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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Sep 20. 2021

사소한 것이 사소하지 않게 보일 때

세상은 조금 더 좋아질 것이다


아버님. 잠깐만요. 사진을 좀 찍어야겠어요.



휠체어를 낑낑대며 안전한 곳으로 올리고는, 그냥 가면 안 될 것 같아 잠시 멈췄다. 걸어서 이동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휠체어로 이동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위험천만한 장소가 될 수 있다. 약간의 홈이나 굴곡에도 휠체어가 휙 넘어갈 수 있는데 자칫 대형사고로 이어지기도 한다.



내가 멈춘 이유


사진 속 지점은 대청호자연수변공원 정문 옆. 사연인즉슨 이렇다. (길다..ㅠ) 민주지산 자연휴양림에서의 이틀 간의 가족여행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 추동습지에 잠시 들렸다. 인터넷 검색으로는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다고 해서 믿고 왔는데 아뿔싸 생각보다 너무 짧은 게 아닌가. 데크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바로 포기를 했어야 하는데 미련하게도 좀 더 가면 다시 나오지 않을까 하다가 진땀만 잔뜩 흘렸다. ‘이 바보야, 인터넷 검색 좀 제대로 할 것이지.’ 자책하면서. 다행히 인근에 전망 좋은 레스토랑이 있어서 땀도 식히고 배도 채우고 여행의 마지막을 잘 장식했다(고 생각했다).


자 이제 출발해 볼까. 차를 세워둔 곳까지 휠체어를 밀며 이동하는데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대청호자연수변공원이 보인다. 여기서 실수를 만회해보자. 그런데.. 어? 정문으로 진입하기 직전 갑자기 보도블록이 끊긴다. 잔디밭인데 (사진과는 달리) 매우 울퉁불퉁하다. 약간의 경사까지 있다. 이런 길이면 휠체어를 돌려서 후진하듯이 내려가야 한다. 어찌저찌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반대편 쪽 출입구에 경사로가 없다! 계단이다!


아버님. 죄송해요. 갈 수가 없어요.


결국 정문으로 되돌아 나왔는데 휠체어 앞쪽을 약간 들어서 후진하며 경사로를 올라가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하여 소심하게 폭발.


“아버님. 잠깐만요. 사진을 좀 찍어야 겠어요.”


이렇게 된 것이다. 또 다시 진땀을 흘리며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을 향해 서둘러 가는데 아버님께서 한 말씀 하신다.


“뭐.. 예산이 부족해서 그럴 거야.”


“아니. 저건 예산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모든 곳을 잘 해놓고도 사소한 것 하나 때문에..(욕을 먹죠.)”


“예전에는 들은 척도 않했는데 뭘..(그래도 세상이 많이 좋아졌지)”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어느 면에서 세상이 좋아진  확실하다. 하지만 장애인이 살아가기에는 여전히 쉽지 않은 세상이다. 사실 겪지 않으면   없고, 그걸 탓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계속 알리고 고쳐나가는 수밖에. 연휴가 끝나면 지자체 홈페이지에 사진과 함께 요기만  개선해 달라고, 생각보다 많이 불편하다고 글을 올리려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던가. 사소한 것을 사소하지 않게 여길  세상은 조금  좋아질 것이다.



다음과 같이 개선을 부탁드립니다.


첫째, 정문 우측 장애인 보행을 위해 보도블록 개선해주세요.

둘째,  건너편 연결 횡단보도 설치 및 보도블록턱 낮춰주세요.

셋째, 추동습지 데크길 연장 혹은 평탄화 작업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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