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거여동 책 읽는 아빠들
세 명의 아빠들, 의기투합하다
책을 사랑하고 독서 토론을 즐기는 아빠들과 아이들이 모였다. 서울시 송파구 거여동과 그 인근에 거주하는 책 읽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의 <책 읽는 거여>는 충청 방언의 어미 “거여”를 붙여 딴짓 안 하고 오직 책 읽기에만 집중한다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모임의 시작은 사회적 협동조합 형태의 ‘공동육아’를 함께했던 세 명의 아빠들로부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큰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동육아를 졸업하고 나니 허전함이 좀 있었고 그동안 돈독하게 쌓아온 우정과 환대의 관계가 희미해지는 것 같아 아쉽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 감정이 책 모임 제안과 의기투합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지금은 열다섯 명의 아빠들이 참여하는 나름 큰 모임이 되었다. <책 읽는 거여>의 자랑은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아이들과 함께하는 독서 문화 프로그램이다. 작년에는 ‘아빠와 아이들이 함께하는 2020 책 읽는 거여 독서캠프’를 기획했다. 행사 전 아래와 같이 계획서를 만들어 서로 역할을 분담했다.
독서캠프가 열린 곳은 하남 ‘꽃피는 학교’. 함께 공동육아를 했던 선배 조합원 나무꾼과 부시시가 학부모로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당시는 2020년 11월 14일. 코로나가 다소 주춤해진 무렵이었다. (2020년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가 ‘코로나19 팬데믹’을 선언할 때만 해도 이것이 연말까지 지속되리라 믿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해를 넘겨 이 글을 쓰고 있는 2021년 7월 말까지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참으로 암담한 상황이다.) 이날 장소를 제공해준 부시시의 설명을 들으면서 꽃 피는 학교를 한 바퀴 돌아보고 아이들과 함께 행사 현수막을 만들었다. 아이들이 각자 A4 용지에 써 온 글자들을 모아 <아이들과 함께하는 책읽는거여 독서캠프>라는 현수막을 완성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삼동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책 낭독회를 진행했다. 아빠들은 아빠들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각자 자신이 읽었던 책 중에서 한 권을 골라 기억에 남아 있는 문장을 낭독하고 왜 이 문장이 나에게 의미가 있는지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처럼 책 읽는 거여는 아빠들의 독서 토론을 넘어 아이들에게 책 읽는 문화를 만들어 주면서 기성세대와 미래세대의 공감대와 유대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양한 직종, 나이를 지닌 아빠들의 평등한 모임
<책 읽는 거여>에 참여하고 있는 아빠들은 건설, 경찰, 세무사, 어린이집 교사, 엔지니어, 의사, 자영업자, 장학사, 초·중등학교 교사, 컴퓨터 프로그래머 등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 나열된 직종을 봐서도 짐작이 가겠지만 각자의 경력과 관심 분야가 모두 다르다 보니 구성원들의 다양함을 <책 읽는 거여> 만의 장점으로 승화시키고자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평등하게 순서를 정하고 한 명씩 돌아가며 책 추천을 하는 것이다. 그날의 모임 진행도 추천자가 직접 한다. 그 동안 우리는 어떤 책들을 읽어 왔을까? ‘우리 독서동아리를 소개합니다’ 원고를 쓰면서 그동안 <책 읽는 거여>에서 읽었던 독서 목록을 정리해 봤다.
푸른숲 추천, 『수학하는 신체』 (모리타 마사오 지음, 박동섭 번역, 에듀니티 펴냄)
의리 추천,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유현준 지음, 을유문화사 펴냄)
삼동 추천, 『번아웃 키즈』 (미하엘 슐테 마르크보르트 지음, 정지현 번역, 문학동네 펴냄)
오반장 추천, 『상상의 책꽂이』 (서현 글·그림, 효형출판 펴냄)
탈출 추천, 『아시아 신화 여행』 (김헌선 외 7명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푸른숲 추천,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오찬호 지음, 블랙피쉬 펴냄)
코나 추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번역, 한길사 펴냄)
도토 추천, 『호킹의 빅 퀘스천에 대한 간결한 대답』 (스티븐 호킹 지음, 까치 펴냄)
폴리 추천,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 (우에무라 타카시 지음, 길윤형 번역, 푸른역사 펴냄)
동글이 추천,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아담 스미스, 러셀 로버츠 지음, 이현주 번역, 세계사 펴냄)
자전거 추천,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문학동네 펴냄)
의리 추천, 『90년생이 온다』 (임홍택 지음, 웨일북 펴냄)
푸른숲 추천, 『대한민국 부모』 신희경 외 2명 지음, 문학동네 펴냄
새우눈 추천, 『청춘의 커리큘럼』 (이계삼 지음, 한티재 펴냄)
푸들곰 추천, 『세계 대전Z』 (맥스 브룩스 지음, 박산호 번역, 황금가지 펴냄)
은쟁반 추천,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김종철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
기린 추천, 『이상한 정상가족』 (김희경 지음, 동아시아 펴냄)
삼동 추천, 『능력주의와 불평등』 (홍세화 지음, 교육공동체벗 펴냄)
코나 추천, 『소설처럼』 다니엘 페나크 지음, 이정임 번역, 문학과지성사 펴냄
삼동 추천, 『삐딱한 책읽기』 안건모 지음, 보리 펴냄
이런 식으로 동아리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책을 추천하다 보니 평소 본인의 취향으로는 결코 읽지 않을 책도 읽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첫 번째 추천도서였던 모리타 마사오의 『수학하는 신체』이다. 당시에 몇몇 지인들과 함께 모리타 마사오를 우리나라로 초청하여 ‘수학 연주회’를 진행 중이었는데 <책 읽는 거여>에서도 이 책을 함께 읽게 되면서 아빠들 중 일부가 직접 모리타 마사오의 수학 연주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지금도 당시를 떠올릴 때면 “이 나이에 수학에 대한 책을 읽게 될 줄은 몰랐다. <책 읽는 거여>가 아니었다면”이라고 말하곤 한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책은 푸들곰이 추천한 『세계 대전 Z』이다. 『월드 워 Z』라는 이름의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이 책은 중국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사람들이 감염되기 시작하면서 전 세계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는 과정이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평상 시에 거의 읽지 않던 좀비물 SF소설을 중년의 남자들이 손에 땀을 쥐며 읽고는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채로 토론하는 모습은 이채로웠다. (이 책 바로 전에 읽었던 책이 이계삼의 『청춘의 커리큘럼』이고 바로 후에 읽었던 책이 김종철의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라서 더욱 대비가 되지 않았나 싶다.)
