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십구년을 결정한 동년배의 스승들을 향한 소박한 오마주
다른 교육을 상상하다 No. 18 교사 비평
허수욱, 최은서, 전수진(2013).
이 글은 나의 교직관에 영향을 끼친 네 분의 선생님에 관한 글입니다. 한 분은 글의 관점을 제공해주셨고 세 분은 글의 등장인물이 되어주셨습니다. 글의 관점을 제공해주신 분은 함영기 선생님으로 지금은 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연수원에서 중등교원연수를 관장하고 계십니다. 글의 주인공이 되어주신 분은 허수욱 선생님, 최은서 선생님, 전수진 선생님으로 - 1999년 스물 일곱의 나이로 교직에 발을 딛은 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 교사의 삶과 좋은 교사의 조건에 대하여 저에게 영감을 준 동년배의 스승들입니다.
이 글을 쓰고 나서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서로를 '헝그리 4'로 부르며 평생을 함께할 줄 알았는데 이제는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교사였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서는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일꾼이었던 한 분의 선생님은 강원도에 살고 있는 가족들에 대한 오랜 부채의식에 이른 나이에도 불구하고 명예퇴직을 선택했습니다. 학교에 배움의 공동체 연구회를 처음으로 제안하고 좋은 수업을 배우기 위해 지역을 가리지 않고 '수업의 명인'을 찾아 나서던, 또 학교를 혁신학교로 만들고자 동분서주 했지만 두 차례의 좌절 이후 혁신교육지구를 위해 헌신했던 다른 한 분의 선생님은 굽힐 줄 모르는 올곧은 성격에 내상을 입고 지금은 잠시 학교에서 떠나 '연구'와 '소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들뜸이나 과장도 없이 어떻게 보면 냉소적이라 보일 정도로 거대담론을 경계하던, 그러나 자신의 수업만큼은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치열하게 준비하던 또 다른 한 분의 교사는 동료들이 떠난 자리에 여전히 남아 교무부장으로, 생활안전부장으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에 대해서 말하자면... 저도 작년 2월, 20년 동안 몸담았던 직장을 떠났습니다. 그동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집도 장만했습니다. 부모님도 하늘나라로 보내드렸습니다. 좋은 일, 궂은 일이 있을 때마다 함께 기뻐해주고 슬퍼해준 선배들이 있던 곳. 저를 너무 잘 알아 단점은 무시하고(사실 포기하고) 장점만 인정해주던 동료들이 있던 곳. 받기만 하고 준 것은 없어 미안하기만 한 '몇 안 되는' 후배들이 있던 곳. 소중한 직장이자 참된 배움터였던 그곳을 떠나 작년 3월부터 서울시교육청으로, 그리고 지금은 국가교육회의에 와 있습니다.
'교사'는 저의 영원한 화두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운 이 글을 다시 들춰내는 이유는 교육자치/분권시대를 맞이하여 교사학습공동체를 바탕으로 한 대안적인 교사전문성의 탐색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사의 소명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고 신발 끈을 묶기 위함입니다.
교사는 전문가인가? 전문직으로 인정받는 의사나 판사의 경우, 나이가 들어갈수록, 즉 그들이 작성한 진료기록과 판결기록이 쌓여갈수록 그들의 경력은 전문성으로 인정을 받는다. 반면 교사는 어떠한가? 우리 사회는 - 교육행정을 선택하지 않고 - 교실에서 정년을 맞이하는 '평'교사의 경험과 지혜에 권위를 부여하는가? 우리 사회에서 교사의 경력은 어떻게 인식되는가? 교사의 전문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는' 전문가라면, 그 전문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중학교에서 교사의 역할은 다양하다. 교사는 수업을 하고, 학급을 운영하며, 아이들과 상담을 하고, 다양한 창의적 체험활동을 지도한다. 또한 동료교사들과 수업과 아이들에 대하여 토론하고, 학교행사를 기획 혹은 평가하기 위해 공문을 작성한다. 이 모든 일들이 교사의 전문성과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수업’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수업이란 무엇인가? Wolfgang Sünkel에 따르면 수업은 역사적 현상이지 인간학적 현상이 아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노동과 교육은 늘 있어 왔지만 수업은 그렇지 않다. 수업은 역사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2005: 47) 그렇기 때문에 좋은 수업의 기준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Hilbert Meyer는 ‘좋은 수업’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범주화하고 있다: (1) 민주적인 수업 문화의 틀 아래서 (2) 교육 본연의 과제에 기초하여 (3) 그리고 성공적인 학습 동맹(Arbeitsbündnis)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4) 의미의 생성을 지향하면서 (5) 모든 학생의 능력의 계속적인 발전에 기여하는 수업이다. (2011: 30)
그렇다면 좋은 수업은 어떻게 가능한가? 손승남은 교사의 수업 전문성이 좋은 수업을 위한 제일의 전제조건이라고 말한다. (2007: 120)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업은 역사적 현상이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좋은 수업의 기준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가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좋은 수업의 조건과 수업 전문성의 변화에 대하여 탐색해볼 필요가 있다.
진영은과 함영기는 수업 전문성의 개념을 기술적 합리성에 기초하여 교과지식 및 수업기술의 연마를 핵심으로 하는 ‘전통적 관점’과 수업의 복잡성, 역동성, 학습자와의 상호작용 등의 개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안적 관점’으로 나누고 이를 표 1과 같이 유형별로 범주화하여 수업 전문성에 대한 통합적 이해의 바탕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2009: 56-63)
이와 같이 수업 전문성에 대한 대안적 입장에 선 연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적 합리성’을 기초로 하는 전통적 관점의 수업 전문성 논의가 여전히 견고하게 현장을 지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진영은과 함영기는 “대안적 관점의 수업 전문성 개념이 실천적으로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우선 현행 학교 및 교실의 구조, 입시위주의 교육, 교사들의 인식, 엄격한 교과구획 등 장애 요소를 극복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하면서 세 가지의 향후과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 첫 번째 과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현재 이론적, 선언적 수준에 머물고 있는 수업 전문성의 대안적 관점을 정착시키기 위한 ‘실천적 재개념화 연구’가 시급하게 요청된다는 것이다. 이는 기능적 실천에 머무르고 있는 현행 수업 전문성 신장 방식을 극복하기 위하여 대안적 관점에서의 풍부한 실천 사례를 발굴하고 이를 통한 이론과의 유기적 통합을 이뤄내야 함을 의미한다. (2009: 65)
수업 전문성에 대한 대안적 관점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학교 현장에 전해지지 못하는 까닭은 이를 현장에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이론(대안적 관점의 중요성 강조)과 현실(전통적 관점의 중요성 강조)의 괴리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학생들에게 필요한 수업이 제공되지 못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즉, 학생이 생각하는 ‘좋은 수업’과 교사가 생각하는 ‘좋은 수업’의 괴리가 발생하게 되고 이는 결과적으로 교사에 대한 불신, 더 나아가서는 공교육에 대한 불신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학교 현장에서 실제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세 명의 교사들의 ‘수업’을 관찰해보고, 그들이 생각하는 좋은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봄으로써 대안적 관점에서의 실천 사례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대안적 관점에서 바라본 ‘좋은 교사’란 무엇인가?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 먼저 전통적 관점에서 바라본 ‘좋은 교사’의 조건을 생각해보자. 전통적 관점에서는 학생들을 잘 관리하고, 교과지식을 잘 전달하며, 행정업무를 깔끔하게 하는 교사가 좋은 교사이다. 전통적 관점에서 볼 때, 학생은 수동적인 존재이고, 교과지식은 절대불변의 진리이며, 행정업무는 학급운영에 앞서는 것이다(교장-교감-행정부장-평교사로 이어지는 학교의 위계구조를 생각해보라). 이에 반해 대안적 관점에서 볼 때, 학생은 능동적인 존재이고, 교과지식은 상대적인 진리일 뿐이며, 행정업무는 학급운영에 비해 부수적인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이 반영된 것이 ‘반성적 실천가’, ‘교육과정의 재구성자’, ‘내러티브적 탐구의 주체’ 또는 ‘연계적 전문가’이고 대안적 입장에서 바라본 좋은 교사란 바로 이런 역할을 실천하는 교사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서울의 한 사립여자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대안적 관점에서 바라본 ‘좋은 교사’의 가정에 동의한다고 판단되는 세 명의 동료교사에게 있어서 ‘좋은 수업’이란 무엇인지 ‘들어보고’ 그들의 지식관과 수업관이 실제 수업에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관찰하고자’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째, ‘전달 vs 생성’, ‘교과지식 vs 통합지식’으로 대별되는 수업에서 다루어지는 지식을 둘러싼 논의와 ‘기술 vs 이해’, ‘과학 vs 예술’로 대별되는 교사의 수업관을 둘러싼 논의가 실제 교육현장에서는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이를 통하여 수업 전문성의 실체가 무엇인지 기술해보려고 한다.
