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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혜 Nov 13. 2019

여행작가의 진짜 여행 (3)

네 번째 방, 바간 

멀리 봐야 좋은 것

내가 묵은 바간의 첫 번째 호텔에서는 투숙객에게 자전거를 빌려줬다. 애당초 자전거를 빌릴 예정이었으므로 작은 행운처럼 느껴졌다. 바간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기어도 없는, 바구니가 달린 시티 바이크는 바퀴의 휠조차 얇고 약해보였다. 공짜 자전거에 무슨 토를 달까. 그래봤자 펑크 밖에 더 날까 싶은 심정으로 두 발에 힘을 주고 평원으로 나아갔다. 미얀마 여행을 결심한 동기 중에는 바간의 평원과 그 위의 불탑, 사원 사이를 자전거로 누빌 기대가 큰 부분을 차지했다. 앙코르와트 유적 일대를 자전거로 돌아봤던 지난 기억이 기대를 높였다. 그늘도 없는 땡볕 아래서 자전거를 타는 건 고역이지만 이른 아침과 늦은 오후의 유적지 하이킹은 기분이 좋다 못해 몽환적이기까지 했다. 


시엠립과 바간은 완전히 다른 곳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인도차이나 반도에 존재한 왕조의 도읍이라는 점에서 공유하는 감성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두 바퀴를 굴려 돌아본 느리게 돌아본 바간은 예상했던 대로 비슷한 느낌이 있는 한편 완전히 낯설고 새로운 도시였다. 시엠립의 사원들은 개개의 사원들이 독자적인 세계로 존재하는 느낌이고 그만큼 폐쇄적이고 엄숙한 분위기의 공간이 많은 편이다. 그에 반해 바간의 불탑과 사원들은 부속건물 없이 단일 건물로 존재하고 일부 대형 사원을 제외하고는 그 규모와 형태가 엇비슷하다. 

그래서 개별적인 존재라기보다 큰 합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느낌이 강하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시엠립의 사원들은 가까이 볼수록 경이로운 디테일의 아름다움이 있고 바간의 사원들은 멀리, 전체를 볼 때 감탄이 나오는 원경의 아름다움이 있다. 바간의 밀림은 시엠립보다 덜 우거지고 대지는 보다 평평하다. 그래서 어떤 길을 택하든 활짝 열린 느낌이고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도 점점이 흩어진 사원들이 어느 한 곳 돌출되지 않고 조화롭게 어우러진 풍경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사원 한 곳 한 곳을 돌때에, 나는 마치 서로 간격을 둔 별들 사이에 선을 그어 별자리의 형태를 잡아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어디를 어떻게 도냐에 따라 별자리가 달라졌다. 


호텔은 바간 유적군의 동북쪽 번화가인 냥우의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어서 일정을 시작하는 출발지로는 아주 훌륭한 위치였다. 또한 주요 사원들로 향하는 길이 바간의 메인 도로라 도로 양 쪽으로 파야로 불리는 불탑과 사원들이 포진해 있고 길을 곧장 따라가면 바간의 신시가지라 할 수 있는 뉴바간 지역에 닿을 수 있다.       

나는 가까운 사원들부터, 혹은 즉흥적으로 가고 싶은 사원들부터 하나씩 돌아보았다. 사원 하나 하나에 관심이 있어 둘러본다기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지리를 눈에 익히기 위함이었다. 멀리까지 페달을 굴려 나가도 돌아오는 길을 알고 곧 어둠이 내려앉을 석양녘의 사원에서 조급해하지 않는 여유를 갖기 위해서였다. 취재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바간 왕조의 내력과 각 불탑과 사원의 특징을 외우고 언제, 어떤 각도에서 사진을 찍을까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부담을 내려놓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카메라도 두고 왔고 자료 조사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발 닿는 대로, 마음 편하게, 욕심 없이 다녀야지 속으로 여러 번 다짐했다. 