꼰대가 되지 않는 최선의 방법
이와 같은 책들을 만나게 되면서 어떤 아빠들은 평상시 전혀 고민하지 않던 낯선 문제에 소위 ‘문화충격’을 겪기도 하고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아가는 쏠쏠한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어떤 아빠들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아빠들과의 속 깊은 이야기를 통해 직장에서는 얻지 못했던 욕구가 충족되기도 했다. 2018년부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다양성을 바탕으로 독서 동아리 <책 읽는 거여>의 도서 목록을 구축해왔다면 앞으로는 1년 단위로 주제를 정해서 운영을 해볼까 고민하고 있다. 동아리 모임이 3년이 넘게 지속되다 보니 ‘깊이 읽기’에 대한 욕구도 좀 생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서로 다른 나이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지만 <책 읽는 거여> 회원들은 미취학 또는 초등학교 자녀를 둔 아빠들이다. 그러다 보니 자녀들 육아와 교육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독서동아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한 화두이다. 책의 내용만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일상 속 아이들의 육아와 교육으로 확장해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가 집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아이들이 자주 보게 되면서 책에 대해 궁금해한다. 가끔 온 가족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아무런 대화도 없이 각자 자신의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노라면 왠지 대화가 사라진 삭막한 가족이라는 느낌이 든다. 반면에 책은 느낌이 좀 다르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각자의 책을 읽는 가족의 풍경은 왠지 평화롭고 희망이 넘쳐나는 것이다. 아이가 잠자리에 들기 전 책을 읽어줄 때가 있다. 책을 매개로 아빠와 아이가 공통의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함께 읽기’의 힘이라 생각한다. 아직까지는 아이가 내가 읽어주는 책을 귀 담아 듣는다는 것이 묘한 기쁨과 안도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처럼 책은 아이들과 소통하는 것이 어렵기만 한 무뚝뚝한 아빠들이 아이들과 조근조근 이야기 나누는 상냥한 아빠가 될 수 있도록 돕는다. 단순히 ‘내 아이’만을 위한 육아 고민을 넘어, ‘우리 아이들’을 위한 좀 더 나은 세상을 함께 꿈꾸는 동지들이 생기는 것 역시 큰 선물이다.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아빠들의 이야기를 직접 옮겨 본다.
이제 편협된 사고로 세상을 보게 되는 나이입니다. ‘책 읽는 거여’가 있어 다양한 책과 아빠들과의 토론을 통해 조금은 넓게 세상을 조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책 모임에 참석하는 아빠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 줄 수 있어서 뿌듯하기도 하고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고 책 읽기를 지속하고 있지만, 책을 나눠 본 적은 없었어요. 나에게 ‘책 읽는 거여’란 혼자만의 책 읽기를 넘어 함께 책을 읽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는 든든한 지원군 같은 곳입니다. 이들을 믿고 바쁜 평일 늦게까지 모임을 하고 가도 집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어서 코로나가 잦아들기를!
‘책 읽는 거여’는 아빠들이 퇴근한 이후에 만나야 하다 보니 평일 저녁 8시 이후에 만나고 있다. 시간대가 시간대인지라 모임을 하기에 좋은 마땅한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공공기관의 경우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여는 곳이 거의 없다. 일반적인 카페나 레스토랑은 주변이 소란스럽거나 우리의 토론으로 소란스러워질까 눈치가 보였다. 그러던 중에 독서를 좋아하는 동네 카페 사장님을 알게 되었다. 코로나19 이전까지는 그곳에서 주로 모임을 가졌다.
안타깝게도 팬더믹 이후에는 사회적 거리두리로 인해 비대면으로 온라인에서 진행하고 있다. 아빠들 퇴근 시간이 들쭉날쭉하다보니 제 시간에 참여하지 못하는 아빠들도 꽤 있다. 예전 같았으면 늦은 시간 뒤풀이 자리라도 참석해서 시원하게 맥주 한잔 들이키며 금요일 밤을 자축했을 터였다. 지금은 뒤풀이 자체가 불가능하다보니 책 모임이 점점 단조로워지는 듯한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온라인 모임이 만들어 준 순기능도 있다. 바로 얼마 전에 열렸던 모임 이야기다. 피자 가게를 운영하는 자전거가 늦은 시간까지 주문이 밀려 이번에도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다. 그런데 잠시 온라인으로 얼굴을 비춘 것이다! 자전거의 카톡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옮긴다.
배달 다니면서 라디오 청취하듯 들었습니다. 오늘 날씨처럼 후덥지근하고 끈적끈적했던 저의 머리를 마치 막 샤워하고 나와 맥주 한 캔 까서 시원하게 마신 듯 찌릿찌릿하게 해 주더군요. 이야기 나누지는 못해 아쉽지만 이렇게 글쓰기 한번 남깁니다. 다들 건강하시구요.
이 글은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우동소(우리 동아리를 소개합니다)' 코너에 수록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