박순경에 따르면 “연구자들은 교사들의 생각과 주장을 교사 입장에서 들으려고 하지 않으며, 교사들의 생각과 주장을 간주관적(intersubjective) 과정의 결과물로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교사들의 이야기가 형성되는 맥락, 즉 ‘공동체로서의 우리’라는 개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 (중략) … 이것은 실천의 세계와 이론의 세계가 서로 다른 공간이며, 그것이 갖는 품격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교사 전문성에 관한 지배적인 논조는 이론을 따라가기 위해 실천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점철되어 있다.” (2003: 78)
그러나 순수학문과 달리 교육이론은, 특히 교사의 전문성과 관련된 논의에서는 실천이 이론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론가들의 ‘관점’이나 ‘입장’이라는 것도 결국은 학교현장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교육활동 속에서 어떤 패턴을 발견하고 그것을 일반화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주정흔에 따르면 실천가로서의 교사의 수업행위는 이론적 지식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 그리고 그동안의 현장 경험 속에서 형성된 지식을 기초로 상황에 따라 구성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교사의 수업행위는 적확한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수많은 판단과, 규칙과 절차로 나타낼 수 없는 기술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직관적이고, 은유적이고 또한 개인적이다. 검증된 이론과 기술을 의식적으로 사용할 때조차도 암묵적인 판단과 능숙한 수행 경험이 작용한다. 교사가 형성하고 있는 실천적 지식은 행위 속에 있으며, 실천적 지식의 대부분은 암묵적이다. (2006: 30)
따라서 연구자들은 그들의 ‘이론’이 현장에서 실천될 때, 교사들에 의해 어떻게 ‘재구성’되는지를 알아야한다. 동일한 교육과정이라 할지라도 교사는 교실의 맥락을 파악하고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여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교육적 실천을 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박순경은 교사 전문성 논의에 관한 대안적 입장으로서의 ‘자서전적 접근’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들은 자서전적 접근이 처방이나 설명보다는 이해나 표현의 관점에서 교사 전문성을 논하는 입장이며, 이것이 교육과정, 교수 활동, 교육 목표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며, 교육의 과정에서 이와 같은 공적 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 잠시 그것들로부터 시선을 옮겨 교사의 개인적이고도 실천적인 경험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히고 있다. (2003: 85)
자서전적 방법은 Pinar & Grumet(1976)에 의해 소개되었는데, 이들은 ‘쿠레레(currere)’를 경로를 달리는 과정에서의 경험으로 재해석하였고 이를 ‘자서전적 방법’으로 지칭하였다. 이는 개인의 경험에 대한 시간적이고 반성적인 움직임을 묘사하는 방법으로서 과거를 회상하는 후향(regressive), 미래를 상상하는 전향(progressive), 과거와 미래와 현재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분석(analytical), 앞선 경험을 토대로 현재를 재구성하게 되는 종합(synthetical)의 과정으로 구성된다.
나는 교사의 수업 전문성에 대한 실천적 탐색의 방법론으로서 ‘자선전적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세 명의 교사들과 2회의 ‘심층면담’ 및 교사별로 1회씩 총 3회의 ‘수업관찰’을 실시하였다.
파울로 프레이리는 교사의 일상이 교육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으나 사실 가르침의 실천을 평가할 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교사와 학생 모두의 일상생활 속에 나타나는 자질구레한 것들이다.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저런 몸짓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일이 아니라, 정서, 감정, 욕구의 가치를 이해하는 일이다. 자신감을 불어넣기만 해도 극복될 수 있는 불안감을 이해하는 일이다. 용기가 마음속에 자리 잡음과 동시에 줄어드는 두려움을 이해하는 일이다.” (2007: 51~52)
학교는 일상적인 공간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8시 30분부터 3시 10분(7교시가 있는 날은 4시 5분)까지 똑같은 학생과 똑같은 교사가 똑같은 과목으로 만난다. 조회를 하며, 수업을 하고 점심을 먹는다. 또 수업을 하고 종례를 하고 청소를 한다. 이와 같은 일들이 일 년 내내 반복된다. 그러나 학교는 특별한 공간이기도 하다. 하나의 교실에 약 서른 명의 학생들이 모여 하루의 3분의 1 이상의 시간을 함께 보낸다. 학생들은 수업도 듣지만 친구들도 만난다. 우정이 싹트기도 하지만 뒷담화와 따돌림이 일어나기도 한다. 학급회장을 선출하기 위해 투표를 하고, 용의복장지도 기준을 개선하기 위해 대의원회의가 열리기도 한다.
교사의 일상 역시 평범하다. 그러나 그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숨겨져 있다. 세 교사의 일상을 잠시 살펴보자.
“오늘 학생들에게 전달해야 하거나 공유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조회 때 뭘 전달할지 생각해봐요. 조회 들어가서 아이들과 눈을 맞추면서 대화하구요. 평균적으로 4시간 정도 수업을 하고 공강시간에는 개인적인 생활들도 하고, 종례 때 주로 아이들과 청소를 하면서 대화를 많이 하면서 아이들 고민이나 그런 것들을 상담하면서 내가 몰랐던 부분들, 내가 알아야 할 부분들을 점검하는 시간들을 가졌었죠. 한 두 학생이라도 우연을 가장해서라도 상담하려고 노력했어요. 선생님들과 담소도 나누면서 하루 일과를 끝내는 것 같네요. 수업과 관련해서는 수업은 대동소이하게 진행이 되기 때문에 체육의 특성상 도입부터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이 뭔가 새로운 걸 새 학기에 추구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중간 중간에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려고 고민은 하지만 크게 수업을 구조화시키는 데 있어서 고민을 하는 편은 아니에요.”
