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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Oct 26. 2021

지구를 위한 법과 2030년의 세계

강금실, 『지구를 위한 변론』

이 글은 환경과생명을지키느전국교사모임의 제46차 화요공부모임의 발제 <지구를 위한 변론, 자연의 권리와 지구법학>의 토론문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진화의 서사     


특히 우리는 진화의 서사가 갖는 ‘이야기’라는 특성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인류의 발전사보다 더 큰, ‘우주 이야기’에 참여할 때 비로소 다른 비인간 존재들과의 상호 연관성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사에 참여해서 스토리를 갖는 존재들과 만남으로써 미래의 길이 열린다.

- 강금실, 『지구를 위한 변론』 117~118쪽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말하는 이야기가 아닌 보고 듣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무엇보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안부를 묻”고 부끄러움과 슬픔과 애도의 정서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그렇게 구전된 이야기들은 쌓이고 눌리고 깎이면서 더 큰 이야기로 이어질 것이다.            



비질(vigil)     


오늘도 도축장 앞에서는 비질이 열렸다. 비질은 폭력의 증인이 돼 기억·기록·공유하는 활동을 이르는 말이다. 


한 돼지가 비질 참가자가 주는 물을 받아 마시고 있다. /박상환 프리랜서 사진가 제공(출처: 경향신문)


한 비질 참가자가 물이 담긴 페트병을 도축장에 들어가는 돼지에게 내밀었다. 돼지는 죽기 전 12시간 이상 굶는다. '축산물 위생관리법 시행규칙' 때문이다. 운송 중에는 물조차 마시지 못한다. 사람으로 따지면 이제 초등학교 2~3학년 정도 된 아이들. 도축장에 들어가는 돼지의 나이는 불과 6개월이다(돼지의 자연수명은 20년이다).     


도살장은 이상한 곳이다. 도살의 사슬에 묶여있는 노동자의 생계가 돼지의 죽음과 오버랩되는 곳이다. 인권기록활동가 홍은전은 “목마른 돼지에게 물을 주는 일도, 아무 죄 없이 곧 교수형에 처해질 생명을 위해 울어주는 일도, 그것이 도살장 앞이라면 어딘가 조금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라고 비질에 참여한 느낌을 전했다. 죽은 돼지를 식탁에 올리는 내가 그 사슬의 밖에서 전지적 시점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이처럼 쉽지 않다.    


       

반려종과 실뜨기하기     


지구는 다양한 생명체의 기능과 인간 사회의 기능이 통합되어 있는 단일체다. 그러므로 지구는 모든 국면에서 이들 생명체와 영향을 주고 받는다. 지구의 통합된 기능은 보존되어야만 한다. 지구의 안녕이 최우선적이며 인간의 안녕은 여기에서 파생된다.

- 강금실, 『지구를 위한 변론』 124~125쪽     


기계적-이원론적 세계관의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지구’란 땅이거나 공기이거나 바다이다. 그것은 그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이거나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자원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구의 안녕”은 자원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일이 되어 버린다.         


데카르트식의 이분법적 세계관은 아직도 공고하며, 법학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중략) 민법은 주체와 객체를 엄격히 나눠서 인간 외의 모든 존재는 원칙적으로 ‘물건’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 강금실, 『지구를 위한 변론』 154쪽


따라서 지구에 대한 지식은 Oikos nomos한 지식이 아닌, Oikos logos한 지식이 되어야 한다. Eco-nomy 즉 지구를 물건과 재산으로 다루는 기술이 아닌, Eco-logy 즉 모든 생명체의 공동의 집에 대한 사유가 되어야 한다. 도나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이를 ‘반려종과 실뜨기하기’로 표현한 바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해하는 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 책에서 등장하는 용어들과 이야기의 서술 방식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금실은 『지구를 위한 변론』에서 베이트슨을 인용하면서 “생명은 논리학이 아니라 공통점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으로서의 ‘은유’가 적용된다.”고 말한다.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의 방식은 은유다. 그것도 매우 새로운 은유를 창조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반려종과 실뜨기하기’라는 은유를 잠시 생각해보자. 해러웨이에 의하면 우리의 세계는 반려종과 실뜨기하는 세계다. 반려종은 반려동물이 아니다. 그것은 그동안 인간이 끊임없이 만들고(잡고), 쓰고(먹고), 버려왔던, 인간의 삶을 지속시켜 주던 모든 것이다. 그들과 실뜨기한다는 것은 그들을 드디어 ‘물건’이 아니라 나의 ‘반려’로 인식하고 그들의 표정과 체온과 목소리에 응답하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실뜨기가 중지되지 않도록 그들과 계속되는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이것이 너무 지나친 은유일까? 그렇지 않다. 생명을 물건으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지나친 은유가 아닌가? 회사를 법인(法人)으로 은유하는 것은 또 어떤가. 우리는 그것이 합리적인 것으로 세뇌되어 왔을 뿐이다. 회사가 法人이라면 하늘과 바람, 나무와 강도 法人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소와 돼지가 물건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지나친 은유가 아니다. 따라서 나는 지구의 법이 이러한 은유를 정당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선형의 시대에서 순환의 시대로     


2021년 10월 20일 현재 이산화탄소 농도는 415.67ppm이다(전 지구 측정치 평균). 산업화 이전 280ppm이던 이산화탄소 농도는 1986년 350ppm을 넘어섰고 2013년 400ppm을 넘겼다. 과학자들은 지구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450ppm을 넘기면 돌이킬 수 없는 기후변화가 초래될 것으로 본다. 이제 마지노선까지는 불과 35ppm이다.      