첫날은 냥우와 올드 바간 중간에 있는 한적한 파야 두어 곳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미얀마에서는 불탑과 사원을 파야(Paya)라고 통칭한다. ‘살아 있는 부처’를 뜻하는 미얀마어라고 한다. 파야는 포괄적인 의미여서 건축물 뿐 아니라 승려를 지칭할 때도 쓴다. 파야가 눈앞에 등장할 때마다 페달 밟기를 멈췄다. 이번에도 부처님의 공간을 여러 번 빌렸다. 나는 무교지만 그간 절과 성당 등 숱한 종교 건축물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어왔다. 그 중에서도 불교 사원은 압도적이다. 신전을 무람없이 드나들고 가끔은 졸기까지 했으니 부처님과 신자들에게 진 빚이 많다. 빚이라고는 하나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는 빛이다. 


나는 다만 첫날 우빨리 떼인(Upali Thein)이라는 검은 석조 사원에 갔다가 실내에서 그림을 파는 상인에게 몇 마디의 한국어를 가르쳐줬다. 그가 먼저 ‘뷰티풀’을 한국어로 뭐라고 하는지 물어왔다. 바간을 여행하는 한국인이 점차 느는 추세니 호객을 위한 한국어 몇 마디가 필요했으리라. 그는 ‘굿(Good)’과 ‘칩(Cheap)’도 물어봤다. 아름답고, 좋고, 저렴한 것. 나는 실로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숱하게 공짜로 누려왔다. 무임승차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누군가 돈 들지 않는 도움을 요청할 때 기꺼이 도와주는 것. 그는 이제 한국인들이 사원을 드나들 적마다 “예뻐요, 좋아요, 싸요”를 말할 것이다. 누군가에겐 반가울 수도, 성가실 수도 있는 말이겠다. 오래 전 시엠립의 뚝뚝이 기사, 롬비볼이 떠올랐다. 


첫 날의 일몰은 사원이 아닌 작은 호수변 야트막한 언덕에서 바라봤다. 호텔 직원이 일몰보기 좋은 장소라며 알려준 곳이었으나 바간의 주요 일몰, 일출 전망대라기에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흙을 쌓아 제방처럼 만든 둔덕은 그리 높지 않고 앉을 자리도 마땅치 않아서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다소 어정쩡한 상태로 해가 지는 쪽을 바라보아야 했다. 언덕 아래 해 저무는 들판 위로 언덕 아래로 수십 마리의 소떼가 목동을 따라 이동하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일몰 시각이 다가오자 대형 버스들이 차례로 들어와 그룹 관광객들을 내려놓았고 언덕은 일순 소란스러워졌다. 

별 것 없어 보이는 언덕이 붐비는 이유가 있었다. 최소 2층 이상의 사원들, 특히 계단이 있어 상층부로 오를 수 있는 사원들의 출입이 금지된 까닭이었다. 내가 바간을 찾은 해의 직전 년도까진 일출과 일몰을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서 보려는 여행자들이 자유롭게 사원을 오르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가끔씩 추락 사고가 일어나고 일부 사원들은 훼손이 심해 정부에서 대부분 사원들에 관리인을 두고 엄격하게 상층부 출입을 금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00% 모든 사원과 불탑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규모가 큰 일부 사원과 변방의 작은 파야들은 상층부 출입이 가능하다. 물론 상층부 출입을 할 수 있는 사원이라고 해서 모두 전망이 좋은 것도 아니고 올라갈 수 있다 해도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거나 밖으로 나가는 문이 잠긴 경우도 더러 있다. 그래서 내가 바간에 머무를 당시 여행자들에겐 주요 과제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일출과 일몰 전망이 좋은, 올라갈 수 있는 사원’을 찾는 것이었다. 나 역시 이 흥미로운 미션에 도전했다. 




19층의 서울 

아주 낮거나 아주 높거나, 그게 아니라면 아주 좁거나. 반지하층, 옥탑방, 그리고 고시원을 말한다. 내가 서울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의 보기는 크게 세 개로 나뉘었다. 나는 약간의 운과 타협을 거쳐 반지하층과 옥탑방이 아닌 ‘201호’의 방을 구할 수 있었다. 홍제동과 봉천동 모두 다세대주택의 2층 첫 번째 방이었다. 고시원 역시 가장 넓은 방에서 살았으니 진정한 ‘스탠다드형 고시원방’은 경험하지 못한 셈이다. 대신 감수해야 하는 것들은 반드시 따르기 마련이어서 두 곳의 201호는 모두 가파른 언덕이나 계단을 올라야 했다. 

