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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Sep 22. 2021

아버지의 일기장

쉬흔 살 아들, 서른 살 아버지를 만나다

아버지의 일기


아버지 유품 중에 일기장이 있다. 아버지의 일기는 단기 4291년(1958년) 12월 25일 시작하여 어머니와 결혼 직후인 1964년 1월 26일에 끝난다. 일기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단기를 쓰다가 끝날 무렵에는 서기로 기록한 것도 이채롭다. 


그리운 동생의 마음
하루에도 두 번 씩
불러도 대답없는
나의 마음 누가 아리오

- 4291년 12월 28일


오날도 검사준비를
하고 보니
또다시 눈날리는
벌판에서 고향 생각
그리워요

- 4291년 12월 30일


오늘 하루도
그럭저럭 보내고
말았다
인생이란 이런가

- 4291년 1월 3일


나는 삼천리 방방곡곡
다 가 보아도
내 고향 '신창'만 못하더라

- 4292년 1월 18일



헤어진 형님들과의 조우


고향 생각의 고민 중에 우연히 고향 친구인 '어수연'이라는 아이를 만났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형님의 소식을 물었던 것이다.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너의 형님을 서울에서 만났다"하는 소식을 듣고 그 즉시 휴가증을 받아 가지고 찾아 떠났다.

4292년 8월 26일. 이날 마침 비가 무진장 오기 시작했다. 17시경 형님을 만났다.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밤 20시 경 작은 형님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 왔다. 27일 08시 경 넷째 형님을 만났다. 이러고 보니 삼형제와 형수님들과 만나게 된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한편 고향에 있는 가족에 일을 생각하면 한숨만 남아 있다.

- 4292년 8월 27일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으로 6형제 중 다섯 째였던 아버지는 1951년 1·4 후퇴 때 국군에 입대하여 홀로 월남했다. 그 후 셋째 큰 아버지와 넷째 큰 아버지는 함께 원산항으로 가서 월남을 하려고 했으나 넘쳐나는 피난 인파 속에서 셋째 큰 아버지만 피난선에 오르고 넷째 큰 아버지는 배를 놓치고 만다. 그후에 넷째 큰 아버지가 겪었던 상상 못할 고초는 월남한 삼형제가 모였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단골 메뉴였다. 이 이야기 말고도 해방 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 아버지가 셋째 큰 아버지를 따라 "카무챠카 반도(캄차카 반도)"에 다녀오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건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맨 처음으로 물어보고 싶은 내용이다. "그거 정말 사실이에요?" 




오십이 코 앞인 아들, 서른 살 아버지와 만나다 


이 날에는 10월 1일에 바로 나의 탄생날이었다.
나는 고민과 슬픔과 비관이 남는 사람은 누구였던가
하늘은 무엇을 슬퍼서 이다지도 우는가 울지마라
이 시간을 계속 되는 여전히 비는 나리고 있다.
창문을 열고 한없이 보았다

- 4292년 11월 1일


5월 4일부터 아프기 시작하였다. 나는 고민도 많았다. 고독할 때도 많았다. 외로울 때도 많았다. 비관도 많았다. 나는 누구에게 비관이 있었던가? 수송관에게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나는 13일날 전중위님에게 위로를 받았다. 
이로 인하여 집으로 가게 되었다. 약 십여 일 간 대대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던 중 효과를 보지 못하고 죽은 몸이나 다름 없이 되어서 집으로 가게 되었다.

- 4293년 5월 14일


아버지의 일기를 읽어보면 당시 군대의 심각한 비리와 폭력이 드러난다. 기름을 팔아먹고 옆 부대에 가서 물자를 훔쳐오고.. 가관이 아니다. 아버지가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부하들을 괴롭히던 '수송관'이 나오는데 생각해보니 생전에 아버지께서 가끔 이를 갈며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공중 목욕탕에 가면 다리가 시작되는 양 옆 골반 쪽에 커다란 흉터가 있었는데, "아빠 이게 뭐야?"라고 물어보면 잘 이야기를 안하다가 내가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서야 이야기를 해주신 것이다. 


1931년생으로 혈혈단신 월남하여 외롭게 군 생활을 하던 젊은 청년의 글이 낯설기만 하다. 일기장 속의 아버지는 지금의 나보다 한참 어려서 옆에 있다면 토닥여 주고 싶을 정도다. 고향에 대한 - 특히 막내 동생에 대한 - 그리움, 장래에 대한 불안, (하사에서 중사로) 진급에 대한 고민, 인간 말종 상관에 대한 걱정이 글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지만 아버지의 비관과 우울은 결혼과 함께 수면 속으로 가라앉았던 것 같다. 어쨌든 가정을 꾸리고 더 이상 혼자 만이 아닌 부부로서의 삶을 살아내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올해는 아버지가 태어나신 지 90년, 돌아가신 지 15년이 되는 해다. 오늘 딸램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산소 앞에서 에스파의 <넥스트 레벨>을 시전하셨다. 평소에 찬송가 404장만 불러드렸는데.. 많이 놀라셨죠? 좋으셨다고요? ㅎㅎ 시간이 참 덧없이 흘러간다.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나의 기억에서 잊혀지기 전에 아버지의 기록들을 정리하고 싶은데 엄두가 안 난다. 추석이 지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른 일들에 매달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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