한겨레 기후팀에서는 매주마다 <이주의 온실가스>를 발표하고 있다. (출처: 한겨레)


많은 이들이 ‘기후위기’를 말한다. ‘생태적 전환’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태적 전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세계보건기구가 코로나 팬데믹을 선언한 2020년 3월 11일이 전환의 변곡점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결국 10년 안에 450ppm을 넘어서는 파국의 변곡점을 맞이하게 될까.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저자는 두 가지의 원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나는 요한 록스트룀의 원이고, 다른 하나는 케이트 레이워스의 원이다. ‘행성 경계’라 불리는 아래 왼쪽 록스트룀의 원이 인간이 선을 넘어서는 안 될 최소한의 범주들을 규정하고 있다면, 아래 오른쪽 레이워스의 원은 행성 경계를 반영한 순환적 경제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생태적 과학과 생태적 경제학의 탄생을 목도하고 있다.     


요한 록스트룀의 '행성경계'(左)와 케이트 레이워스의 '도넛경제'(右)


이제는 법학의 차례다. ‘지구를 위한 법학’이 필요하다. 그것은 선을 넘는 인간들을 규제하기 위한 지구적 거번넌스다. 지구법의 원리 속에서 ‘민주주의’ 역시 ‘생명주의’로 전환되어야 한다. 아마도 ‘생태민주주의’는 이를 위한 과도적인 단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생명주의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선을 넘는 권력자와 자본가를 통제할 수 있는 권력과 정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구생태시민’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사회적 기초’와 ‘치명적인 환경 위기를 막는 생태적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균형으로 찾아가는 안전하고 정의로운 세계를 생성하는 인간일 것이다. 그것이 2030년의 세계가 되어야 한다.       


   

2030년의 세계     


마지막으로 2020년 5월부터 9월까지 실시된 유네스코 국제 설문조사 <The world in 2030>의 분석 결과를 살펴보자. 


출처: UNESCO, Survey Results <The world in 2030>


세계 시민 15,038명이 참여한 설문조사 <2030년의 세계>에서 응답자들은 평화로운 2030년을 위협하는 4가지 도전으로 첫째, 기후 변화와 생물다양성 상실(67%), 둘째, 폭력과 갈등(44%),  셋째, 차별과 불평등(43%), 넷째, 식량과 물, 주택 부족(42%)을 꼽았다. 사실 이 네 가지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면 안되는 것이 각각의 도전들 모두가 그 자체로도 해결이 쉽지 않은 매우 어려운 과제일 뿐 아니라 자칫 서로의 발목을 잡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꽃놀이패와 같은 상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출처: UNESCO, Survey Results <The world in 2030>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먼저 좋은 소식. 세계 시민들은 다양한 형태의 교육이 우리 세계가 직면한 많은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는 결정적인 해결책(top solution)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나쁜 소식도 있다. 95%의 세계 시민들이 국제 협력의 중요성에 공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계가 공동의 도전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단지 25% 만이 확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꿈이 행동을 추동한다   

 

저자는 “Dream Drives Action(꿈이 행동을 추동한다)”라는 칼 융의 문장으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하면서도 대담한 꿈이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오직 겸손한 사람만이 전환에 이를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그 교만함으로 인해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 자신이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경청하지 않으면 연대할 수 없고 연대하지 않으면 전환에 이르지 못한다.    

   

우리는 예전에 겪어보지 못한 지질시대를 헤쳐가기 위해 아주 커다란 꿈을 꾸어야 한다. 지구 공동체의 모든 존재가 참여하고 소통하는 세계, 자연의 순리를 따라 에너지를 사용하고 창조와 혁신이 이루어지는 세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생각하고 대화하고 선택하고 결의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그 꿈이다. 이러한 전망이야말로 왜곡된 비전으로 인해 폐허처럼 남은 ‘쓰레기더미’를 꿈의 낙원으로 변화시켜줄 것이다. 근대의 성장 신화에서 미래 세대와 자연이 주체로 참여하는 더 풍요로운 시대로 이동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우리가 지구에서 꿈꿀 수 있는 최선의 이상동동체에 해당한다.

 - 강금실, 『지구를 위한 변론』 214쪽     


모든 존재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을 상상하자.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과 함께 겸손하고 담대한 꿈의 여정에 참여하고 싶다. 


강금실, 『지구를 위한 변론』표지(左)와 환생교 제46차 공부모임 웹자보(右)



많은 이들이 ‘기후위기’를 말한다. ‘생태적 전환’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태적 전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세계보건기구가 코로나 팬데믹을 선언한 2020년 3월 11일이 전환의 변곡점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결국 10년 안에 450ppm을 넘어서는 파국의 변곡점을 맞이하게 될까.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이 글은 환경과생명을지키느전국교사모임의 제46차 화요공부모임의 발제 <지구를 위한 변론, 자연의 권리와 지구법학>의 토론문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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