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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상혁 Jul 19. 2020

교육의 위기

'수업'에만 전념한다는 말의 의미

나는 '수업'에만 전념한다는 것의 의미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수업'이라는 것이 교과서에 나온 지식을 학생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아니 사실 그것은 현대적 의미에서 '반수업'에 가깝다. 국가-교육부-교육청-학교-교실로 이어지는 하향적 구조 속에서 국가가 정한 지식을 교사가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것이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수업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수업'은 세상 속에서 벌어지는 날 것 그대로의 삶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질문을 던지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속에서 수많은 편견과 오해, 왜곡과 혐오의 함정을 피해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침내 학생들과 함께 우리가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혁시킬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키워가는 과정. 그것이 나는 수업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교사가 '수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학교 업무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이다. 그것은 소위 '급'을 따지는 국가주의적 위계질서와 사유하지 않는 관료주의로부터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을 보호하겠다는 의미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점점 위태로워지는 삶의 현실 속에서 발생하는 가시 돋친 도전과 위협들을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떠맡기는 행위의 정당화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교사가 '수업'에만 집중하겠다는 말이 언제든지 부정적 의미의 관료주의("이건 내 업무가 아냐") 혹은 전문가주의("이런 건 내가 할 일이 아냐")적 수사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수업이 교사가 세상을 외면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학생들이 EBS 강의보다 우리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 혹은 그 반대 - 이유를 살펴야 한다. 아픈 세상이다. 덩달아 아픈 아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니콜라이 보그다노프 벨스키가 바라본 학교의 모습은 비천한 현실에 처한 아이에게 희망으로 다가오는 듯 하다. 백년이 훨씬 지난 지금 우리의 상황은 얼마나 나아졌는가. 지금의 아픈 아이들게 학교는 어떤 공간인가.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강의기술자'가 되는 것이 교사의 미래가 아니듯 새로운 변화를 외면한 채 구조와 환경 탓만 하며 기존의 질서만 붙들고 있는 모습도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 될 수는 없다. "모든 교사는 실시간 쌍방향 수업을 해야한다"는 주장은 비교육적이고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하지만 그 전제 속에 감춰진 부끄러운 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그림 출처: Nikolai Petrovich Bogdanov-Belsky, <At the School Door>, 1897, oil on canvas, 127.5 cm X 72 cm,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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