얼음주머니로 여름을, 핫팩으로 겨울을 나면서 201호가 이 정도라면 옥탑방의 더위와 추위는 얼마나 굉장한 것일까 내 자신을 달랬다. 장마철이면 얼룩이 번져가는 천장을 보면서도 침수 걱정 안 해도 되는 201호라 얼마나 다행인가, 바가지로 물을 퍼냈다던 반지하방 옛 애인을 떠올렸다. 분명 201호라 좋은 점이 있다고, 사방이 건물이지만 한 줌의 볕, 손바닥만 한 하늘을 접하는 게 어디냐고. 그렇지만 201호로 가는 길에서 나는 여러 번 미끄러졌다. 길이 미끄러워서, 발을 헛디뎌서, 높은 하이힐을 신어서…. 이유는 다양했지만 길이 가파르지 않았다면 넘어질 리 없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바지런히 걸어 201호에 올라오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가쁜 숨이 싫어서 아주 천천히 걸은 적도 많았다. 


그렇게 숨찬 길이면 목적지에 닿았을 때 멋진 전망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언덕 끝 201호 창문 밖은 오로지 옆집의 붉은 벽돌벽뿐이었다.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옥탑방 거주자들의 아름다운 도시 전망은 말 그대로 드라마 속에만 존재했다. 그 근사한 전망을 눈앞에 두고도 “저 많은 집들 중에 내 집이 없다”고 푸념하는 주인공들의 대사가 얄밉게만 들린다. 탁 트인 전망을 보려면 일부러 전망대를 찾거나 고층건물 꼭대기층의 레스토랑이나 바를 찾아야만 하는 나로선 때때로 야경을 내려다보며 캔맥주를 따는 옥탑방 거주자들이 부럽다. 집을 오가려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르는 조건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시골서 자란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서울은 19층에서 내려다본 풍경이었다. 큰아버지댁은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에 있는 20층짜리 아파트 19층이었다. 거실 베란다에 서면 동작구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도시가 도시임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시간은 낮보다 밤이었다. 시골 부락 맨 끝 집에 사는 내게 밤은 어둠 그 자체여서 수천 개의 불빛으로 반짝이는 밤은 꿈같은 풍경이었다. 어린 나는 베란다가 전망대인양 발을 놀리다가 큰어머니가 기르시던 난초 화분을 깨뜨렸고 집에 오는 길 엄마한테 꾸중을 들었다. 1994년 12월 24일의 일기에 나는 19층의 서울 전망을 이렇게 적었다. 


‘도시 한 군데 빠짐없이 대낮처럼 밝게 가로등 불길로 휩싸였다. 어머니께서 멋있다면서 감탄하셨다. 시골은 캄캄한 밤이지만 도시는 모두 불빛이다. 새벽 1시가 되었는데도 환했다. 여기 시골도 도시처럼 환했으면 좋겠다.’


봉천동 집은 내게 서울전망대로 통했던 큰아버지댁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지금은 큰아버지가 다른 곳으로 이사하셔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봉천동 집이 멀찌감치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큰아버지댁 가까운 곳에는 ‘태양의 집’이라 불리는 건물의 옥상 놀이공원이 있었다. 나는 사촌언니를 따라 그곳에 두어 번인가 갔다. 육중한 상가 건물의 외부 경사로를 따라 옥상으로 올라가면 그곳에는 아이들이 타는 범퍼카와 미니 바이킹, 꼬마기차와 같은 놀이기구가 있었다. 태양을 닮은 둥근 창이 돋보이는, 삼각 꼴의 독특한 벽돌건물이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로 꼽히는 김중업의 작품인 것은 성인이 된 이후에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다. 놀이공원이라고 하면 당시 부모님과 함께 갔던 ‘자연농원(현재의 에버랜드)’ 밖에 모르던 나로선 도심 속, 그것도 건물 옥상 위의 놀이공원은 가히 문화 충격에 가까운 것이었다. 1930년대 미쓰코시 백화점의 옥상 정원을 처음 방문한 경성인들이 느꼈을 감정과 비슷했을까. 