체육을 가르치는 허교사는 학생들과 동료교사가 모두 인정하는 한성여중 최고 인기교사이다. 그의 인기는 아이들과의 소통에서 나온다. 아이들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열린 자세는 교사의 권위보다는 아이들의 권리를 먼저 생각하는 민주적인 사고방식과 연결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서 수업은 하나의 과정이다. 그는 한 학기 동안 진행할 수업의 스토리를 구상한다. 하나의 수업은 실로 꿴 구슬 중의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그의 수업을 관찰해보면 그가 그 하나의 수업에도 얼마나 열정적으로 임하는지 느낄 수 있다.
“올해는 아주 편하게 생활을 하고 있어요. 지난 2년 동안 담임을 하면서 너무 힘들었어요. 조회 프로그램 하던 것 다 내려놓고 학교 카페와 학급신문을 운영하는 것만 하고 있는데 확실히 편하고 아이들도 편해하는 것 같아요. 아침 조회 들어가고, 1교시 수업 준비 바쁘게 해서 들어가고, 공강 시간에 신문도 보고 수행평가 정리도 하고 종례하지요.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학급신문 내고 수요일마다 방과 후에 풍물반 애들 하는 거 잠깐 들렸다가고요.”
과학을 가르치는 최교사는 오랫동안 풍물동아리 ‘덩더쿵’을 지도해왔다. 풍물동아리에 대한 그의 뜨거운 열정은 오랜 기간 동안의 풍물연수, 전통음악에 대한 관심과 공부, 교사풍물동아리 조직 등으로 이어졌다. 풍물동아리에서 활동한 상당수의 학생들이 관련계통의 학교로 진학하였으며, 지금도 덩더쿵은 가장 인기 있는 학생동아리 중 하나이다. 학급운영에도 관심이 많아 지난 2년 동안 학급의 일상을 기록한 학급신문을 매일같이 발행했을 뿐만 아니라 1인 1기여를 통한 민주적 학급운영, 공감적 대화법을 활용한 상담 등 다양한 학급운영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아침에 출근하면 조회준비를 먼저 하죠. 저는 조회 쪽지를 내보냈었기 때문에 쪽지에 전달할 사항을 워드로 쳐요, 워드로 쳐서 출력해서 오려놓고 조회시간에 들어가서 나눠주고 일과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리고 특별 조회 프로그램을 했을 때에는 그것을 준비해서 하기도 했었는데, 뭐 음악을 듣거나 뭐 영상을 보거나, 근데 잘 됐던 해도 있고 잘 되지 않았던 해도 있고, 그담에 보통 수업을 하죠. 4시간 정도? 공강 시간은 하루 2시간 나오는데, 공강 시간에 뭘 할 것인지, 1순위는 밀린 일 처리. 업무처리가 일 순위 이고 두 번째는 그다음에 내 시간을 갖는 거죠. 쉬거나, 책을 읽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그리고 방과 후에 수업이 있으면 방과 후 수업을 하고 하루나 이틀정도? 그리고 회의가 있으면 회의를 가고. 그니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내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생각하는 것은 학교에서 불가능 한 것 같아요. 이미 내 시간이 어디어디에 뺐기고 있게 되어있고, 거기에 맞춰서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되게 벅찬… 그래서 칼퇴근을 하고 싶으면 상당히 바쁘게 움직여야 되고, 쪼끔 뭐 오늘은 한 시간 정도 더 있다가 가야겠다 싶으면 좀 하루가 여유롭고 그런 것 같아요.”
국어를 가르치는 전교사는 한동안 교사 노래패 ‘해웃음’의 보컬로 활동하였으며, 오랫동안 문학동아리 ‘빠따(빠져읽기 따져읽기)’를 지도해왔다. 허교사나 최교사에 비해 학생들을 엄격하게 ‘지도’하는 스타일이지만, 학기가 시작되기 전 한 학기 분량의 수업준비를 해놓는다거나 절대로 뒤로 미루지 않는 업무스타일을 보면 그가 학생들이나 동료교사들에게 요구하는 기대치 이상의 것을 스스로에게 책임지우는 유형의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
교사도 하나의 직업이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할 때, 자기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교사로서의 소명이기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교사의 소명, 혹은 교사로서의 자질이라는 것이 갖고 있는 특징 때문이다. 그것은 교사라는 직업이 학생들을 만나는 직업이고, 학생들과의 만남을 통해 학생이 교사에게 배우는 것 이상으로 교사도 학생에게 배우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부터 였구요. 아무래도 그 중학교 때 영향을 주셨던, ‘아 저런 분과 같은 선생님이 되면 참 좋겠다’라는 어떤… 담임선생님이셨는데, 그런 계시를 받았다고나 할까요. 더군다나 공교롭게 또 그분이 체육선생님이셨어요. 고등학교 때는 사범대를 갈 준비를 했었고, 교사가 되고 싶어서 준비를 했었으나 체육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구요. 우연한 기회에 체육선생님의 상이 이제 예전의 중학교 때 선생님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나도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다. 아이들과 같이 호흡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나마 몸이 그때 당시에는 움직여줄 수 있어서 체육교사가 됐고, 네, 뭐 그렇게 해서 체육선생님이 되었습니다.”
허교사의 말처럼 학생 시절 만난 교사와의 인연 혹은 교사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교사의 길을 선택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교사와 학생의 만남도 결국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므로 단순히 지식의 전달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교사의 인간적인 풍모, 학생에 대한 열정 등이 학생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 기꺼이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도 한다.
“교생실습 가서 아이들에게 반했어요. 교생실습 가기 전에는 가능성의 하나였는데, 가서 아이들이 너무 좋았고 아이들이 너무 좋았고, 관심 받는 게 너무 좋았고, 행복했고, 그래서 하게 되었어요.”
최교사처럼 대학교 4학년 때 단 한 달 간 경험하는 교육실습에서 교직의 매력을 발견하기도 한다. 어쩌면 최교사에게 교육이란 바로 그 시절의 행복했던 감정, 교생과 학생 사이에 형성되었던 유대감을 일상적인 교실에서도 만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도 나도 중학교 때? 한 중2 중3정도였던 것 같아요. 되게 재수 없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공부를 되게 내가 잘한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다들 뭐 내가 법대를 가니 뭐니 하고 있다가 현실적으로 내 성적이 그게 안 된다는 걸 알고 그러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과정에서 교사라는 직업을 생각하게 됐어요. 가깝게 외가 쪽 식구들 중에 교사, 선생님 하는 분이 몇 분 계셨고, 어렸을 때부터 그분들이 이렇게 뭐 방학도 있고, 그분들이 학교에서 출근하는 거를, 제가 또 학교로 놀러 가봤기 때문에 그런 게 괜찮아 보였고, 그리고 두 번째는 제가 그 무렵부터 누군가에게 내가 알고 있는 무언가를 설명하는 것을 되게 좋아했어요. 내 머릿속에 있는 걸 누군가에게 되게 설명해주고 안내해 주는 것을 좋아했고, 잘한다고 생각했고, 그러면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고, 과목에 대한 선택은 나중에 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가서... 국어를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은 나중에 했었고, 교사라는 직업은 중3무렵부터? 뭐 거창한 교사가 되겠다는 그런 건 없이 되게 현실적인 거에서부터 출발한... 예. 여기까지요.”
