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 무엇이냐고 묻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한마디로 명확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교육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거기다가 생태적 전환이라니요. 그래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답변의 방향을 좀 바꾸어 보겠습니다.
얼마 전 작고하신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님은 자신의 마지막 저서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서 "이 절체절명의 전환기에 아마도 가장 시급한 것은 도대체 '문명'이란 게 무엇인지 깊이 숙고하는 게 아닐까"라고 묻습니다. 그는 일본 생태주의 사상의 선구자라 불리는 다나카 쇼조의 말을 빌려 "지금 세계 인류 대다수는 기계문명에 의해서 살육당하고 있다. 문명은 인간을 집어삼키는 악의 도구가 되었다. 산을 황폐화 하지 않고 마을을 파괴하지 않고 인간을 죽이지 않는 것이 참된 문명"이라고 주장합니다. 문명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다나카 쇼조의 사상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렴풋하게나마 '근대문명'의 특징과 성격을 이해합니다. 제가 특징과 성격이라고 말했는데요, 특징이 눈으로 보이는 현상을 표현한다면, 성격은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본질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두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우리가 고대문명, 중세문명과 구별되는 근대문명의 특징과 성격을 선택하여 이야기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육, 특히 제도교육이라는 것이 근대문명과 함께 탄생했으며 또한 이 문명의 재생산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근대문명이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실 위기의 징후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죠. 단지 계속 외면하거나 왜곡해 왔을 따름입니다. 그러던것이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이하면서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잠시나마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죠. 여전히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형국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근대문명의 대안으로서 '생태문명'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물론 생태문명은 탈근대의 한 가지 모델에 불과할 뿐입니다. 게다가 방금 말했듯이 ('생태적 탈근대'는) 다양한 탈근대 담론의 아웃사이더에 불과합니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란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의 흐름 속에서 제도로서의 교육이 어떻게 전환되어야 하겠는가에 대한 하나의 간명한 답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생태문명의 교육은 마땅히 생태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향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근대문명의 종언(그리고 그에 따른 근대교육체제의 종언)에 대한 부정과 회피이고, 두번째는 근대문명의 대안 제시에 대한 불신(근대문명의 종언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대체하는 것이 왜 생태문명인가)입니다.
27년 감옥 생활을 했지만 결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어 자신을 탄압한 세력과 화해를 추구한 넬슨 만데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이든 되기 전에는 다 불가능해 보인다.
그게 진실입니다. 2011년 '교육불가능'과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이야기했을 때, 많은 이들이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교육이 여전히 가능하다 말했고, 누구는 생태적 전환이야말로 불가능하다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 다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교육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생태적으로 전환되었을 때에라야 가능하다. 그러면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명의 존엄성을 위협하고 쓸모에 따라 서열화시키는 모든 속박과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 속에서 저절로 성장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변혁의 주체를 만드는 일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총 열 번에 걸쳐 여러 벗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글의 상당부분은 여러 지면을 통해 나누었던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과거의 글과 다른 점이 있다면 교육의 생태적 전환에 있어서 '교육과정'이 지니는 의미에 대하여 주목하고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위해서는 교육과정의 자율과 분권이 필요하다라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마스크가 뉴 노멀의 상징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러나 21세기의 스무 번째 해가 이처럼 기괴할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끔찍한 소식은 아주 오래 전부터 들려왔지만 우리는 단지 외면하거나 왜곡했다. 반복되는 위험 신호 앞에서 그저 무감각해졌을 뿐이다. 악의 없는 언어와 주름살 없는 이마는 어두운 시대의 표상이 되었다. 브레히트 못지않게, 우리는 어두운 시대를 건너고 있다.
