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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혜 Nov 09. 2019

스무 살의 열정, 서른 살의 불안 (3)

세 번째 방, 시엠립

앙코르와트고요하고 은밀한 방 

더 미루지 않았다. 패키지여행으로 10년 만의 앙코르와트 여행을 다녀온 후 나는 곧바로 출판사와 계약서를 썼다. 그리하여 나의 첫 해외여행 안내서의 주인공은 앙코르와트가 되었다. 

아무리 세계적인 랜드마크라 해도 특정 명소의 이름이 도시 이름을 대신해 지칭되기란 드문 일이다. 캄보디아의 시엠립을 소개하는 국내 여행안내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앙코르와트만 있을 뿐이다. 서울, 도쿄, 파리, 런던, 뉴욕 등의 도시명을 타이틀로 내세운 여행안내서 시리즈들도 시엠립만은 앙코르와트로 통칭한다. 바다처럼 커다란 호수 톤레삽과 아름다운 저수지 서바라이, 밤마다 맥주파티가 열리는 펍스트리트 등 그 모든 시엠립의 명소를 소개하려면 앙코르와트가 아닌 시엠립이라 해야 맞다. 시엠립이라는 이름은 시암(태국의 옛이름)에게 승리한 도시라는 뜻이다. 그 이름이 무색하게 제국은 시암에 의해 멸망했고 시암의 지배 아래 있었다. 화려했던 제국의 건축물들은 한동안 정글 안에 방치되고 울창한 수풀에 가려져 잊혀졌다. 다시 캄보디아 영토로 반환된 이후로도 사원 기둥 뒤로는 내전의 총구가 겨눠졌으니 그 질곡의 역사는 그것을 고작 몇 문장으로 축약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서사가 아니다. 그러니 제국이 가장 강성했던 시절, 가장 강력했던 왕이 건축한 사원의 이름으로 아픈 구석 많은 시엠립이라는 이름을 대신하는 편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어떤 이유를 차치하더라도 앙코르와트는 그 자체로 캄보디아의 정체성이다. 오늘날 앙코르와트의 가치는 역사적, 종교적, 과학적, 미학적 가치를 뛰어넘어선 곡진한 마음 같은 것이 아닐까. 


세계적인 건축물을 꼽으라면 피라미드도 있고 타지마할도 있고 또한 콜로세움도 있겠지만 앙코르와트는 그들과 다르다. 검은 기둥에 살며시 다가가 무어라 말하고 까만 기단 위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고 싶은 곳이다. 홀연 미소 짓는 압사라 부조를 가만히 바라보고 때때로 울적함을 토로하고 싶은 곳이다. 수천, 수백 개의 기둥과 방, 그리고 문이 있어 남몰래 숨어들 수 있는 그런 사원. 나만의 감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앙코르와트가 도시와 나라를 대표한 이름으로 불리는 까닭에는 분명히 복수의 마음이 존재했으리라. 멸망한 왕조의 오래되고 낡은 사원을 애틋하게 아끼는 그런 마음. 나는 그런 마음을 갖는 동시에 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또한 아낀다. 

세계적인 명소를 향한, 이토록 사사로운 감정은 어쩌면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은연중 무수히 접해온, ‘신비롭고 불가사의한’이란 수식으로 앙코르와트 여행을 독려하는 여행사들의 마케팅 때문일 수도 있다. 남자 주인공이 앙코르와트 사원 기둥에 대고 귓속말을 하듯 비밀을 토로했던 영화 <화양연화>의 마지막 장면 때문일 수도 있다. 취재를 이유로 문턱이 닳도록 사원을 드나든 익숙함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원인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랑해서 사랑한다고 하는데 어떤 이유와 동기를 댈 수 있을까.    


나는 다만 천년에 가까운 지난 시간 동안 이곳에 새겨졌을 마음의 부조들을 생각한다. 또한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숱한 감정들을 이곳에 새기려 가슴속에 정과 끌을 품고 올 것이다. 앙코르와트는 그런 곳이다. 