전교사는 자신에게서 교사의 자질 - 가르치는 일 - 을 발견했고, 그것이 결국 그의 소명이 되었다. 그는 결코 학생들에게나 스스로에게나 감상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그의 이상은 현실에서 출발한다. 그는 자기 스스로에게 엄격한 만큼만 학생에게 엄격하다.
“꼭 교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동물은 어차피 성장이라는 과정이 당연히 있다고 보고요. 육체적인 성장이 아닌 정신적인 성장은 상호간의 공감 속에, 상호과정 속에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그래서 15년간의 교사생활은 당연히 성장의 과정이라고 판단하구요. 일단 처음에 교사가 됐을 때 제가 이 질문에 대해서 답을 어떻게 할까 고민해 봤더니, 생각을 했던 건 처음에는 학생을 가르치고 도와주고 인도해야할 대상으로만 제가 판단했다면 지금 제가 보는 학생들의 상은 서로 학생과 내가 협력하고 일반적인 그 시혜의 어떤 대상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고 나누고 공감해야하는 동반자라는 느낌. 이런 느낌으로 지금 교사생활을 하고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교사는 학생과 함께 성장한다. 허교사에게 학생은 “서로 협력하고 나누고 공감해야 하는 동반자”이다. 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내가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체득한건 내가 배워야 할 대상은 일정하게 정해져있지 않다. 학생이라도 배워야 할 것이 많고 내가 배움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10년도 넘은 일이네요. 한 학생, 그러니까 제가 여기 한성여중에 있기 전에요. 그 학생이 1000시간이 넘는 봉사활동을 해요.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시간이 나면 무조건 봉사활동을 합니다. 그게 봉사활동을 형식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서 가는 그런 모습을 제가 봤고, 그 학생은 항상 주위에 무엇이 부족해 보이는 것이 있는지 찾아다니면서 어려움이 있으면 도와주고 부족한 게 있으면 채우고 이런 과정의 학생을 보면서 ‘참 존경스럽다.’ 이런 생각을 가졌었구요. 한성여중에 와서도 비슷한 사례가 한 명 더 있어요. 그래서 제가 지금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도 항상 내가 존경하고 존중하는 학생 두 명이 있다. 그렇게 얘기를 이렇게 사례로 얘기하기도 하는데요. 제가 보기에 학생과 저와의 관계는 어쨌든 처음에 얘기했던 배움이 서로 이루어지는 관계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누가 누구를 존경하는 거 보단 서로가 존중된 관계 그래야지만 요즘에 흔히 말하는 학교폭력 포함한 이런 어떤 갈등 이런 부분들도 해결되지 않을까. 서로 존중해주는 마음이 없으니까 이런 문제들이 나타나잖아요? 그래서 존경을 강요하거나 요청할 것이 아니라 서로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상대하고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다 보니까 인격적인 성장. 내가 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끼는 것 같아요. 그리고 아이들을 대하는 관점도 처음에는 예전에는 학생은 피학습자라는 입장이 되게 컸던 것 같은데, 지금은 수평적인 관계? 눈높이 맞추기? 이런 쪽에 더 많이 이런 쪽에 시선이 가있는 것 같아요.”
최교사 역시 허교사와 비슷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학생이라는 존재는 처음에는 수동적인 존재였으나, 이제는 교사와 동등한,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수업이라는 국면에서 인제 모든 아이들이 내 수업을 다 잘 듣는 건 아니니까, 잘 듣지 않게 되면 거기에서 과거에는 이제 정의적인 입장에서 이 수업은 정해진 수업이고 너희들은 따라와야 될 의무가 있고 나는 가르쳐줘야 할 의무가 있어. 너희들이 나의 수업을 잘 들을 수 있게 준비했으니까 잘 들어. 근데 넌 왜 안 들어. 네가 안 들었으니까 넌 잘못됐어. 그러니까 벌 받아. 내가 벌을 주는 것은 네가 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훈계해 주는 거야. 정신 차려서 잘 들으면 너한테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뭐 이런 입장이었지요. 내가 맞고 내가 준비해온 걸 너희가 들어야 되는 게 맞는 거야. 내가 정해 놓은 틀거리에서 벗어난 아이들에 대해서 바라보는 입장이 나는 그 아이들을 위한다고 얘기를 했지만 내 입장에서 그 아이들을 정의한 거에요. 그런데 지금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라는 거죠. 그 아이가 그렇게 했을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이 국면 내에서 있을 수도 있고 밖에서 있을 수도 있고, 또 그 원인이 교사인 나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환경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전처럼 넌 나가 서있어 라고 해서 그걸로 끝내버리는 것을 시도하는 것을 바꿨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담임반 아이들을 수업할 적에는 좀 편해요. 근데 그렇지 않은 반 아이들은 좀 불편하거든요? 담임반 아이들이 수업이 편한 이유는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아이가 내 수업에서 내가 정해놓은 규칙에서 벗어나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허용할 수 있는 여유가 더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그렇지 않은 반의 경우에는 이름도 잘 모르고 그렇게 어떤 고민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사실 관심 가질 여력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냥 이 한 시간 내에 내가 계획된 거 해결하고 나면 끝인 게 전부였던 것 같은데,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적에, 아이들 대하는 게 왜 그랬는지 뒤에 가서라도 그런 이유가 있었는지. 특별히 네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지, 꼭 묻게 되는 게 좀 달라진 것 같아요. 관계를 풀고 다음 수업에 참여시키려고 하는 그런 지점이 좀 달라진 것 같아요, 구체적인 상황으로 보면.”
“교과적인 측면에서 제일 큰 성장은 참고서의 도움을 받지 않는 수업을 이제 한다. 초반 1~2년 까지는 참고서가 없으면 수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되게 부끄러운데, 첫 해는 막 자습서를 복사해서 갖고 들어가서 수업도 하고 그러다가 이제 교과적인 전문성이 쌓이면서 이제 그런 자습서의 도움 없이 수업할 수 있는 부분이 교과적인 성장인 것 같고 그러면서 전체 그 이제 제가 가르치는 중학교 수준에서 교육과정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눈에 보이니까 아 지금 이 아이의 시점에서는 이런 자료들을 이런 방법으로 수업이 진행되고 얘가 이때쯤 되면 이런 것들이 제시되어서 여기까지 알게 해야 되겠구나라는 게, 3년 치가 눈에 보인다고 할까요? 그런 측면에서는 성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고 아이들을 대하는 시각에 있어서는 저는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처음에 대할 때에 그냥 아이들의 모습이나, 지금 뭐, 내가 예전에는 아이들을 되게 이렇게 대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르게 대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그 모습이 뭔지는 좀 설명하기 어렵지만, 예.”