그러니까 9살의 나에게 서울은 꿈의 도시였다. 

20년 뒤의 마주할 서울의 창밖이 벽으로 가로막혀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순수의 시기였다.        

          



846호 사원을 찾는 여정

내가 만난 미얀마 사람들은 대부분 웃음이 많고 친절했다. 숱한 여행기에서 해외에서 만난 현지인들을 묘사할 때 단골처럼 등장하는 빤한 표현이다. 도대체 지구상에 친절하지 않은 현지인들은 과연 존재하는가 싶지만 진실로 미얀마인들은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다정했다. 846호 사원을 알려준 이도 미얀마인이었다. 도로변에 자전거를 세운 채로 지도를 골똘하게 보고 있던 내게 다가와 어디를 찾냐고 물어온 한 남성은 일몰을 볼 수 있는 사원의 위치와 번호를 알려줬다. 뿐만 아니라 일명 레고 불상으로 알려진 벽돌 불상이 안치된 딴도짜 파야로 안내해주기까지 했다. 나는 끝까지 정보를 주는 척, 어떤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의 촉을 곤두세웠는데 그는 정말로 친절만 베풀고 가던 길을 갔다. 그 덕분에 사원 찾기 미션은 더욱 흥미로워졌다. 846호 사원을 찾기 위해 거의 이틀 간 평원 구석구석을 훑었고 그러면서 평원의 지리를 눈에 익히고 가이드북에서 추천한 주요 사원들을 우연히 마주했다. 그 여정은 마치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잃어버린 필름 한 조각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난 주인공 월터를 떠올리게 한다. 목적은 필름 한 조각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필름보다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식상하다. 그러나 여행도 삶도 결국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 ‘정수’가 있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새삼 일깨운다.    


물론 순수한 의도로 사원을 안내해주는 착한 미얀마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숨겨진 사원’을 알려주겠다며 환심을 산 후 이미 유명한 일몰, 일출 포인트로 데려가서는 막무가내로 그림을 강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속지 말라는 정보를 이미 알고 있던 터라 앳된 한 소년이 다가와 올라갈 수 있는 사원을 소개해준다고 했을 때 나는 그림 한 점 사겠다는 마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소년은 자신의 형이 그렸다는 모래 그림을 보여줬다. 천위에 아주 고운 입자의 검은 모래로 명암을 표현한 승려의 모습이 담긴 작품이었다. 어차피 사려고 마음먹었던 그림이었는데 흔하게 봤던 페인팅 그림이 아니어서 작은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사원도 내가 지난 적 없는 새로운 곳이었는데 다들 화가를 따라온 것인지 이미 상층부에는 앉을 자리 없이 사람들로 빽빽했다. 사원 아래에 그림을 팔려는 상인들이 북적댔다. 다들 나처럼 속아도 그만하는 마음으로 따라온 것일까. 일부 사람들은 가파른 지붕 위에 올라가 있었다. 담력이 대단했다. 아래서 본 사원은 서쪽을 바라보고 앉은 사람들이 상층부 전체를 다 덮고 있는 모습이어서 어쩐지 기이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그 사원이 846호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파야가 드물게 자리한 평원 위를 지나다 난간이 없는 기단 가장자리에 한 남자가 서 있는 풍경을 보았다. 어쩌면 846호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의 좁고 가파른 계단은 키가 160cm 밖에 되지 않는 나도 몸을 잔뜩 움츠려 오를 수 있었다. 빛을 따라 계단 밖 입구로 나왔을 때 나는 놀라서 나직한 비명을 질렀다. 


더 이상 발을 딛을 자리가 없었다. 

속이 비어있는 건물이었다. 


