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는 것 그리고 희망을 노래하는 것
함께 읽는 책 No. 33
도란도란 교육희망을 일궈가는 사람들(2022), 『혁신학교 이야기』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라는 간디학교의 교가처럼 아이들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고 싶었던 우리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어놓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더 많이 배우고 노력하려 합니다. 우리들의 고민과 실천이 아이들에게 배우는 즐거움, 함께 성장하는 기쁨을 선물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도란도란'과 '일궈가는'
책이 나오자마자 바로 구입했다. '도란도란 교육희망을 일궈가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그 중에서도 '도란도란'이라는 말과 '일궈가는'이라는 표현이 참 좋았다. '도란도란'이라는 말은 즐거움이 묻어나는 말이다. 누군가 혼자 일장연설을 할 때는 그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 웃음이 있고 눈물이 있을 때, 귀 기울이는 사람과 맞장구치는 사람이 있을 때 '도란도란'이라는 표현을 쓴다. 한편 '일궈가는'이라는 단어는 끈덕짐이 느껴지는 말이다. 밭을 일궈본 교사 혹은 학생을 가르쳐본 농부는 알 것이다. 교육에 대한 희망을 일구는 것과 열매를 기다리며 밭을 일구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밭을 갈고, 돌을 줍고, 물과 거름을 주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솎아주는 일련의 과정은 교육을 통해 한 아이가 성장해가는 과정에 대한 생태적 은유이기도 하다.
서울형 혁신학교가 도입된 지 10년을 넘어서고 있다. 책의 추천사를 쓴 최승복 서울시교육청 기획조정실장은 혁신학교 운동을 '150년 한국 근대 교육사의 일대 사건'인 동시에 "150년 동안 면면히 이어져 온 한국 교육 운동의 기본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상대 전 삼정중학교 교장 역시 "교실의 절망과 마주 선 교사들의 자발적 연구와 실천에서 출발한 것이 혁신학교 운동"이며, "혁신학교의 실천 원리와 내용은 특별하지 않다"고 말한다. 학생들에게 잃어버린 학교를 찾아주는 것. 그것이 혁신학교 운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글을 읽으면서 학교를 잃어버린 것이 학생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금나래초등학교 이정희 선생님은 「교실 속 배움의 꽃을 피우기 위해」에서 이렇게 묻는다. "왜 우리는 학창 시절 수업을 기억하지 못하나?"
나는 20년 가까이 경력을 쌓아왔지만 성숙한 교육자로서의 내면 성찰이나 생활 태도와는 거리가 먼 교사였다. 교사는 수업만 잘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고, 업무는 학교가 돌아갈 정도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모든 문제는 내가 아닌 동료 교사와 학생, 더 나아가서는 관리자와 학교에 있다고 여겼다.
- 이은자, 「내가 걸어온 혁신학교」 중에서
교직 경력 20여 년 동안 주입식, 강의식 수업을 해왔던 나는 혁신학교의 'ㅎ'자만 들어도 지레 손사래를 치곤 했다. 왜 고생을 사서 하겠는가?
- 김대경, 「소통과 공감이 가능하다면, 그곳이 혁신학교」 중에서
나는혁신학교 교장에 맞는 사람이 아닙니다. 더욱이 혁신학교가 뭔지 아직 잘 모릅니다. 입시 성적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수학교사로 지냈고, 그러다 보니 교감을 거쳐 교장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이제까지 나는 아이들을 위해 참된 교육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 이은자, 「내가 걸어온 혁신학교」 중에서
'새내기 교사'부터 '늙은 교사'까지
책은 초등학교 편, 중학교 편, 고등학교 편의 3편으로 나눠져있다.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한성여자중학교에서 20년 가까이 학생들을 가르쳤던 나로서는 중학교 편과 고등학교 편에 손이 먼져 갔다. 그러다보니 책을 읽는 순서도 역순이 되어버렸다. 교직 31년차 베테랑 신도고등학교 김추령 선생님의 글 「행복했던 실패와 머위에 대한 늙은 교사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 책 읽기는 중학교 편을 지나 어느새 초등학교 편에 이르렀다. 맨 마지막에 읽은 맨 처음 이야기, 서울강명초등학교 권유리 선생님의 「파랑새를 찾는 여정」을 읽으면서는 나도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보니 이미 깊은 밤이 되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어서 도란도란 교육희망을 일궈가는 사람들을 알리고 싶었다. 그들의 혁신학교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었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했다. 