전교사에게 있어서 교사의 성장은 허교사나 최교사와는 조금 다르다. 그 역시 교사의 성장과 학생의 성장은 함께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지만 시작점은 교사라는 점에서 다르다. 교사의 성장이 있어야만 학생의 성장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교사의 책임을 강조한 표현일 수도 있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교사와 학생은 어떤 관계라고 생각하는가. 한자성어를 쓴다면, 교학상장. 그러니까 서로 가르치고 함께 성장하는. 줄탁동시. 알을 깨기 위해서는 어미닭과 안에 있는 병아리가 서로 껍질을 깨쳐야지 어느 순간 터진다는. 그런데 저는 약간 다른 부분은 뭐, 앞으로 변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까지는 주도권은 여전히 교사에게 있다는 거죠. 아이들의 지적인 활동이든, 아니면 다른 신체적인 활동이든, 아이들의 인간관계 활동이든, 이 활동을 활발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거나 이끌어 가는 측면의 주도권은 그래도 교사가 계속 지니고, 뭔가 샘플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측면이 이제 여전히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측면에선. 그래서 교사와 학생은 서로 가르쳐주고 배우고 또 배우고 같이 가르쳐주는 관계이지만 이것을 그냥 그때그때 그니까 어떤 방향으로 어느 정도의 강도로 끌고 나갈 것인가는 적어도 교사가 장단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갔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래서 아... 선생님에게서 학생은 어떤 존재입니까? 저보다 더 잘난 학생이 나오길 늘 원해요. 제 휴대폰에 애들 주소록만 따로 모아놓는 그룹명이 있는데 그룹명이 청출어람이에요, 그니까 쪽빛에서 나왔지만 청색보다 더 푸른 것처럼 내가 제시한 것을 받아 안아서 더 큰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 수 있는 아이들을 만드는 게 제 교사생활의 궁극적인 꿈이에요. 그래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어떤 존재이기를 희망합니까... 저는 이렇게 이미지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어디 뭘 하다가 책을 읽었을 때 밑줄 그은 부분 같은 거에요. 우리가 책을 한 권 다 읽고 나면 그 책의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죠. 사실 지나고 나면 나중에 이 책의 내용이 뭐였지? 보고 싶으면 중간 중간에 밑줄 그은 부분만 봐도 전체 내용이 떠오르는 것처럼, 내가 만나는 수 백명 혹은 뭐 수많은 아이들이 아, 저 선생님이 어떤 수업을 했고 어떻게 우리에게 대해줬지 되게 세세하고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아 선생님은 어떠어떠했던 분이라고 잔상이 남아있으면, 가끔씩 책을 펼쳐서 밑줄 그은 부분만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그런 존재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삶의 큰 영향을 끼치고 이런 교사 말고, 그냥 밑줄 그은 부분처럼 나중에 잠깐 훑어 볼 수 있는 그런 교사.”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제임스 배너 주니어와 해럴드 캐넌에 따르면 가르침의 요소는 태어나면서부터 우리에게 내재된 자질로, 쉽게 학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인간성을 이루는 요소이기에 그 자체에 내용과 체계를 담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자질을 내면에서 끌어내고, 확인하고, 계발하여 적용해야 한다. 학생을 가르치려면 교육학과 교수법에 관련된 전문 지식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창조적 행위이다. 교육과 경험으로 단련된 마음과 정신을 바탕으로 자발적인 노력을 통해 기존 지식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틀에 박힌 교수법과는 달리, 가르침은 순간 순간 무한한 놀라움과 무한한 기쁨을 만들어 낸다. 교수법이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는 이미 알고 있거나 모르면 배울 수도 있지만, 내면에서 우러나는 자질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상상을 해야 하며, 그런 다음 이를 훈련해야 한다. (2003: 14~15)
이제 우리는 세 교사의 수업을 들여다 볼 것이다. 허교사의 체육수업에서는 ‘사격’이 다른 체육 종목과 어떻게 다른지 배우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사격이라는 종목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체육을 잘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허교사의 체육수업은 체육이라는 과목이 추구하는 교육목표가 어디에 있는지 되묻게 한다. 최교사의 과학수업은 수업의 방식을 통해 ‘협동’이라는 그의 교육철학이 구현된다. 학급운영에서의 ‘1인 1기여’와 교과수업에서의 ‘협동학습’은 개인의 책임과 공동체의 협력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의 구성 원리와 닮아있다. 전교사의 국어수업은 허교사의 수업이나 최교사의 수업에 비해 형식적으로는 전통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강남 스타일’과 ‘젠틀맨’이라는 수업 소재를 통하여 그가 도달하려는 수업목표는 ‘일상생활에 말 걸기’임이 드러난다. 세 교사의 수업은 교과의 차이만큼이나 다르지만 이들에 의해 교육과정은 재구성되고 학생들의 몸짓과 음성은 생명력을 얻는다.
Schön(1983, 1987)은 교사를 ‘반성적 실천가(reflective practitioner)’로 명명하면서 전문가가 표준화된 지식만으로 실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끊임없이 다양한 문제 상황에 부딪히면서 모종의 해결책을 찾는 것처럼 교사 역시 전문가로서 상황과 행위 사이의 불일치를 직관적으로 물어나가야 하고(reflection in action), 상황이 지나간 후 수행한 문제해결 방법을 의식적으로 반성(reflection on action)하는 반성적 실천가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함영기는 노명완의 논의를 빌어 수업에서 ‘반성’은 교사가 자신의 수업을 되돌아보고 필요한 수정을 취하는 태도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반성적 수업을 하는 교사는 항상 그리고 주의 깊게 자신의 매일의 수업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믿음과 관습적 행동에도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서는 언제나 스스로의 판단으로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 (2008: 18)
그러나 수업을 통해 반성적 실천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Schön의 표현대로 상황과 행위 사이의 불일치를 직관적으로 물어나가고(reflection in action), 상황이 지나간 후 수행한 문제해결 방법을 의식적으로 반성(reflection on action)하겠지만, 그것은 엄연히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통해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따름이다.
“이 수업은 정해진 수업이고 너희들은 따라와야 될 의무가 있고 나는 가르쳐줘야 할 의무가 있어. 너희들이 나의 수업을 잘 들을 수 있게 준비했으니까 잘 들어. 근데 넌 왜 안 들어. 네가 안 들었으니까 넌 잘못됐어. 그러니까 벌 받아. 내가 벌을 주는 것은 네가 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훈계해 주는 거야. 정신 차려서 잘 들으면 너한테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뭐 이런 입장이었지요. 그래서 혼도 내 주고 벌도 세우고 멋대로 매도 들고. 그런 관계였던 것 같아요. 내가 맞고 내가 준비해온 걸 너희가 들어야 되는 게 맞는 거야. 내가 정해 놓은 틀거리에서 벗어난 아이들에 대해서 바라보는 입장이 나는 그 아이들을 위한다고 얘기를 했지만 내 입장에서 그 아이들을 정의한 거에요. 그런데 지금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라는 거죠. 그 아이가 그렇게 했을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이 국면 내에서 있을 수도 있고 밖에서 있을 수도 있고, 또 그 원인이 교사인 나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환경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최교사)
Clandinin과 Connelly(2000)가 개념화한 내러티브 탐구는 개인의 삶을 ‘살고(lived), 말하는(told) 이야기들’로 바라본다. 강현석과 이자현은 인간의 사고양식을 ‘패러다임적 사고 양식’과 ‘내러티브 사고 양식’으로 구분하면서, 내러티브 사고는 “좋은 이야기, 마음을 사로잡는 드라마, 반드시 진리인 것은 아니지만, 믿을 수 있는 역사적인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사고는 인간관계, 의사소통, 행위 의도 등의 현실을 묘사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상황 특수적인 사고이다. 또한 내러티브 사고는 주관적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상황 맥락마다 달리 나타난다.”고 말한다. (2005: 221~222)
헨리 지루는 학교를 '살아온 경험(lived experience)'의 생산에 적극 연루된 장, 즉 사회적으로 구성된 갈등의 장으로 학교를 묘사하면서 교사의 역할은 “자기가 생산한 이론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사는 “교사와 학생이 구현하고 생산하는 복잡한 역사적·문화적·정치적 형식들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지 이해”해야 하고, “중재를 끌어내는 문화 '재료', 즉 이야기, 기억, 서사 등 의식적 무의식적 자료들을 통해 지배집단과 종속집단의 구성원들이 누구인지 설명하고, 또 각기 다른 세계읽기를 내놓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2001: 211~212)
함영기는 강현석과 이자현의 논의를 빌어 내러티브 교육과정은 내러티브를 통해 학생의 학습 기회를 구성적이고 해석적으로 조직하여 지식과 경험을 지속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내러티브 관점에서 보면 교사와 학생은 대화를 통해 교수․학습을 진행해 나간다고 할 수 있다. (2008: 26)
허교사 : 질문하나 할께요. 사격은 올림픽 정식종목이 맞다? 아니다?