그러니까 외벽으로만 이루어진, 사각의 케이크틀과 같은 건물이었다. 너무나 안정감 있게 서 있던 그 남자는 고층건물 난간을 아무렇지 않게 뛰어다닌다는 도시 곡예 파쿠르(Parkour)라도 하는 사람인걸까. 기단으로 올라서지도, 올라왔던 계단을 내려가지도 못하는 나를 발견한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내가 어깨에 메고 있던 작은 가방을 그가 자연스럽게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내 손을 쥐었다. 뿌리처럼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나를 믿고 올라와. 남자가 나를 끌어올렸다. 기단 위에서 나는 그에게 의지한 채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기단 위를 걸었다. 평균대를 걷는 듯 했지만 실수를 하면 뼈가 부러져도 당연한 높이였다. 멀리 지는 해는커녕 내 두 발에서 시선을 뗄 수 없는 이곳에 내가 붙어있을 이유가 있다면 기꺼이 내 손을 잡아준 남자 때문일 테다. 국적을 묻지 않았지만 외양과 억양으로 짐작하컨대 미국인일 듯했다. ‘어쩌면’이라는 묘한 기대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순간, “베이비”하고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에도 앉을 공간은 없어 보였던 난간에 ‘사각지대’가 있었다. 유난히 볼록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여자는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눈빛엔 경계심이 분명했지만 힘주어 올라간 입매는 웃고 있었다. 안녕, 나랑 베이비랑 사진 좀 찍어줄래? 그녀에게 조심스레 핸드폰을 건네받고 그들을 향해 ‘원투쓰리’를 외쳤다. 여자는 투에 남자의 입에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나는 아주 분명하게 이곳이 846호가 아님을 알았다. 


사원에 부여된 번호까지 있음에도 특정 사원을 찾는 일이 까다로웠던 이유는 숫자가 아라비아 숫자로 쓰이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미얀마는 고유의 숫자 표기법이 따로 있다. 또 사원에 적힌 숫자를 찾을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나는 오히려 쉽게 찾을 수 없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는데 한낮의 열기를 정수리로 받아들이며 흙먼지가 날리는 길을 정처 없이 돌 때면 846호 사원은 파랑새나 신기루쯤 되는 존재가 아닐까 의심했다. 


846호라 확신한 사원은 쓰레기가 더미로 버려진 길가를 지나 정강이까지 오는 가시나무밭을 100m쯤 걸어야 하는 곳에 위치했다. 거칠고 험난한 길 끝에 유배당한 백작처럼 외롭고도 고상해 보이는 사원. 아주 크지도, 또 아주 작지도 않은 3층 규모의 건물 앞에는 이미 전기바이크 서너 대가 세워져 있었다. 곧 2층 테라스에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846호가 확실했다. 나는 내가 오늘 846호의 유일한 방문자가 아니라는 아쉬움이 드는 한편 공동의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동지들이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앉을만한 자리를 찾으면 일몰녘까지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시나무들을 요리조리 피해 사원에 무사히 닿아 단숨에 2층으로 올랐다. 손가락 한마디만 하게 보였던 사람들은 모두 나보다 키가 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저마다의 카메라로 자신을 찍고 있었다. “여기는 바간이고요, 저는 지금 인적 없는 사원에 올라와 있어요.” 짧은 핫팬츠에 잘록한 허리를 드러낸 오프숄더 티 차림의 라틴계 여성 둘과 키가 큰 금발의 백인 남성이 함께였다. 나는 그들에게 웃으며 인사했고 (나중에 든 생각이지만) 조금 푼수처럼, 여길 얼마나 힘들게 찾았는지 덧붙였다. 여자들은 치아를 보이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돌이켜보니 ‘마지못한’ 미소였음을 알겠다. 

어색한 온도를 감지한 내가 “유튜브 영상을 찍는 중이구나”라고 알은체를 하자 그들 중 흑발의 여자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난 아무 말도 안했는데”라고 했다. 나는 그만 귀가 뜨거워졌다. 

곧이어 그들은 사진을 찍어야 하니 내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다. 그렇게나 따가운 5음절의 ‘익스큐즈미’는 처음 들었다. 기분이 언짢아진 나는 최대한 그들로부터 떨어져 2층 테라스를 한 바퀴를 돌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상에 자신들 외에 그 누구도 찍히길 바라지 않는 것이었다. 2층을 오를 수 있는 이 외딴 사원을 발견한 사람들은 오로지 그들이 되어야 할 테니까. 적당히 앉을 자리를 찾아 일몰을 기다리려 했던 내 계획은 무산됐다. 어떻게 해도 그들의 프레임을 피하긴 어려워 보였다. 그들은 멀찍이 앉은 나를 향해 두 번이나 익스큐즈미를 외쳤다. 그들을 무시하고 자리를 지키기엔 이미 불쾌한 기분이 쉬이 풀어질 것도 같지 않았다.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나는 침입자이고 불청객이었다. 내가 힘겹게 찾은 846호를 점거한 저자들은 누군가? 누구긴, 그 잘난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이다. 사원이 마치 자신들의 소유인양 구는 그들에게 나는 “이게 너희 소유니?”하고 톡 쏘아주지도 못한 채 내려왔다.

