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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Nov 17. 2019

학생의 성장을 재정의하다

OECD 2030 학습나침반이 주는 함의 (1)

교육자치 시대의 교사: 교사 전문성의 새로운 지평

04. 학생의 성장과 성숙을 재정의하다


왜 교육자치를 말하는가? 누가 교육자치를 말하는가? 교육자치를 말하기 전에 분명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교육자치의 핵심은 가르침과 배움입니다. 가르침과 배움이 없는 교육자치는 빈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모든 국민은 평생에 걸쳐 학습하고, 능력과 적성에 따라 교육 받을 권리를 가집니다. 가르침과 배움은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그것이 교육자치의 존재 이유입니다. 교육자치는 오직 가르침과 배움의 옹호를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학교는 가르침에 대한 존중과 배움에 대한 경탄이 넘쳐나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학교는 교육자치의 구조 속에서 배움과 삶이 선순환하는 지속가능한 사회의 공유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까지 학교 자율운영체제를 정점으로 하는 교육과정 거버넌스를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교육자치 시대의 교사 전문성이 새로운 상상을 필요로 하는 까닭입니다. 

사진출처 : 2019 UN 기후행동 정상회의




앎-함-삶


김진경 국가교육회의 의장은 10월23일 한-OECD 국제교육콘퍼런스 기조연설 ‘2030 미래교육체제의 방향과 주요 정책의제’에서 ‘개념적 앎(지식)’에서 ‘할 줄 앎’, 나아가 ‘살 줄 앎’으로 학력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안드레아스 슐라이허 OECD 교육국장은 “학생의 성공기준을 학업 성취도에서 ‘삶의 질’ 향상으로 재정의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기자들의 질문 90%가 대입 전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정시 확대한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학종과 수능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외국에는 대입 전형과 관련해 어떤 논란이 있습니까?” 등의 비슷한 질문들이 반복되었습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교육 2030을 논하는 자리에서 ‘앎’을 넘어 ‘함’과 ‘삶’에 대하여 논의된 것 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앎과 삶과 함을 동일한 지위에 배치하는 것 자체가 전환의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객관적 진리에 기반한 계몽주의가 주체-객체, 주인공-관객, 교육자-피교육자라는 이분법 속에서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교육 행위를 전제하고 있는 반면, '앎=삶=함'이라는 구도는 생태적 연결망 속에서 생성되는 삶에 기반한 지혜의 노선 - 구성주의와 자율성 - 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  



성장을 위한 교육이라고? 어떤 성장인가가 중요하다


앞의 글 (https://brunch.co.kr/@ysh2084/59)에서 저는「교육자치가 불가능한 이유」를 말하면서 아인슈타인의 말을 빌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은 그것이 창조되었을 때와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결코 해결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려면 우리 역시 낡은 사고방식이 만들어낸 체제 속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중심-다수자-국가주의로 상징되는 근대교육체제가 정의한 성장 혹은 성숙의 개념을 재정의할 때가 되었습니다. 근대교육체제에서의 성장과 성숙은 중심이 되는 것, 다수자가 되는 것, 국가/자본주의의 기획자(Agency)가 되는 것입니다. 근대교육체제가 말하는 성장은 사실 성공의 다른 의미였습니다. 성공하지 못한 성장은 무의미/무가치로 규정되었습니다. 근대체제가 설계해 놓은 조직도의 최상위를 차지하는 기술 그것이 곧 성숙이자 성공의 징표였습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선언은 근대적 개인의 탄생을 알렸지만 계몽주의자들의 인간해방의 기획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근대교육체제의 핵심은 앎과 삶의 분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근대교육체제를 기반으로 근대교육을 비판하는 오류를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앎과 삶이 분리된 상황에서는 아무리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다 한들, 그 개념이 삶과 연결되어 있지 않기에 단순한 헤게모니 투쟁에 그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성숙의 의미를 스스로 재정의한 한 청소년의 외침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3)

 

이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위에 올라와 있으면 안 돼요. 저는 대서양 건너편 나라에 있는 학교로 돌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희망을 바라며 우리 청년들에게 오셨다고요?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나요? 여러분은 헛된 말로 저의 꿈과 어린 시절을 빼앗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운이 좋은 편에 속합니다.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어요. 생태계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멸종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전부 돈과 끝없는 경제 성장의 신화에 대한 것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지난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과학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계속해서 외면할 수 있나요? 그리고는 이 자리에 와서 충분히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나요? 필요한 정치와 해결책이 여전히 아무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데요.

여러분은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있다’고, 긴급함을 ‘이해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슬프고 화가 난다해도, 저는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정말로 지금 상황을 이해하는데도 행동하지 않고 있는 거라면, 여러분은 악마나 다름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는 믿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인기를 얻고 있는, 앞으로 10년 안에 온실가스를 반으로만 줄이자는 의견은, 지구온도 상승폭을 1.5도씨 아래로 제한할 수 있는 가능성을 50%만 줄 뿐입니다. 이는 또한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되돌릴 수 없는 연쇄 반응을 초래할 위험까지 안고 있습니다.