학생들 : 맞다!
허교사 : 정식종목이 맞습니다. 여러분 올림픽할 때 사격하는 것 본적 있나요?
학생들 : 네!
허교사 : 총이 이렇던가요?
학생들 : 아니요!
허교사 : 그럼, 이 총으로는 뭐해요?
학생들 : 전쟁!
허교사 : 이건 우리나라 군인들이 사용하는 총입니다. 매우 위험한 총입니다. 물론 군인들이 사용하는 총은 쇠로 되어 있구요, 왜? 총알 자체가 쇠니까. 하지만 이 총은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
학생들 : 총알이 플라스틱이니까.
허교사 : 흔히요, 이 총알을 뭐라고 부르죠?
학생들 : 비비탄!
허교사 : 초등학교 때 남학생한테 비비탄 많이 맞아 본 사람?
학생들 : 저요! 나!
허교사 : 이거 좋아하는 사람한테 총을 쏩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 총알은 매우 빠르게 나갑니다. 몸에 맞으면 타박상, 피멍이 들구요, 만약에, 상상해 봐. 조금 징그러울 수도 있지만, 눈에 맞으면!
학생들 : 아~
허교사 : 눈에 맞았어! 눈에 맞으면, 박힙니다!
학생들 : 아~악!
허교사 : 피나죠? 선생님이 병원으로 데려갑니다. 의사선생님에게 보여줬더니...실명입니다!
학생들 : 어~
허교사 : 따라서 이 총을 가지고 사격을 하는 경우에는 누구도, 어떠한 경우에도 총구가 친구를 향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 항상 하늘과, 땅과, 표적지만 향해야 합니다. 알겠죠?
학생들 : 네~
체육수업 뿐만 아니라 모든 수업에서 안전교육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사실 수업뿐만 아니라 새로운 무언가를 배울 때에는 항상 먼저 안전에 문제가 없는지 자세히 살펴야 한다. 그러나 안전교육이 매뉴얼처럼 진행된다면 너무 따분한 일이 될 것이다. 학생들은 이야기를 통해, 상상을 통해 안전교육의 필요성을 이해한다. 이처럼 허교사의 체육수업에서 내러티브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교사 : 교수와 여제자 간밤에 무슨 일이. 허리 44, 가슴 C컵, 환상몸매.
학생들 : 하하하...
전교사 : 부인을 사로잡는 방법. 오늘 밤이 뜨거워요.
학생들 : 우~
전교사 : 이미 우리 주변에 이런 선정적인 표현들이 넘쳐나고 있어요. 이 글을 쓴 사람이 되게 성찰적인데, 싸이에 대해 욕하기 이전에 우리 주변의 선정적인 표현에 대한 성찰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미 주택가까지 침범한 수많은 호텔들. 길거리에 뿌려진 낯 뜨거운 전단지들을 뭐라고 하지 않고, 싸이의 젠틀맨을 갖고 뭐라고 하는 것은 일의 선후가 바뀌었다는 것이 이 사람의 논지에요.
최근에 싸이의 <젠틀맨>의 선정성이 논란이 된 바 있다. 전교사는 자신의 국어수업에서 이 논란에서 싸이를 비판하는 입장과 옹호하는 입장을 소개하고 글의 논지를 살펴본다. 교사는 누구의 주장이 올바른지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학생들이 글의 의미에 대하여 이해하기 쉽게끔 학생들이 자주 접하는 예를 통하여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전교사 : (노래가사를 프로젝터로 보여주고 낭독하며) 우리 두 손 마주잡고 걷던 서울 하늘 동네 / 좁은 이화동 골목길 여긴 아직 그대로야 / 그늘 곁에 그림들은 다시 웃어 보여줬고 / 하늘 가까이 오르니 그대 모습이 떠올라 / 아름답게 눈이 부시던 / 그 해 오월 햇살 / 푸르게 빛나던 나뭇잎까지 / 혹시 잊어버렸었니? / 우리 함께 했던 날들 어떻게 잊겠니? / 아름답게 눈이 부시던 / 그 해 오월 햇살 / 그대의 눈빛과 머릿결까지 / 손에 잡힐 듯 선명해 / 아직 난 너를 잊을 수가 없어 / 그래, 난 너를 지울 수가 없어...
전교사 : 예술문화라는 것은, 그것이 대중문화이든, 클래식한 것이든 사람의 근본적인 심성을 자극해야 할 것 아냐. 그렇지?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인간적인 측면에 대해서 자극해서 거기서 내 심성이 깨끗해지는 그러한 어떤 정화감? 그런 것들을 느끼게 해야 한다고 보다면, 젠틀맨이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는 알겠지만 과연 그것이 성공했냐고 봤을 때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는 거죠. (프로젝터에 뜬 노래가사를 주시하며) 너희들 이런 노래 싫어하지?
학생들 : 좋은데...
전교사 : 좋아요? 너희들 아이돌 노래 많이 듣지? 아이돌 노래 듣는 것 좋습니다. 뭐라고 하지 않아. 다만 선생님은 너희가 거기에 매몰되지 않았으면 해. … (중략) … 노래를 듣든, 드라마를 보든, 영화를 보든, 책을 읽든, 뭘 하든지 간에 여기에는 어떤 상징이 담겨있고 나에게 주는 문화적인 영향은 무엇인가, 그것으로 인해서 내 삶은 어떻게 변화가 되고. 이러한 생각들을 각각의 장르를 통해서 경험하고 내 것으로 만들어내는 그런 과정들이 있으면 좋겠다.