내가 사원을 빠져나오자마자 그들이 기다렸다는 듯 드론을 날렸다. 나를 향해 내리꽂히던 기둥 뒤의 시선들이 단지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드론을 날려 상공에서 부감을 찍을 때 사원 위에는 오롯하게 자신들만 보이길 바랐을 것이다. 내가 사원에 당도했을 때부터 저들은 내가 사원을 떠날 때만 간절히 기다렸을 것이다. 드론이 웅웅 소리를 내며 사원 주변을 돌았고 그들은 드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촬영된 장면은 그들 영상 인트로에 삽입될 것이 분명하다. 

크리에이터들이란 어떻게든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 직업 같았다. 외딴 사원을 발견한 기쁨도, 사원에서의 평화로운 시간도 그들의 무자비로 누리지 못했다. 그뿐인가. 내 책이 잘 팔리지 않는 까닭도 그들의 영상 탓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가이드북 대신 스마트폰에서 정보를 얻으니까. 적잖은 지인들이 어차피 책을 위해 다니는 취재라면 영상 촬영도 겸해서 유튜브에 올리라고 했다. 그때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책을 위한 취재만으로도 버겁다고. 그 말이 영 틀린 건 아니었지만 나는 애당초 영상에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든 종이책을 잘 만들고 싶었고 그 간절함과 성실함이 통해서 책이 잘 팔린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사진술이 공인된 19세기, 화가들의 상실감을 떠올린다. 나는 어쩌면 증명사진을 초상화로 대신하겠다는 고집을 피우는 것은 아닐지. 그러나 나는 쓰고 싶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감정이 아닌 실용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로 종이책을 선택한다는 건 바보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문학서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나여서, 나는 다만 내가 두발로 걷고 보고 느꼈던 것들을 적는다. 행간마다 걸음이 있기를, 종이책을 넘기는 속도로 천천히 느긋하게 여행하기를, 그런 고집이 있었다.       

그 고집이 나를 이렇게 가난하게 만들었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더 이상 846호 사원을 찾지 않기로 했다. 종전처럼 마음 가는 대로 페달을 굴리기로, 높은 곳이 아니라 그저 엉덩이 붙이기 좋은 한적한 자리를 찾아 앉기로, 호텔을 나서던 첫날의 아침처럼 목적지를 두지 않기로 했다.   

아차, 그러고 보니 내동생도 크리에이터였구나. 9평의 작은 공간에서 동생이 방송하는 시간 동안 요의를 느끼며 숨죽이고 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아무도 모르지만 누구나 아는 익명의 이웃들 

전형적인 90년대식 반투명의 덜컹이는 창문을 열면 옆집의 붉은 벽이 시야를 채웠지만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참으로 다양한 소리가 들려왔다. 오전에는 피아노 소리가 자주 들렸다. 소리의 진원지로 추측컨대 복권아파트 2~3층의 어떤 방에서 하루에 한 시간 정도씩 연습 혹은 레슨이 이루어지는 듯 했다. 연주는 자주 끊기고 완주를 하더라도 중간 중간 멈춤이 있었다. 악보를 헤매는 눈길, 망설이는 손가락들을 귀로 보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숱한 주저로 이루어진 피아노 연주가 좋았다. 능수능란한 피아노 연주였다면 그 음악을 라이브 연주라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 창문을 열고 음원을 재생하며 스피커 볼륨을 크게 키워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 막 초보를 벗어난 아마추어 피아노 연습생이 사는 곳. 그래야 우리 동네답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동네를 불완전하고 거친 것, 낡고 오래된 것으로 규정짓고 있었다. 