여기 나오는 교사들 대부분이 나이와 상관없이 - 새내기 교사부터 교직 31년차 교사에 이르기까지 - 처음에는 혁신학교를 알지 못했던, 그래서 거부하거나 반신반의했던 교사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혁신교육 2세대들이다. 혁신학교를 처음 만든, 그래서 그 누구보다 자부심이 강했던 이들이 아니라 옆에서 혁신학교를 은밀히 동경하고 있거나 반대로 혁신학교에 대한 흉흉한(?) 소식에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던 이들이었던 거다. 즉 이미 만들어진 혁신학교에서 의구심과 방황의 시간을 보내고 서서히 젖어들면서 그들 만의 새로운 무늬를 만들고 있는 교사들인 것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그들은 성공담이 아닌 실패담, 아니 실패를 통한 성장과 성숙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이 실패지 그 이야기는 너무나 진솔하고 구체적이어서 - 요즘말로 팩폭이어서 - 글을 읽으면서 함께 가슴이 내려앉고 함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들은 혁신학교가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수업을 본다는 것은 수업을 하는 교사의 모든 것을 보는 것이며 수업은 교사의 정체성이 담겨있는 것이기에 모둠수업만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 도달한 교사(강호정, 「수업 모임 성찰기」)가 있는가 하면, 혁신학교가 지속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도록 머리를 맞대고 바꿔나가는 것이 우선이라는 교사(권진희, 「스스로 더불어 한 걸음씩」)도 있다. 혁신학교를 넘어 일반 학교를 혁신학교처럼 만드는 힘에 대해서 인식한 교사(강경은, 「어디에서나 실천할 수 있는 혁신 교육」)도 있다. 그가 볼 때 일반 학교를 혁신학교처럼 만들었던 힘은 네 가지다.
① 튼튼한 수업 공개 시스템과 문화
② 자발적 교원 학습 공동체
③ 신규 교사의 역량을 이끌어내는 선배 교사
④ 동료 교사와 함께 만드는 수업
혁신 교육? ㄱㅂㅈㄱ
질문이 있는 교실, 우정이 있는 학교, 삶을 가꾸는 교육. 서울시교육청의 교육지표다. 그러고보니 혁신학교는 서울혁신미래교육의 지표종이 아니었나 싶다. 서울교육이 도달해야 할 세 가지 차원인 '질문', '우정', '삶'에 대하여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해온 학교가 바로 혁신학교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혁신학교의 성과는 점차 퍼져 나가겠지만 그에 반비례하여 혁신학교의 색깔은 점점 옅어질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죽음 뒤에는 또 다른 삶이 있을까?"
"철이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도덕이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자유란 무엇일까? 또 자유의 범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진리라는 것은 무엇인가? 진리는 존재하는가?"
"답이 있는 질문과 없는 질문, 무엇이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가?"
"노력이 재능을 넘을 수 있을까?"
"고난과 역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성장을 이끌어 낼 수 있는가?"
프랑스 논술형 대입 자격시험 <바칼로레아>가 아니다. 열일곱 살 오디세이학교 민들레 캠퍼스의 학생들이 학교 교육과정 중 하나인 '질문을 갖고 떠나는 여행'을 준비하면서 던질 질문들이다. 오디세이 학교는 혁신학교는 아니지만 배움의 주체로서의 학생, 함께 성장하는 교사, 함께 만들어가는 민주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혁신학교의 정신이 또 다른 형태로 실현되는 학교이다.
이처럼 혁신학교의 일반화는 다양한 경로로 진행되고 있다. 단순히 혁신학교의 수를 늘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혁신학교가 지향하는 가치와 철학, 민주적인 학교문화와 배움 중심의 시스템을 어떻게 확산시킬 것인가가 핵심이다. 누구는 벌써 혁신학교 10년이냐고 놀라겠지만 또 다른 누구는 아직 10년 밖에 안되었냐고 물을 것이다. 글쎄.. '벌써'가 맞는지 '아직'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벌써'라는 말 속에서 혁신학교의 기대 이상의 선전에 대한 감탄의 마음을 발견한다. '아직'이라는 말 속에서 조바심내지 않고 혁신학교의 변화와 혁신학교로 인한 우리 교육의 변화를 기다리는 인내의 마음을 발견한다. 벌써와 아직. 당신은 혁신학교에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적어도 '도란도란 교육희망을 일구가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혁신 교육? 그까짓 거, ㄱㅂㅈㄱ(가보자고).
건투를 빈다.
나에게 당신에게 그리고 우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