종이라는 작금의 사태는 이와 같은 인본주의적 관점이 한계에 봉착했음을 말해준다. 즉 존엄성의 범위가 인간을 넘어 지각이 있는 모든 존재(sentient beings)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 첫 번째 과제다. 

  

기술적 관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인공물을 이용하여 인간의 능력을 강화시켜 온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지능을 갖춘 인공물, 즉 인공지능은 제1의 기계시대와 제2의 기계시대를 나누는 획기적인 분기점이다. 지능을 갖춘 기계가 ‘진부한 일’을 넘어 ‘진부하지 않은 일’을 하게 될 때 오히려 인간이 진부한 존재가 될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인간과 생각하는 사물1)의 공존. 이것이 두 번째 과제다.  


마사 누스바움은 세계시민주의의 인간중심주의적 한계를 비판하며 존엄성의 확장을 말한다(左). 임완철은 인공지능과 연결된 모든 사물이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右).

  

인간중심주의가 오히려 비인간화와 탈인간화를 낳는 역설 속에서 학교는 인간과 비인간의 동맹이라는 새로운 존재의 기술을 생성하는 시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가르침/배움의 방법론이 ‘복잡성 과학/생태주의’이다. 

  

④ occasioning & caring: 

우리 모두는 집합적 행위자2)이다. 사람들은 단순히 역할로 정의되는 각본을 따르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지 않다. 사람들은 행동을 부추기며, 지성과 창의성, 임기응변 능력을 갖추고 있다. 물론 이런 행위는 갖가지 제약 안에서 일어나는데, 이런 제약은 사람들이 행동하는 배경인 사회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고 내면화된 제약이 신념과 습관에 구현되기도 한다. 따라서 가르친다는 것은 개인적 지식과 집단적 지식의 생산, 개인적 정체성과 집단적 형태의 진화, 그리고 개인적 행위와 집단적 가능성의 형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앎과 함과 삶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가르침의 기술이 아니라 가르치는 자의 태도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삶과 배움도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가르침/배움은 삶의 현장에 마음을 다해 참여함으로써 스스로 변화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인류가 나이를 먹어 가는 동안 가르침과 배움 역시 성장해왔다. 과거의 성공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라떼는 말이야”는 제발 잊어라. 우리에게는 이중의 과제가 있다. 하나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대화이고 다른 하나는 기성세대와 미래세대의 대화이다. 대화는 먼저 주의를 기울이고 경청하는 것(caring)으로부터 시작된다. 변혁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어 스스로 변화의 원인이 되는 것(occasioning)으로부터 시작된다. 목소리가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망설이고 주저할 때 등을 떠밀기보다는 함께 손을 잡고 한걸음을 내딛는 것. 대화는 기술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미래’에 대한 말 걸기는 눈을 뜨고 귀를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1) 임완철(2017)은 『생각하는 사물의 등장』에서 인공지능과 연결된 모든 사물이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다고 말한다. 

2) 에릭 올린 라이트(2020)에 따르면 행위자(agent)란 ‘구조화된 의미 있는 세계에서 의식적이고 반성적인 행동을 시작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대화는 먼저 주의를 기울이고 경청하는 것(caring)으로부터 시작된다. 변혁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어 스스로 변화의 원인이 되는 것(occasioning)으로부터 시작된다. 목소리가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망설이고 주저할 때 등을 떠밀기보다는 함께 손을 잡고 한걸음을 내딛는 것. 대화는 기술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미래’에 대한 말 걸기는 눈을 뜨고 귀를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 이 글은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에서 발간하는「학부모신문」348호에 수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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