50%는 여러분에게는 받아들여지는 수치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는 여러 티핑 포인트, 대부분의 피드백 루프, 대기오염에 숨겨진 추가적 온난화는 포함하지 않고 있는 수치입니다. 기후 정의와 평등의 측면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는 여러분들이 공기 중에 배출해놓은 수천억 톤의 이산화탄소를 제거할 임무를 우리와 우리 자녀 세대들에게 떠넘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기술도 나오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기후위기가 초래한 결과를 떠안고 살아가야 할 우리는, 50%의 위험을 감수하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1.5도씨 아래로 머무를 수 있는 67%의 기회를 잡으려면 - IPCC가 제시한 현재로썬 최상의 가능성인 - 세계는 2018년 1월 1일을 기준으로, 420기가 톤 이상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숫자는 이미 350기가 톤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어떻게 감히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하나도 바꾸지 않고 몇몇 기술적인 해결책만으로 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척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처럼 탄소배출을 계속한다면, 남아있는 탄소예산 마저도 8년 반 안에 모두 소진되어 버릴 텐데요.

오늘 이 자리에서 제시될 어떠한 해결책이나 계획도 이 남아있는 탄소예산을 고려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탄소예산을 나타내는 이 수치는 매우 불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여전히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세대는 여러분이 배신하고 있다는 걸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미래 세대의 눈이 여러분을 향해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실망시키기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책임을 피해서 빠져나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 바로 지금까지입니다. 더 이상은 참지 않습니다. 전 세계가 깨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든 아니든, 변화는 다가오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레타 툰베리, <UN 기후행동 정상회의 연설> 전문


그레타 툰베리 <UN 기후행동 정상회의 연설> (https://www.youtube.com/watch?v=BvF8yG7G3mU)



“여러분은 성숙하지 않았습니다.”


2018년 8월 20일, 그레타 툰베리는 스웨덴 의회 건물 바깥에 앉아 있는 자신의 사진을 소셜 미디어에 올렸습니다. 사진 속 그녀는 기후 변화에 저항하는 메시지와 당국이 행동에 나설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었습니다.이 일이 있기 나흘 전에는 비행기에 대한 경고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는 결심을 티셔츠 이미지에 담은 것이죠. 툰베리는 기후 변화를 인류가 만들어 냈다는 것을 알고서도 그리고 그것을 변화시킬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아무도 그 사실에 대해 말하지도 않고 실천에 옮기지도 않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피켓을 들게 했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미래를 위한 금요일>이라는 캠페인으로 발전했습니다.4) 


그레타 툰베리 트위터 (출처: https://twitter.com/GretaThunberg/media)


그리고 2019년 9월 23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UN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그녀는 기성세대를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어요. 생태계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멸종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전부 돈과 끝없는 경제 성장의 신화에 대한 것뿐입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을 그대로 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대멸종의 언저리에서 생태계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부동산과 재테크 그리고 경제성장의 지표에 대한 것들 뿐입니다. 아마도 기성세대들은 툰베리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겁니다. 그들은 듣고 있지만 응답하지 못하고 이해하지만 행동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근대교육체제가 말하는 ‘성장’의 한계일지도 모릅니다. ‘어리니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북유럽 선진국의 학생이니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과연 10년 후에도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것은 순수함 혹은 순진함으로 치부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조만간 미성숙의 징표로 낙인찍히게 될 것 입니다.


사실은 모든 기성세대가 툰베리의 실패를 기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사실을 그대로 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장과 성숙의 의미를 재정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정의를 먼저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그레타 툰베리가 매주 금요일 "미래를 위해" 등교를 거부한 행위는 미래교육체제에 대한 새로운 알레고리가 될 것입니다. 저는 미래교육과 미래교육체제를 구분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미래교육은 기존의 교육체제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동의 미래'를 고민하지 않는, 아니 고민하는 흉내는 내지만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하는 소위 ‘개편’은 안타깝게도 우리 교육을 ‘개판’으로 만들 뿐입니다.  



OECD 교육 2030 : 미래 교육과 역량 프로젝트


‘OECD 교육 2030 : 미래 교육과 역량 (OECD Education 2030: The Future of Education and Skills)프로젝트’는 현재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이 취업을 하고 사회에 진출하는 시기인 2030년 무렵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미래핵심역량이 무엇인가와, 이를 어떻게 학교교육을 통해서 학생이 학습하고 역량을 키워갈 수 있도록 할 것인가라는 고민에서 출발한 OECD 국가 간 공동연구 교육혁신 프로젝트입니다.5)