건기와 우기로 나눠 각각 한 달씩 시엠립에 머물렀다. 머무는 동안의 베이스캠프는 언제나 앙코르와트였다. 외곽의 유적지를 돌든, 시내에서 오랫동안 머물든 그 종착지는 언제나 앙코르와트였다. 실질적인 베이스캠프라 해야 할 숙소는 거의 매일 옮겨 다녔기 때문에 사실상 베이스캠프의 의미가 없었다. 가이드북에 소개할 숙소를 선별해야 했기 때문에 가능한 여러 곳의 호텔과 게스트하우스를 체험해야 했다. 그랬으므로 내가 안정감을 느끼는 곳은 고작 하룻밤을 묵는 숙소가 아니라 여러 날을 오간 앙코르와트였다. 



딱히 할 일이 떠오르지 않는 날에는 자전거를 타고 앙코르와트로 향했다. 시내에서 앙코르와트는 약 7km. 하루에 1달러면 빌릴 수 있는 기어 없는 저렴한 자전거를 타고 약 40분을 달리면 사원 입구에 닿았다. 복잡한 시내 구간을 벗어나 압사라 로드에 진입하면 그때부턴 페달을 밟는 발에 힘이 들어갔다. 한낮에는 정수리로 내리 꽂히는 볕이 너무 뜨겁기에 주로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에 자전거를 탔다. 낯선 새소리를 듣고 다양한 채도의 초록을 바라보며 정글과 평원 사이로 난 아스팔트 도로를 달렸다. ‘지금 자전거를 타고 앙코르와트로 향한다’는 말을 되뇌면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늘 사원의 남쪽 길로 진입했기에 사원에 다다라서도 건물의 정면을 곧바로 볼 수 없었다. 해자 밖으로 난 도로를 커다랗게 돌고 나서야 사원의 측면이 보이고 이어 정면이 드러났다. 정면이라 해도 해자와 외벽이 있어 완전한 모습을 보려면 진입로를 한참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 길을 수십 번씩 오가도 해자를 돌아드는, 사원이 보이기 직전의 그 순간이 항상 설렜다. 

나는 아무렇게나 사원 안을 돌아다녔다. 말 그대로 아무렇게나. 물론 가이드북에는 ‘1층 회랑을 반시계 방향으로, 서쪽과 남쪽, 동쪽 일부까지 본 후 2층은 가볍게 둘러보고 3층 성소로 올라가’는 효율적인 동선을 소개했다. 그것이 독자들을 위한 최선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넉넉히 잡고 여유롭게 돌아보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아무렇게나 돌아보라’는 문장은 적을 수 없었다. 


사원의 관문과 같은 외벽 문 앞에서 나는 늘 어떤 문으로 들어갈지 고민했다. 정문 격인 왕의 문으로 들어갈지 오른편의 신하의 문으로 들어갈지 그도 아니면 왼편의 코끼리 문으로 들어 갈지. 왕의 문으로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어깨를 편다. 사원의 정중앙을 향하기에 걸음걸음에 힘이 들어간다. 신하의 문으로 들어가면 다소 발걸음이 느려진다. 그 문으로 들어서면 비슈누 신이 있고 치아를 드러낸 채 웃는 압사라 상이 있어서 여기저기 시선을 둘 곳이 많다. 코끼리 문으로 들어서면 뒤뜰을 산책하듯 몸도 마음도 여유롭다. 그 문으로 드나드는 관광객은 극히 드물어서 광주리를 인 행상이나 무작정 헬로우를 외치는 현지 아이들을 마주치곤 한다. 

사원에 들어가면 마음 가는 곳에 엉덩이를 붙였다. 어느 날에는 서북쪽 연못 앞 도서관에, 또 어느 날에는 인적 드문 1층 북쪽 회랑에, 또 어느 날에는 2층 동쪽 난간에…. 기둥에 기대 조는 날도 있고 시집을 읽기도 했다. 오후 12시에서 1시 사이와 오후 4시에서 6시 사이는 사원이 가장 한가로운 때다. 점심시간과 해 질 녘이 앙코르와트의 브레이크 타임인 셈이다. 한 달에 한 번, 3층 성소가 문을 닫는 날도 사원은 텅 빈다. 앙코르와트에 방문하는 이들에게 가장 신성한 ‘신의 방’, 3층 성소을 방문하는 일은 거의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텅 빈 사원이 좋았다. 사람 없는 회랑을 거닐 때 내 마음은 충만했다. 사원이 오롯이 내 공간이 되는 것만 같은 느낌. 그럴 때 나는 또다시 우주를 떠올렸다. 유물만이 밝게 빛나는 어두운 박물관 안에서, 또 경주의 허허벌판 위에 서서 떠올린 바로 그 우주다. 이 우주 안에서 나는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확인한다. 그러니 내 걱정과 아픔도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그러니 욕심 없이 보잘것없는 그 상태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마음이 편해진다. 자기 비하나 허무함 같은 감정이 아니다. 나 자신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끔은 일출을 보기 위해 일찌감치 앙코르와트에 가기도 했다. 그러나 처음과 두 번째 새벽만큼 강렬한 새벽은 더 이상 없었다. 가이드북에 실릴 근사한 일출 사진을 위해서 나조차 ‘자리싸움’에 동참해야 했고 그때마다 ‘나의 앙코르와트’는 희미해졌다. 