그동안 학교는 항상 미래를 말해 왔다. 그러나 학생들이 묻는다. “미래가 없는데 왜 미래를 위해 공부해야 하나요?” 이를 세상 물정 모르는 청소년들의 치기 정도로 치부하던 근대적 교육 체제가 코로나19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한낱 바이러스로 인해 등교가 중지될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미래를 이야기해왔으나 막상 코로나 앞에서 한치 앞의 미래도 내다보지 못한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지구생태시민이 된다는 것은 지각이 있는 존재로서 현재의 위기상황에 대하여 수평적-수직적으로 인식하며 지구적-지역적으로 참여함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시민(Demos)의 지배(Kratos)’를 의미하는 Democracy는 ‘지각 있는 존재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들의 ‘존엄’을 보장하는 Dignocracy로 확장된다.
근대적 교육 체제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관점에서 학교에서 배우는 진리 내지 지식은 이미 완벽하게 체계화된 것으로 본다.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해야 할 지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the World)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으로 상정한 저 세상(out of the World)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저 세상에 집중할수록 학교 공부는 실제의 삶과는 괴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저 세상을 제거해야 한다. 이제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완벽한 저 세상의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다.
학생 없는 학교가 존재할 수 없듯 배움 없는 가르침도 상상할 수 없다. 세상 속에서 벌어지는 날 것 그대로의 삶을 직시하면서 질문을 던지는 행위를 배움이라고 할 때, 그 속에서 수많은 편견과 오해, 왜곡과 혐오의 함정을 피해가는 길을 안내하는 것이 곧 가르침이어야 한다. 세상을 변혁시키는 일의 원인이 되게(occasioning) 하고, 참여하게(participating) 할 것. 지각이 있는 모든 존재들과 대화하게(conversing) 하고, 주의를 기울이게(caring) 할 것. 기후위기 시대의 교육은 마땅히 나와 당신,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를 포함한 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변혁시키는 과정에 참여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분절된 교육체제를 논함에 있어 교육과정에 대한 성찰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생태계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대멸종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다는 것도 알면서도 그것을 바꾸기 위해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학교가 과거의 지식에 대한 재생산과 복제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가르침과 배움이 가능성의 공간을 확장함으로써 아직 생각하지 못한 것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내는 일이 되려면, 교육의 목적이 이미 존재하는 진리에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분화하는 것이 되려면 우리는 교육과정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깊이 숙고해야만 한다.
대한민국 교육과정 운영의 역사에서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화살표는 실제로는 작동하지 않는 무의미한 장식이었다. 이제 그것을 작동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교에 합당한 권한을 부여하여 교육과정 운영의 선순환 구조(feedback loop)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최선의 방법은 교육과정 편성 원리로서의 역량을 선택함으로써 현실의 삶을 교실로 다시 불러오는 것이다.
교육과정은 단순히 가르치는/배우는 내용의 목록이 아니다. 그 자체가 중요한 교육 체제이다. 따라서 교사와 학생이 가르침과 배움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교육과정 체제 역시 전환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교육청-학교로 이어지는 하향식 교육과정 체제가 가르침과 배움을 구획하고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강제해왔기 때문이다. 교육과정 분권은 학교교육과정의 자율성 확보를 위해 필수적이다. 앎과 함과 삶이 일치하는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교육의 주체들 사이의 경계를 넘어선 배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교육과정은 이를 위한 자율적인 플랫폼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미래未來’란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지금 다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을 미래로 규정하는가는 가치의 문제이자 사회적 합의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를 교육과정으로 다루는 학교가 곧 미래학교일 것이다. 「한국인 선호미래 조사연구」는 우리 사회의 분열된 욕망을 보여준다. 미래가 걱정은 되지만 그렇다고 전환의 용기는 없는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교육을 생태적으로 전환하는 것이 미래교육임을, 그럼으로써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좁히는 시공간이 미래학교임을 말해준다. 기존의 학교가 점점 더 의미 없는 공간이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미래교육/학교가 웃음거리가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라는 단어가 학교교육과정에서 잘못된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현실주의가 필요하다. 마스크가 일상이 된 현실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기후위기를 극복하고 지각 있는 모든 존재가 존엄을 지키는 사회를 꿈꾸는 것은 (아직은 비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현실적이다. 나는 학교가 여전히, 아니 아직은 비현실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희망의 공간이라 믿는다. 원인은 미래에 있다. 원인이 미래에 있을 때 그 결과가 현재에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