전교사는 언더그라운드 그룹 에피톤 프로젝트의 <이화동>을 소개하고 나서 대중음악도 얼마든지 문학적으로 수용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각인시킨다. 그리고 나서 싸이의 <젠틀맨>을 논의하는 이유가 노래든, 드라마든, 영화든, 책이든 문화를 받아들일 때,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이라는 과정을 거쳐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21세기 한국 대중문화의 세계화를 위한 중요한 점은 바로 ‘진실성’ 인 것 같다. 화려하게 치장을 한 겉모습이 아니더라도 그 안에 내포되어있는 진실함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을 것이다. 정말 진실되고 또 쉬운 멜로디이지만 전달하려는 것은 분명히 있는, 바로 그런 것들 말이다. 정말 돌이켜보면 15년 동안 내가 들은 노래들은 정말 다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대부분 2~3개월이면 잊혀지고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별로 없다. 이처럼 시간이 오래 지나도 대중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전달하려는 것이 있어야 하고, 또 진실성도 엿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대중문화의 세계화를 위해 / 2-7 조◯◯)
“나는 젠틀맨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생각한다. 사실 포르노, 야한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싸이를 받아드리는 대중이 문제인 것 같다. ‘싸이니까’, ‘원래 그러잖아’, ‘해외에 우리나라를 알리면 됐지’ 라는 생각을 하여 그다지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점이다, 만약 그 뮤비를 싸이가 아니라 다른 가수가 찍었다면 대중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 그 가수는 여러 네티즌들 사이에 많은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싸이는 한국 문화를 외국에 알리는 것이 아니라 외국문화를 우리나라에 알리고 있는 것이다 싸이라서 용서받고 이해해 주면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 비판하고 고쳐주어야 한다. 그렇게 싸이를 감싸 돌기만 한다면 그는 더 큰 가수로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싸이의 <젠틀맨>을 둘러싼 문화비평 논란 / 2-7 박◯◯)
전교사의 수업은 학생들이 싸이의 <젠틀맨> 논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학생들은 수업 중에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기도 하고, 그러지 못한 학생들은 인터넷 카페에 게시하기도 한다. 교사의 주의 깊은 안내를 통해 학생들 역시 내러티브 탐구의 주체가 되어간다.
최교사 : 조에서 한 명이 일어나서 소감발표 하는데, 우리가 한 시간은 가르칠 것 준비했고, 두 시간은 가르치고, 두 시간은 배웠어요. 총체적으로 해본 소감, 알게 된 것, 자신의 느낌 등등을 발표하겠습니다. 조별로 한 명씩 지목하세요.
학생A : 협동학습을 하면서 습도를 가르쳤는데, 처음에는 어려웠는데, 조 애들이랑 하다 보니까 이제 좀 이해가 됐고, 배울 때는 애들이 설명하는 게 힘들어 보였는데, 그래도 잘 가르쳐주는 모습이 보여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학생B : 저희는 오늘 …를 배웠는데(잘 들리지 않음), 아이들이 잘 알아줘서 고마웠어요.
최교사 : 너는 횡설수설했는데, 애들이 잘 알아줬단 얘기 아냐?
학생들 : (박수를 친다)
최교사 : 저 친구의 심성은 어떤 것 같아요.?
학생들 : 거지. (웃음)
최교사 : 에라이! 겸손한 친구지! 저렇게 겸손하게 말하는 친구가 어딨나?
학생C : 저희는 오늘 상대습도를 배웠는데, ○○랑 △△랑 재미있게 가르쳐서 좋았어요.
최교사 : 저 얘기 들으니까 ◯◯ 기분 어떠나?
학생D : 부끄러워요. (웃음 소리)
최교사의 과학수업에서 학생들은 협동학습,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순환식 수업’을 진행한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학생들은 자신의 역할을 잘 숙지한 후, 학생들에게 그 역할을 수행한다. 즉, 학생 스스로가 보조교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실험과정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기도 하고, 수업이 끝나면 수업의 과정을 일기형식의 글로 표현하기도 한다.
“오늘은 처음으로 내가 학생이 되어 수업을 듣는 첫 번째 날이었다. 체세포분열을 들었는데 이론가님이 설명을 아주 잘 해주신 것 같다. 내가 했던 감수분열보다 체세포분열을 더 잘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학생입장이 되어보니 설명을 듣다가도 궁금한 단어들이나 차이점 같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질문을 참 많이 했는데... 저번 주에 내가 직접 교수자를 해본 결과 이런 질문들을 받으면 정말 당황한다는 것을 알아서 계속 질문을 하고 싶었다. 이히히. 현미경도 준비하자마자 바로 관찰할 수 있어서 좋았고, 계속 모르는 것을 빨리 풀어와!라고 해줘서 그냥 진짜 선생님 같아서 재미있었다. 체세포분열도 감수분열 못지 않게 재미있고 쉬운 파트라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 은샘이가 잘 가르쳐주었고 우리가 낸 힘겨운 문제에도 잘 대답해주어서 좋았다. 아영이는 수업시간에는 갑자기 소심해지는 면이 있어서 어떻게 가르쳐줄지 궁금했는데 열심히, 또 꿋꿋하게 가르쳐 주어서 좋았다. 슬비는 그렇게 안 보이는데 여러 생물들을 잘 찾아서 현미경에 대한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이런 조만 만났으면 좋겠다.”
함영기는 조덕주의 논의를 빌어 전문가로서의 교사는 수업 내용과 학생들의 반응 및 관련 주변 요인들을 고려하여 보다 풍부한 상호작용이 있는 수업을 진행시킴으로써 백인백색의 수업 형태를 구성해 낸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국가에서 제시하고 있는 교육과정 개발 절차는 글자 그대로 하나의 제안일 수밖에 없으며 반성적 사고를 중시하는 교사의 전문성에 맞는 학교 교육과정 개발의 제안으로 연결된다. (2008: 24)
실제로 본 연구자와 세 교사 - 허교사, 최교사, 전교사 - 는 학교 내에 뜻이 맞는 동료교사들과 함께 한성여중 배움의 공동체 연구회를 조직하여 학급운영, 상담, 교과수업에 대한 독서, 토론, 수업관찰 등을 진행한 바 있으며, 작년에는 학교 교육과정을 부분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서울형 혁신학교’에 참여할 것을 전교직원에게 제안하였으나 교직원회의에서 가부동수가 나와 아쉽게 부결되고 말았다.
세 교사의 학교차원에서의 교육과정 개발 및 재구성 시도는 좌절되었지만, 그들의 수업 속에서는 이러한 시도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사격’을 체육 수업 시간에 가르치는 이유(허교사), 싸이의 젠틀맨 논란에 대한 입장을 세우는 것(전교사), 순환식 수업을 통한 협동학습(최교사)은 교사가 교육과정의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며, 아이들을 수업의 주체로 세우고, 아이들의 일상 속에서 그들의 수업이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고민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임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함영기는 소경희의 논의를 빌어 미래학교 교육과정이 학교 교과 간, 더 나아가 학교 교과와 학교 밖의 세계 간의 새로운 관계를 개발할 필요성을 강하게 요구받고 있듯이, 교사의 전문성도 연계적 전문성 측면에서 개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교사 전문성은 교과 간, 그리고 교사들이 직면하는 실제적 문제 간의 새로운 관계를 개발하는 측면에서 재개념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교사들이 자신들의 교과 영역을 넘어서서 일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공식적인 교육공동체 밖의 사람들과도 협동해서 일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학교 현실과 교사의 지위에 대한 특수성으로 인하여 ‘연계적 전문가’로서의 교사상을 기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보다는 범위를 축소하여 교사의 지식측면에서 통합적, 다중적 지식의 축적과 생성을 위해 다른 교과와의 연계를 고려한다던지, 아니면 교사의 반성적 실천과 관련해서 타 교과, 타 지역, 타 학교급 간의 교사들과의 공동 활동을 촉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렇게 볼 때, 학생들을 통합적 시각에서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교원노조 활동, 학교운영위원회 활동, 교사 동아리 활동, 청소년 동아리 활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하여 온 세 교사의 경력은 연계적 전문가의 특성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고 판단된다.