앙코르와트에 더 가까이, 더 깊숙이 다가간 데에는 분명 가이드북 제작이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가이드북을 위한 취재를 의식하는 순간 우주는 사라지고 구체적인 현실이 드러났다.      



나의 집은 어디일까  

나는 지금 어디일까, 아늑하고 따뜻하기로는 이제까지의 그 어떤 방보다 훌륭한 봉천동 201호가 가끔씩 낯설었다. 어쩌다 이곳에 누워 있을까 하는 생각. 어떻게 흘러 흘러 이곳까지 왔나, 스무 살 이후부터 내가 한때 몸을 누였던 자리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다음의 방은 어디에 있을지 예상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의 방이 그러했듯.

비유로서 여행작가의 방은 어떤 곳도 될 수 있다. 어느 날은 5성급 특급호텔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느 날은 싸구려 여관방이 될 수도 있다. 그 말은 언뜻 낭만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언제든 짐을 싸야 하므로 기저에는 안정감보다 불안감이 있다. 아니, 그보다도 어디든 내 방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낭만적으로 들리기 위해선 적어도 그루터기처럼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을 내 방이 이미 존재해야 한다. 어디에 있든 다시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거니까. 봉천동 201호가 2년간 임시로 묵는 숙소라면 내가 돌아갈 곳은 어디일까. 돌아갈 곳은 없고 새로이 가야 할 곳만 있다. 2년의 임대 기간이 끝나면 그대로 머물지 혹은 다른 곳을 찾아야 할지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은 단기로 머물 여행지를 고를 때처럼 설렘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월세와 단열, 창문과 일조량, 수압과 방음 등을 따지겠지만 무엇이 됐든 우선은 ‘싼 집’이어야 할 테고 높은 확률로 변변한 공원이나 도서관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복권 당첨을 상상할 때를 제외하고 현실적으로 집을 소유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숱한 사람들이 ‘내 집 마련’의 꿈을 말할 때, 집을 소유하기보다 임대하는 것을 훨씬 보편적으로 여긴다는 유럽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나는 유럽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다. 가까운 이들이 거실이 있는 집을 전세로 얻었다거나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샀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어떤 ‘박탈감’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었다. 박탈감을 느꼈다면 언젠가는 내 집, 아니 전셋집이라도 마련하겠다는 의지를 다질 수도 있을 텐데 그런 일은 아무래도 이번 생에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내겐 너무 아득한 금액…. 사람마다 부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때때로 나는 어쩌다 이렇게 가난해졌을까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는 필연적으로 자기 비하가 동반했다. 성실하게 회사를 다니며 월급을 받았더라면 지금과 달리 바퀴벌레가 없는 집에서 살 수 있었을까, 뚜벅이 여행작가가 아닌 자동차로 주말여행 다니는 회사원의 생활은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아니, 내가 이렇게 가난한 이유는 단순히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내가 못난 탓’이라는 자기혐오에 이르렀다. 그러다가도 문득 억울했다. 어떻게든 통장 잔고를 메우기 위해 노력하며 살지 않았나.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버티고 또 버티면서 원고를 끄적이지 않았나. 앉아서 원고만 썼으면 덜 억울했겠다. 눈이 쏟아지는 대관령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고 비가 쏟아지는 제주도 곶자왈에서 길을 헤매고 수상한 게스트하우스에서 공포의 밤을 보냈던 기억들이 줄줄이 스쳐 가면 나는 왜 그리 미련했나, 누가 그 고생을 알아주기나 했나 울적함이 배가 됐다.