2015부터 2018년까지 수행된 제 1기는 미래사회에 필요한 역량을 탐색하고 새롭게 개념화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2019년부터 시작된 제 2기에서는 국제적 수준의 교육과정 분석과 함께, 의도된 교육과정이 효과적으로 학교에서 실행될 수 있는 원칙과 교수학습 설계에 관한 공통적 개념, 그리고 교사에게 필요한 역량과 특성에 대한 연구를 추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공동 연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의 정답을 구하기보다는 방향성을 탐색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학습나침반(Learning Compass)’이라는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인데요, 이는 학생이 교사의 지도나 지시를 단순히 수용하지 않고 낯선 상황에서도 스스로 의미를 찾아 책임 있게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학습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OECD 2030 학습나침반 (출처: 한-OECD 국제교육컨퍼런스 보도자료)


Agency의 의미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학습나침판 주변의 세 가지 키워드, 즉 ‘학생의 자기주체성’, ‘동료, 교사, 공동체의 지원과 협력’ 그리고 ‘웰빙 2030’입니다. 여기서 ‘Agency’를 ‘자기주체성’으로 번역하는것이 옳은 가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습니다. 주체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는 사유의 주체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할 때의 주체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 구조 속에서 어떻게 각자도생할 수 있을지 머리 굴리는 주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Agency’라는 개념을 기존의 낡은 교육체제 위에서 ‘자기주체성’이라고 해석할 경우, 즉 자기주체라는 개념이 자본주의의 상품화와 결합되는 경우 이는 손쉽게 ‘자기계발의 주체’가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Agency’는 정말 기획사를 의미하는 ‘에이전시’가 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Agency’는 (사회)구조 속에서 다른 주체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그래서 궁극적으로 그 구조를 변혁해낼 수 있는 행위의 주체, 즉 ‘행위주체성’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할 때 Agency가 Co-agency 및 Wellbeing이라는 개념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더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학생의 행위주체성은 필연적으로 교사의 행위주체성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교사의 전문성 또는 정체성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일관성을 위해 ‘Agency’는 ‘자기주체성’으로 표기합니다. 즉 ‘Student Agency’는 ‘학생의 자기주체성’으로, ‘Teacher Agency’는 ‘교사의 자기주체성’으로 표기합니다.)

 

학생의 자기주체성(Student Agency)은 학생들이 학습의 과정에서 미래의 목표에 대해 예측하고 심사숙고하며 비판적 사고와 함께 질문하는 능력을 키워야 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학생들은 스스로 계획을 세워 행동하고 반성하며 자신의 행동을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펼치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활용하면서 키워야 합니다. 따라서 학생 자기주체성은 학습의 과정에서 구현되어야 하는 동시에 학습의 결과 도달해야 할 목표이기도 합니다.


미래를 살아갈 학생들은 종종 교사나 교과서가 대답할 수 없는 현실 문제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에 학교가 모든 것들을 가르쳐야한다거나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교사나 교과서를 통해 학생들이 마주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고 가정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학생의 자기주체성은 관계적인 것이며, 개인과 생애에 걸쳐 사회적 맥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개발되는 것입니다. 특히 단기적으로 개발되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비선형적 과정에서 개발되는 것으로 도덕적, 창조적, 경제적, 시민 사회적 자기주체성을 포함하는 다차원적 개념입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앞에서 소개한 ‘교사의 자기주체성’ 개념(https://brunch.co.kr/@ysh2084/60)과 밀접한 연관을 갖습니다. (계속)


학생의 자기주체성 (출처: 한-OECD 국제교육컨퍼런스 보도자료)




1) 백년대계 논하는 자리에 입시 질문만 쏟아졌다 (https://news.v.daum.net/v/20191113095658186)


2) 신승철(2017). 구성주의와 자율성. 알렙. 84~85쪽. "생태적 지혜는 근대의 개념실재론처럼 '분석적인 지식'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종합적인 사유를 전개한다. 예를 들어 근대의 지식은 분리하고 고립시키고 쪼개서 앎을 추구하는 방식이며, 이는 실험실 환경이라는 독특한 공간을 산출하기도 하였다. 이에 반해 생태적 지혜는 연결망 전체의 맥락과 접속 속에서 '종합적인 지식'을 산출한다. 심층생태학자 프리초프 카프라는 "살아 있는 시스템들이 모든 수준에서 연결망이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의 그물을 다른 시스템(연결망)과 연결망이라는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 살아 있는 시스템으로 생각해야 한다."라고 전일적 세계관(holism)의 입장에서 종합적인 생태적 지혜를 조망하였다. 이러한 분석과 종합 간의 방법론적 차이가 근대적 지식과 생태적 지혜의 차이점으로 등장한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근대의 객관적 진리론이 '대답으로서의 지식'을 추구하는 데 반해 생태적 지혜가 '문제제기로서의 지혜'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3) 그레타 툰베리(2019). UN 기후행동 정상회의 연설 전문


4) 그레타 툰베리: 기후 변화를 놓고 세계 정상들과 한 판 붙은 10대 (https://www.bbc.com/korean/international-49849279)


5) 한-OECD 국제교육컨퍼런스 보도자료 (https://eduvision.go.kr:443/cop/bbs/selectBoardArticle.do?bbsId=BBSMSTR_000000000003&nttId=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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