“훌륭한 교사의 자질을 완벽히 갖추고 교직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교사의 자질은 경험과 자기인식을 통해 성장하고 원숙해진다. 교사는 가르칠 때 요구되는 것에 겁을 먹기도 하고, 때로는 막중한 책임이나 과중한 업무에 주눅이 들기도 하면서, 차츰 그 어려운 일에 숙달되고 진정한 의미의 교사가 된다.”
- 제임스 배너 주니어, 해럴드 캐넌(2003). <훌륭한 교사는 이렇게 가르친다> 중에서
지난 스승의 날. 학생들이 불러주는 스승의 날 노래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찰나의 인생, 영겁의 시간 속에 아이들과 나는 촌각을 다투며 이 세상에 잠깐 나타난 '동시대인'이다. 내가 아이들의 스승이라면 그것은 단지 아이들이 아직 날개를 달기 전이기 때문일 뿐이다. 아이들이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올랐을 때, 그들이 세상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의 기억 속에 나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기를 바란다.
제임스 배너 주니어와 해럴드 캐넌이 밝히고 있듯이, "가르침은 교사가 학생에게 끼치는, 그리고 끼쳐야만 하는 영향력을 자각한 뒤에 이를 위해 자신을 바쳐야 하는 일이다. 이처럼 폭넓은 인격을 요구하는 소명은 다른 일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배움에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막중한 도덕적, 인간적 책임이 뒤따르는 가르침에는 그보다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요아힘 바우어도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교사만큼 다양한 능력을 요구받는 직업도 별로 없다. 전문지식은 기본이고, 강력한 카리스마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적응력은 물론 직감적인 감지 능력도 필요하며, 전혀 다른 학생들의 성격에 대한 이해심, 저항력, 역풍이 불어닥칠 때 이를 잘 다루는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리더십이 필요하다.”
1966년 미국에서 60만 명 이상의 학생과 4천 개의 학교를 표집 대상으로 하여 교육 성취와 다양한 요인간의 상호작용을 연구한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이른바 <콜만 보고서(Coleman report)>이다. 이 보고서의 결과는 충격이었다. 학교보다는 가정 배경이나 또래 집단이 학업 성취에 더 큰 영향을 미침을 드러낸 것이다. 한마디로 학교는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이 보고서의 결함이 드러났다. 그것은 이 보고서가 교실의 물리적 시설이나 도서관의 장서 수와 같은 교육의 투입 요소들만을 주로 살펴보았지 ‘교사의 수업 활동’에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혁규. 2013: 217)
교사의 수업에 대한 두 가지 접근 - 수업을 과학으로 보는 입장과 예술로 보는 입장 - 도 결국은 교사의 수업 활동이 교육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혁규가 말하고 있듯이, 교수 방법에 대한 과학적인 법칙이나 원리의 발견으로 교직의 전문성이 높아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수업 모형을 교실에 적용하는 많은 교사들이 그 모형대로 진행되지 않는 현실을 발견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실천이 이론을 단순히 적용하는 응용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천은 언제나 맥락 의존적이다. 실천가들은 일상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나름의 판단 하에 행동하고, 그 실천 과정을 성찰하면서 새로운 실천의 길을 개척해 간다. 그리고 이런 실천적 지식의 성장 과정에는 자신의 실천에 대한 반성과 숙고가 핵심적 요소로 작용한다. (이혁규. 2013: 219~221)
이 글을 통해 나는 세 교사와의 대화와 그들의 수업을 관찰하면서 교사의 역할에 대한 대안적 관점 - 반성적 실천가, 내러티브적 탐구의 주체, 교육과정의 재구성자, 연계적 전문가 - 이 바로 ‘좋은 교사’의 조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수업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좋은 교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전달할까를 먼저 고민하지 않고, 아이들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고민한다. 그리고 그 핵심은 바로 ‘인식론적 호기심’이다. 교사에게나 학생에게나 배움에 대한 호기심이 없다면 진정한 교육은 일어날 수 없다. 교사와 학생은 서로 가르치고 서로 배우며, 세상에 대한 인식론적 호기심을 키워 나가야 한다. 교사가 스스로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너희들에게 알려준다'고 생각하는 태도로는 인식론적 호기심이 생겨날 수 없다. 교사는 자신이 학생에게 기대하는 태도를 바로 그 자신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저는 아이들도 배움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고 생각해요. 신체적 활동이든, 지적인 활동이든, 정의적인 활동이든 내가 알고 있지 못하던 바를 교사를 통해 알게 되기를 희망하죠. 아이들이 평가하는 ‘수업을 잘하는 교사’의 상이 어떠한지 정확히 알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질문을 받고 보니 애들 생각은 어떤지 설문지 같은 걸 통해 알고 싶은 궁금함이 생기기도 하네요. 제 생각엔 참신하고 열정적인 수업, 뭐 이런 게 기억에 남지 않을까요? 저 역시 학생의 입장이 되어 누군가의 수업을 들을 때를 생각해본다면, ‘저 사람이 지금 온 힘을 다해 수업을 하고 있구나’라는 것이 전달되어 좋은 교사인지 아닌지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학생 입장에서도 그런 걸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학생들은 수십명의 교사들을 통해서 배우고 있는데 각 선생님들이 제각각의 특장점을 지니고 있기에 학생들이 여러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자기 스타일에 맞는 선생님들로부터 어떤 샘플로서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해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좀 딴 얘기이면서 내 얘기라서 말하기 뭐하긴 하지만, 내 수업을 들었던 아이들의 평가를 받아보면 학생들의 만족도가 높게 나타나는 부분이 ‘오늘 이 수업을 위해 선생님이 정말로 열심히 준비해서 들어 왔구나’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고 해요. 일단 지식 영역에 있어서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해줄 때 학생들도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구요. 그리고 자신들이 생각지 못했던 현상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해석해줄 때 학생들의 지적 활동이 활발해지고 이러한 것을 의미 있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전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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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수업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좋은 교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전달할까를 먼저 고민하지 않고, 아이들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고민한다. 그리고 그 핵심은 바로 ‘인식론적 호기심’이다. 교사에게나 학생에게나 배움에 대한 호기심이 없다면 진정한 교육은 일어날 수 없다. 교사와 학생은 서로 가르치고 서로 배우며, 세상에 대한 인식론적 호기심을 키워 나가야 한다. 교사가 스스로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너희들에게 알려준다'고 생각하는 태도로는 인식론적 호기심이 생겨날 수 없다. 교사는 자신이 학생에게 기대하는 태도를 바로 그 자신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