한동안 우울했다. 시엠립을 오가며 취재를 하고 원고를 쓰는 와중에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근심을 떨치려 산책을 나서면 복잡다단한 집들과 좁은 골목, 자동차와 오토바이들의 소음에 금방 싫증이 났다. 마음 편히 걸을 수 있는 공원까진 걸어서 족히 20분이 걸렸다. 똑같이 생긴 다세대주택들과 빌라들이 촘촘하게 들어선 골목길을 지나면 소위 ‘방석집’이라 불리는 음지의 술집들이 자리한 대로변이 나왔다. 물망초, 장미, 자운영 이런 예쁜 이름들의 술집들은 늘 컬러풀한 색깔의 불투명 필름이 외관의 전면부를 덮고 있었다. 간혹 출입문이 열려 있어도 내부는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대부분 집들이 언제 붙였을지 모를 ‘신장개업’이라는 종이 팻말을 달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그 앞을 지나는 날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따금 그 집들은 내 방보다 더 쓸쓸해 보였다. 술집들을 지나면 체인 빵집, 화장품 가게, 헬스장, 옷가게, 게임방이 번갈아 가며 등장하고 이렇다 할 특징 없는 도로변을 십여분 쯤 더 걸으면 멀찌감치에 백화점 한 곳과 고층의 주상복합빌딩 몇 채가 눈에 들어왔다. 공원은 그 고층건물들과 이웃한다. 고층건물들이 있어서 공원이 생겼는지 공원이 있어서 고층건물들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들이 어우러져 아주 이상적이고도 전형적인 도시 풍경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다. 그들 동네와 내가 사는 동네는 마치 전혀 다른 그림의 퍼즐 조각 두 개를 억지로 맞춰놓은 것처럼 조화롭지 않았다.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공원을 걸으며 생각했다. 이 도시에서 수시로 산책을 즐기고 싶다면 돈이 많아야겠구나. 복권에 당첨되면 공원 옆에 있는 아파트를 사야지. 도서관도 공원과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는 도서관이 없었다. 걸어갈 수 있는 동사무소 건물 내에 ‘작은 도서관’이라 명명된, 이름 그대로 규모가 작은 도서관이 있었지만 장서가 많지 않아 빌리려는 책이 없을 때가 많았다. 별 수 없이 버스를 타고 열 정거장 이상 떨어진 곳에 있는 구립도서관까지 가야 했다. 구립도서관은 책도 많고 무료 강좌도 자주 열려서 나는 이따금 도서관 바로 앞에 자리한 아파트 주민들이 부러웠다. 인터넷으로 아파트 시세를 검색하면 월세는 없고 전세는 내 수중에 없는, 또한 마련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공원 혹은 도서관으로 향하는 짧지 않은 길을 걷다 보면 문득 시선이 머무는 곳들이 있었다. 초등학생만 입장할 수 있는 트램펄린 놀이장이라든가 일 년 열두 달 크리스마스 리스 장식이 붙어있는 반지하층의 교회, 족히 20년은 되었을 간판을 붙인 우유와 신문 보급소, ‘GIFT FRO YOU’라고 오타를 적은 간판을 걸어둔 오래된 문구점과 그 앞의 뽑기 기계, 그리고 오래전 아버지의 집…. 그 풍경에 설렌 적은 없었다. 향수를 느낀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낡고 오래된 것들이 주는 안정감이 있었다.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신뢰 같은 것. 가끔은 내 방 천장의 물자국 같은 쿰쿰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면 안정감이 아니라 넌더리가 났다. 여행이라 여기면 소중해지다가도 끝을 알 수 없는 장기거주라 생각하면 그만 벗어나고 싶어 지는 마음. 변덕이 골목을 오갈 때마다 들끓었다.

우울해서 무작정 걷다가 더 우울해질 때가 왕왕 있었다. 그게 다 풍경에 여백이 없는 탓이라 여겼다. 심지어 공원을 가도 나무보다 사람이 더 많은 날이 많았다. 매년 짙어지는 미세먼지에 올려다본 하늘마저 갑갑했다. 무늬도 없이 미색의 여백뿐이었던 방 안 천장마저 얼룩져 버렸으니 나는 다시금 이사를 생각했다. 그즈음 쓰고 있던 앙코르와트 가이드북은 내가 주체하지 못할 지경으로 활자가 넘쳐나고 있었다. 정작 공간은 여백이 넘치다 못해 텅텅 비어 있는데 공간을 소개하는 글은 쉼표 하나 겨우 들어갈 만큼 빽빽했다. 출판사 편집부에서 여러 차례 원고를 줄여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내 마음에도 여백이 없어 악몽과 가위에 시달리는 밤이 거듭 이어졌다. 