가끔 창문 안으로 담배 연기가 흘러들기도 했다. 내가 사는 다세대주택과 거의 쌍둥이처럼 흡사한 맞은편 주택 사이 틈에 서서 담배를 피우는 소년들이 있었다. 연기가 곧장 창문으로 올라왔는데 나는 그 조무래기들에게 뭐라 한마디 못하고 물끄러미 그 애들을 쳐다봤다. 그 애들이 저돌적으로 나오면 어쩌지 걱정하면서도 어떻게든 여기 너희 때문에 불쾌한 사람이 한 명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다행히 그 애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서둘러 담배를 끄고 다른 골목으로 사라졌다.


김치찌개나 라면 냄새가 흘러드는 날에는 냄비물을 올렸다. 곧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 나도 같이 그릇을 닦았다. 한여름 늦은 새벽이면 주로 여성의 교성으로 이루어진 통정 소리가 흘러들기도 했다. 아마도 같은 건물 1층 혹은 반지하층이리라.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나 리처드 도리슨의 『이기적인 유전자』와 같은 대중 과학 분야의 스테디셀러를 펼치곤 했다. 시루떡처럼 복잡다단한 동네에서 먹고 싸는 생명유지 과정을 제외한 가장 우주적인 일은 아마도 섹스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규정한 ‘동네 이미지’답게 경찰차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경찰의 중재가 필요할 정도의 싸움은 게릴라 콘서트급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다세대주택, 아파트 할 것 없이 주민들이 죄다 창문을 열고 싸움 구경을 했다. 관전 중 “시끄럽다”고 소리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구경거리가 됐다. 개중에는 본격적으로 싸움판에 뛰어드는 이도 있었다. 자주 시비가 붙는 이유로는 주차문제가 가장 컸다. 좁다란 골목에 차 세울 자리가 변변치 않기도 했지만 복권아파트 입구의 경비원은 주차문제에 특히 예민해서 거주자가 아닌 사람이 아파트 입구 근처에만 주차를 해도 일단 고성부터 내고 봤다. 단순히 길을 오가다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는 이유로, 아파트 재개발 위원회에서의 입장 차이로, 혹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유로 취기에 기탁해 벌이는 싸움도 있었다. 


그중 제일은 새벽의 고요를 깬 한 남자의 ‘원맨쇼’였다. 새벽 2시쯤이었을까. 남자는 커다란 막대기를 들고 누군가의 집 현관문을 강하게 두드렸다. 두드린다기보다 거의 문을 부술 지경이었다. 그는 문을 때리면서 절규에 가까운 주정을 했다. 세상에 대한 맹목적 비난으로 들렸는데 특히 대통령에게 저주를 퍼붓다시피 했다. 곧 경찰이 왔지만 그는 문을 부수는데 성공해 이미 집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곤 집안에 불을 켜고 고성을 질러댔다. 남자가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다시 봉쇄했기 때문에 출동한 경찰은 밖에 선 채 무전기로 ‘지원 요청’을 거듭했다. 잠옷 바람으로 등장한 건물 주인은 다행히도 그 집이 남자 본인이 혼자 사는 집이라고 했다. 자신의 집에 들어가려고 그 난리를 쳤던 모양이다. 결과적으로 경찰차가 다섯 대나 출동했고 경찰들은 우르르 집 밖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치안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할 테지만 열댓명의 경찰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밖에서 동동거리는 모습을 보자니 구경꾼 주제에 ‘답답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남자는 집안 창가에 서서는 여전히 ‘대한민국’을 욕하고 있었다. 그는 국가로부터 어떤 상처를 입었기에 늦은 새벽 경찰과 대치를 벌이고 있는가. 대치를 벌이다 결국 경찰에게 끌려나온 남자는 에잇 시펄하면서 마지막 발악을 하듯 경찰차의 백미러를 발로 찼다. 

사흘 뒤쯤 그 남자를 골목에서 봤다. 그 난리를 피우고도 훈방 조치 된 것일까. 내가 사는 201호 현관 밖이 남자의 소란을 가장 자세히 볼 수 있는 위치였기에 나는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동네의 많은 눈이 지켜본 새벽의 소동이었으나, 벌건 대낮, 남자는 익명의 얼굴로 집 앞을 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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