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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혜 Apr 23. 2020

바람이 찼고 부패한 기억이 떠올랐다

4월 22일 

바람이 어찌나 매섭던지 11월 말 정도로 느껴졌던 하루. 사야 할 것을 잊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들로 장바구니를 채워선 서둘러 들어왔다. 동생이 주문한 토막닭, 양상추를 샀으니 아주 무용하지만은 않았던 시간이었다. 찬바람 때문이었나 무엇때문이었나. 거의 25년만에.. 어딘가 구석자리에 있던, 아주 부끄러운 기억 하나가 갑자기 떠올라서 오후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한동안 무언가에 집중하지 못할 정도로. 


서른 살 이후로 과거의 일들이 불쑥 떠올라 울적해질 때가 왕왕 있다. 시작은 아마도 2016년 즈음... 무엇이 트리거가 됐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죄책감으로 어제는 분노로 불현듯 찾아드는 기억들. 그 기억들이 현재였던 시절에는 그 사건 혹은 그 기분이 아주 일시적인 것, 그래서 나중엔 기억조차 나지 않을 일상의 한 조각처럼 대수롭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존재한 적 없었던 시간처럼 어떤 연상작용에도 불식간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젠 '떠오를 때'도 됐다며 잔뜩 부패해서는 훅, 떠오른 기억들이 커다란 덩어리로 묵직하게 내려앉아 정신을 옭아맨다.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선호하지 않는데(이유는 모르겠다. 너무 범람하는 단어라?) 이것이 트라우마라면 트라우마겠다. 그렇다면 당시 나는 대수로운 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인가. 그걸 내 예민한 '뇌'가 어머, 주인님 이건 소장감이네요 하고 주인도 모르게 저장. 

오늘, 거취를 알 수 없는 한 사람의 안부가 궁금했다. 나는 이제야 부패한 기억을 건져 올렸는데,  어쩌면... 그 친구에게는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악취같은 기억일 수도 있겠구나, 까지 생각이 미치니 참담했다.  

    

과거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해왔다. 머릿속에 지우개가 들어서 글을 써서 기록하는 직업을 택했나 싶을 정도. 물론 내가 의식하든 못하든 수많은 어제들이 오늘을, 또 내일을 촘촘하게 연결해나감을 여러 경험을 통해 확인했다. 마치 우연같지만 우연이지 않은 것들. 좋은 것들은 대체로 그렇게 포장했다. 과거 내 의지대로, 내가 좋아서 한 소소한 행위가 현재의 나를 지탱하는 기반이 되었다는 식의...  

그러면서 부정적인 기억들은 내 자신도 모르게 암매장을 시켰나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부패의 징후가 공황장애와 걷잡을 수 없는 분노, 슬픔으로 돌아왔다. 암매장한 줄도 몰랐으니까 '원인불명' 처리. 그러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불현듯, 갑자기, 아! 

이제와 남을 탓할 수도 없게 되었는데 불행히도 그 기억들은 온통 현재 내게는 '없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가혹하다. 단순히 기억력이 없다고 여겼는데 내 뇌는 주인도 모르게 컨트롤 에스. 지금 나는 뇌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컨트롤 브이. 말그대로 몸은 기억한다. 


정신없이 흘려버린 지난 시간들이 10년, 20년이 지나고서야 강렬한 기억으로 떠오르는건 왜 일까. 그래서 현재의 나를, 오늘을 완전하게 지배하는 이유는 뭘까. 현재의 내가 뇌에 입력하는 정보들이 시시해서? 그래서 과거 저장소로부터 '끌올'하는건가. 더이상의 암매장이 없길. 마흔 중반의 내가 절망하지 않도록. 

  

브런치에 묶어둔 '울기엔 내 방이 좁아서'는 그렇게 왕왕 떠오른 기억들로 써내려간 기록이었다. 부끄럽고 참담한 기억의 알맹이들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좁은 방과 낡은 여행지들을 앞세웠다.  

거기에 브런치 출간 프로젝트에 응모하느라 제목도 참 ... 너절하게... 시류에 맞춰 지었으니... 이건 뭐랄까. 종류가 다른 과자들의 부스러기를 한바탕 모아놓은, 버리기도 뭣하고 먹기도 뭣한 글들이 되었달까. 


오늘도 원고는 얼마 쓰지 못했다. 한심하다. 밥을 많이 먹어서 더부룩했다. 역시 한심하다. 자책하다 방치된 브런치를 찾았다. 연필로는 시를 베껴 쓰고 키보드로는 하루를 정리하기로 했다.   




모든 하루가 역광이어서 세상의 사물들이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보였다 

하찮았다 사진을 찍어도 나오지 않았다 - 김이듬, <역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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