비를 흠뻑 맞고 다닌 나날 

비 오는 날씨를 싫어한다. 비 예보만으로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처지고 비가 내리면 실내에 있어도, 바깥에 나가도 마음이 무겁다. 거의 혐오 수준으로 비를 싫어하게 된 정확한 연유는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내가 머문 다수의 방에 장마철에 생긴 곰팡이들이 존재했다. 운 좋게도 물난리를 경험한 적은 없었지만 축축하고 쿰쿰한 느낌을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싫어했던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방을 구하러 다닐 때도 반지하방은 처음부터 옵션에 없었다. 그런 내가 시엠립의 우기를 환영할 리 없었다. 그러나 여행안내서 취재를 위해선 반드시 우기의 시엠립을 경험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우기의 시엠립은 나의 ‘비 혐오’를 어느 정도 거두어 갔다. 우기의 시엠립은 건기의 시엠립보다 비현실적인 풍경을 품고 있다. 아니, 비 덕분에 선명하고 짙어진 정글과 유적의 풍경도 매력적이었지만 정확히는 내 의지로 빗속에, 그러니까 그 풍경 속으로 뛰어든 순간들이 좋았다. 산 위에서 바라본 굉장한 속도의 비구름과 번개, 사원 안에서 들은 빗소리 또한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외곽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 프놈 끄롬과 프놈 복의 정상에 처음 올랐던 날도 세찬 스콜이 쏟아졌다. 프놈 끄롬에 갈 땐 늘 자전거를 탔다. 프놈 끄롬은 시내 서남쪽 농로를 따라 총크니어 방향으로 20분쯤 달리면 닿을 수 있는, 오름처럼 야트막한 산이다. 언덕길을 따라 정상까지 올라가면 크메르 제국 시기에 지은 오래된 사원이 있다. 사원과 그 주변 산등성이는 주변의 논과 밭, 멀리 프놈 꿀렌까지 바라볼 수 있는 훌륭한 전망대 역할을 한다. 나는 프놈 끄롬도 좋아하지만 프놈 끄롬으로 향하는 시골길 또한 참 좋아한다. 다듬지 않은, 오로지 논밭을 오가는 소들과 농부들의 길로 중간에는 인적 드문 사원 왓 아트베아가 있고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사방이 탁 트여 시야는 온통 들판의 초록과 하늘의 파랑이다. 이따금 말을 탄 관광객들이 지나가며 손을 흔들기도 했다. 그 길은 근처 승마 농장에서 이용하는 코스 중 한 곳이기도 하다. 풍경에 취해 더운 줄도 모르고 농로를 달리다 보면 어느덧 산 근처에 왔음을 알리는, 큰 길가의 연꽃농장이 등장한다. 연밭은 광활해서 굳이 돈을 내고 들어가지 않아도 충분한 눈요기가 되었다. 그 주변에는 뱀 요리 전문 식당이 몇 있어서 ‘별미’를 맛보려는 서양의 모험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프놈 끄롬은 얕은 산이지만 기어가 없는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기엔 벅찼다. 산 입구에 다다르면 나는 자전거를 주변에 세우고 걸어서 올랐다. 프놈 끄롬은 관광객보다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다. 특히 데이트 장소로 인기가 많아서 오토바이를 탄 숱한 커플들이 나를 앞질러 정상에 올랐다. 다만 내가 처음 프놈 끄롬을 찾은 날은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컴컴한 오후여서 사람이 드물었다. 정상에 다다랐을 때는 멀리 시내 쪽에서 빠른 속도로 돌진해오는 먹구름을 보았다. 여기저기서 번개가 쳤고 먹구름이 드리운 곳은 비가 퍼붓고 있었다. 그래 봤자 내가 있는 곳에서 1~2km가량 떨어진 가까운 곳이었다. 심지어 아득한 서쪽의 하늘은 희미하나마 구름 밖으로 햇빛이 번졌다. 인공적으로 조성한 영화 세트장인 것처럼 이상하고 날씨였다. 이윽고 프놈 끄롬에도 비가 쏟아졌다. 눈 앞에 펼쳐진 광활한 논밭에 금세 물이 차올랐다. 논 주변 서너 곳의 웅덩이에서 무언가 검은 것들이 들썩이는 모습이 보였다. 물소떼였다. 물소들이 줄지어 웅덩이를 건너고 있었다. 건기 때는 물론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이색적인 풍경이어서 한동안 물소들을 바라봤다. 한 현지인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물소들은 우기 때 아주 힘이 세져. 물소니까.” 그 말에 나는 언제 힘이 강해질까 생각했다. 비 오는 날도, 추운 날도 그리고 더운 날도 싫은데 도대체 내가 힘이 세질 땐 언제일까.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비를 맞으면서 산을 내려왔다. 한 젊은 남자가 비에 옷이 젖은 채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오토바이에 시동을 켜는 걸 봤다. 그는 몹시 추워 보였는데 나는 어쩐지 비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비를 맞으며 포근하다고 느꼈을 정도였다. 비가 싫다는 생각을 아예 잊고 있었다. 내심 기대했던 황금빛 일몰은 프놈 끄롬에 두 번째 방문했을 때 감상할 수 있었다. 드넓은 평야를 물들인 석양빛이 퍽 황홀했는데 내겐 비가 내리던 프놈 끄롬이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변덕스러운 날씨를 경험했기로는 프놈 복만한 곳이 또 없었다. 뚝뚝이를 타고 산으로 향하는 길은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는데 산 입구에 도착해서는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해가 떴다. 나를 바래다준 뚝뚝이 기사 쏘꾼은 내가 내려올 때까지 산 입구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습기와 더위뿐 아니라 수풀과 모기, 뱀처럼 크고 긴 굼벵이들과 거의 사투를 벌이다시피 걸어야 했다. 10분쯤 오르니 시야가 트이고 정상의 사원까지 난 시멘트 계단이 등장했다. 적어도 몇백 계단은 되어 보였다. 심호흡을 했다. 도대체 나는 왜 이리 사서 고생일까.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프놈 복에 오른 건 단순히 ‘전망’이 좋다는 후기 때문이었다.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계단은 물기 한 점 없이 말라 있었다. 한 계단 씩 오를 때마다 내 입도 말랐다. 그에 대한 보상처럼 오를수록 시야는 트였다. 온몸은 이미 땀으로 젖었다. 마침내 사원에 닿았을 때 한 늙은 남자가 나를 맞이했다. 뚝뚝이 기사가 말했던 ‘폴리스맨’ 같았다. 그가 입은 유니폼에 대문짝만 하게 ‘폴리스’라 쓰여있었지만 정말 경찰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폴리스맨은 내게 국적을 물었고 잠시 보여줄 것이 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밟고 선 바닥의 돌을 밀었고 그 안에는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빗물을 모은 지하수 저장소라고 했다. 우물처럼 깊고 어두워서 나는 멀찍이서 고개만 빼 그가 자랑하는 첨단의 워터시스템을 보았다. 남자는 플라스틱 물통을 두레박처럼 내려 물을 퍼 올렸다. 그리고는 내게 씻으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가 물통을 들고 있었기에 손을 내밀자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라는 시늉을 했다. 물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깜짝 놀란 건 별안간 쏟아진 물이 아니라 물의 온도였다. 시원함의 절정이었다. 더 부어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한 번으로 만족했다. 프놈복에서 등목이라니….  

폴리스맨은 노련한 가이드처럼 앞장서 중앙사원으로 나를 안내했다. 높은 산도 아니건만 사원 주변은 안개가 자욱해서 희미한 대기 사이로 사원이 등장했을 때 나는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폴리스맨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겠다면서 무너진 사원의 돌무더기를 성큼성큼 밟고는 중앙성소 꼭대기로 향했다. 그가 허리를 굽혀 손을 내밀었다. 너도 올라와. 그의 손은 무시하고 내 손발로 기어올랐다. 그가 도와준다는 빌미로 내 몸을 만지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안전은 개뿔, 폴리스맨으로부터 나를 지켜야 했다. 중앙성소 꼭대기에 올라간 경험은 특별했지만 사방은 구름이 끼어 있었다. 어쩌다 우기에 여길 오르게 됐을까…. 크메르어와 영어가 섞인 폴리스맨의 말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산 위에서 혼자 일 한다는 건 정말 지루한 일이지. 어쩌다 너 같은 방문자가 생기면 난 아주 행복해.” 

그가 몹시 성가시게 느껴질 무렵 폭삭 젖은 차림의 쏘꾼이 나타났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게다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비가 올 거야. 어서 내려가자.” 

비구름은 바람을 탄 듯 눈에 보이는 속도로 몰려왔다. 태어나 본 구름 중 가장 빨랐다. 쏘꾼은 내 가방을 지고 부리나케 뛰어 내려갔다. 

“뚝뚝이에 지붕을 씌워야 해!” 


우리는 서둘렀지만 결국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든 한 명은 넘어져도 놀라지 않을 만큼 빠르게, 그러나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불안하게 뛰었다. 그러면서 시시때때로 깔깔 웃었다. 내가 맞는 비는 프놈 끄롬에서처럼 차갑지 않았다. 그러나 쏘꾼이 맞는 비는 나와 다를 거라 생각하니 조금 미안했다. 시내에 돌아왔을 때 나는 쏘꾼에서 팁을 조금 더 얹어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성의였지만 돈이 마음 같지 않아서, 마음이 돈 같지 않아서 미안함이 덜어지진 않았다. 이날 찍지 못한 전망 사진을 위해 맑은 날 다시 찾았지만, 그래서 결국 원하는 사진을 찍었지만 역시나 마음으로 찍은 사진은 비를 맞은 첫날이었다. 커다란 굼벵이와 등목, 안개, 그리고 몰려오던 비구름이 있던 나의 첫 프놈 복.    

한 발을 뗄 때마다 붉은 진흙이 묻어나던 반띠에이 쓰레이, 빗물이 넘친 사원 진입로에 아이들이 징검다리를 놓던 바콩, 젖은 이끼로 덮인 버려진 사원 뱅 멜리아, 마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던 우중의 앙코르와트 사원 3층 성소…. 참 이상했다. 내가 어쩌다 비 오던 날씨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내 방 천장의 물 얼룩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던 시간들이었다. 

하루는 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 비에 흠뻑 젖어 웃고 있는 내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길가에 정차 중이던 뚝뚝이 기사에게 다가가 사진을 부탁했다.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 모습을 찍어줬고 결과물은 과연 마음에 쏙 들었다.       

다음 날, 나는 현지 병원에 잠시 입원을 할 지경으로 몹시 아팠다. 무언가를 잘못 먹었는지 배탈과 고열에 시달렸고 며칠간을 끙끙 앓았다. 병실 천장에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고. 반수면 상태에서도 나는 정글 속에 방치되다시피 한 작은 사원 따네이를 향해 걸어갔고 아무도 가지 않는 앙코르톰 동쪽 문을 향해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그랬다. 나는 시엠립을, 앙코르와트를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     


자꾸만 커지는 마음의 얼룩 

앙코르와트 여행안내서는 이전의 다른 책들보다 취재, 집필 기간이 길었고 수정 과정도 여러 번 거쳤다. 게다가 의도치 않게 출간 일정이 뒤로 미뤄지면서 책을 준비하기 시작한 시일로부터 네 번의 여름을 거쳤다. 두 번은 한국에서, 다른 두 번은 캄보디아에서였다. 그 여름들이 죄다 촘촘하게 붙어있어서 내 체온도 정신도 더위를 식힐 틈이 없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도 여백이 없었다. 개인적 감정은 걷어내고 그야말로 ‘팩트’만 적어 내려가는 여행안내서임에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사원 하나 길 하나에 내가 보고 느낀 경험을 토대로 의미를 두기 시작하면 문장에 욕심이 붙었다. 제한된 분량 안에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고 실용적으로 담으려면 욕심을 버려야 했다. 그러다 보니 문장 한 줄을 적는 일이 쉽지 않았다. 책에 언급하는 장소 한 곳 한 곳을 가볍게 쓰지 못했다. 키보드 위에 올린 두 손이 무거웠다. 시엠립에서부터 손등 위에 돌기둥이라도 이고 온 것처럼. 홍제동 시절, 머리 위에 얼음주머니를 얹고 원고를 썼을 적처럼 무덥고 힘든 여름날을 보냈다. 에어컨을 켜면 더위는 금세 가셨지만 마음에는 바람 한 점 일지 않았다. 머리로는 힘을 빼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어떻게 힘을 빼야 하는지 몰랐고 힘을 뺄 여유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그게 다 내가 시엠립을, 앙코르와트를 너무 사랑하는 탓이라 생각했다. 아니, 실로 그랬다.  



종종 원고가 풀리지 않을 때 나는 EDM과 같이 비트가 느껴지는, 고막을 꽉 채우는 듯한 전자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멍하니 있곤 했다. 눈을 감고 여름밤의 음악축제에 왔다고 상상을 하면서 리듬을 타기도 했다. 그러고 있으면 수년 전 한참 유흥을 즐기러 다닌 때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무렇게나 추던 춤, 주량도 모르고 마시던 술, 조명 아래 낯선 남자들의 얼굴들…. 어떤 이유에서건 그때도 힘들었고 지금도 힘든 건 매한가지 같은 데 그때의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에서 솟아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만 밤마실을 그만둔 이후로도 오랜 시간 소위 ‘클럽 음악’을 들으며 스트레스를 풀곤 했는데 앙코르와트 원고는 시끄러운 음악마저 거부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가진 에너지가 밖으로 분출되지 않고 안으로 수렴한다고 느꼈다. 갑작스럽게 찾아왔던 불안 증상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철저하게 홀로였던 숱한 사원들에서의 시간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떤 강력한 동기가 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내 안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동안 즐겁게 다니던 스피닝(음악에 맞춰 안무를 하며 페달을 굴리는 실내 자전거 운동)을 그만두었다. 언젠가부터 귓전을 때리는 음악 소리가 신경에 거슬릴 만큼 시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때는 묘한 설렘마저 전해주던 ‘쿵쿵’ 거리는 베이스음이 한낱 소음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대신에 깊은 호흡과 명상을 제대로 하고 싶어 졌고 자연스럽게 요가에 관심이 갔다. 그러나 우선은 책이 완전히 출간될 때까지 오롯하게 원고 집필에 집중하고 싶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책의 말머리까지 썼을 때 나는 완전한 번아웃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탈고를 마쳤다. 이후 만난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는 마치 대단한 선언이라도 하듯 이제 쉴 거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고 떠벌렸다. 그러면 사람들은 “너 그 얘기 3년 전부터 했어. 제발 좀 쉬어”라고 말했다. 나는 정말 쉬고 싶었다. 사람들 귀에 대고 ‘휴식 결심’을 하는 까닭도 결국은 나 자신을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일단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나면 허풍쟁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실천으로 옮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쉬는 것만큼은 말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돈이 없었으니까. 몇 년을 쉬지 않고 일할 것 같은데, 언제나 취재를 하고 원고를 썼던 것 같은데 내겐 돈이 없었다. 봉천동에 온 이후로 이제는 추위에 손이 곱는 일이 없다고, 더위에 머리에 얼음주머니를 얹을 일이 없다고 좋아했지만 지갑 사정은 달라진 바 없었다. 아니, 천장의 얼룩과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바퀴벌레들, 세면대 없는 화장실을 보면서 가난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랬으므로 쉴 수 없었다. 바퀴벌레가 나오는 집이라도 다달이 돈을 내야 했다. 그래야 내가 살았다. 


무더위가 한층 꺾인 8월 말. 드디어 책이 출간되었다. 봉천동 집으로 작가에게 기증하는 20권의 책이 도착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가장 설레었을 순간에 나는 그만 울적해졌다. 왜인지 모를 짙은 허무함이 밀려왔다. 두렵고 아프고 힘들었던, 충만하고 평화롭고 행복했던 그 모든 순간들에 대한 결과물이 너무나 단정하고 말끔한 300여 페이지의 책으로 탄생했다. 보람차고 기뻐해야 마땅한 순간에 서러운 감정이 앞섰다. 책 표지를 열어보기조차 싫었다. 겨우 이걸 만들려고 네 번의 여름을 그토록 힘겹게 보냈던가. 그 누구도 그 책이 엉망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만든 책이 분명했는데 밑도 끝도 없이 밀려드는 허무를 스스로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 허무를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애인에게 이별통보를 받고 실연한 사람처럼 망연자실했다. 책이 담긴 상자를 방구석에 밀어 두고 침대에 누웠다. 다시금 눈앞에 얼룩. 푹 꺼진 베개에도 천장의 것과 닮은 얼룩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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