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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혜 Apr 24. 2020

모든 욕망이 혀 끝에 닿아있다  

4월 23일

소설 습작을 하던 때(벌써 8~9년이 흘렀다)에 지금은 등단한 문우가 내게 그런 말을 했다. 왜 네 소설 속 사람들은 욕망이 없는거니? 욕망이 없어서 갈등도 없고 고민도 없는 사람들. 나는 아마도 말간 표정을 짓고는 글쎼요, 저는 그 사람들이 경계에 있음을 표현하고 싶었거든요 라고 말했다. 문우는 잠시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더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열살 무렵 처음 기승전결이 있는 글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배웠다. 그것은 글쓰기에 대한 본질이라기보다는 글짓기 대회에서 수상할 수 있는 요령에 가까웠다. 그 나이에 본질을 운운하는 것도 우습지만, 소설 일 포스티노의 네루다와 마리오가 나눈 대화처럼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깨달음이 있었더라면 글을 쓰는 태도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막연히 생각한다.  그러니까 '왜 일기를, 편지를 쓰는가'로부터  출발한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물음들이 있었더라면. 해서 첫 문장은 큰따옴표가 먼저 왔다. 


"쨍그랑!" "어머!" "세상에!"


중학생이 되자 첫 문장의 큰따옴표가 진부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주목할만한 어떤 상황이 벌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는 현재진행형의 문장을 골몰하는데 시간을 썼다.  그러니 시간 제한이 걸린 백일장에 나가면 스스로가 용두사미같은 글을 썼구나 후회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래도 머리가 용인건 중요했다.  그러므로 화자의 감정이 증폭된 현재진행형의 문장으로, 주로 어디선가 훑었던 어른들의 소설을 흉내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쓰레기 냄새가 진동했다' 


나머지 문장들은 이 첫 문장을 이해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공감은 후차적이다. '공감권'에 들면 수상권 안에 들 수 있다. 첫 문장이 던진 고민과 갈등, 욕망의 수습현장은 때때로 전투적이다. 숨차다. 아아...내 유년시절 원고지 안에는 요즘의 그렇고 그런 VLOG는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나서 나의 글쓰기는 일종의 터닝포인트가 찾아왔다. 고시수준에 가까운 등단 절차는 아득했고 나는 다만 '도피처'로서의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렇다고 막연하게 순수하지도 않았다. 등단 소리만 나오면 침을 튀겨가며 아이고 저도 등단이 마려워요! 했으니) 매일이 걸레짝처럼 느껴졌던 날들에, 습작 속 캐릭터마저 욕망의 불꽃을 튀기기에 내 손 끝은 다소 기진했던 것 같다. 너는 그렇게 살아, 나는 이렇게 살께. 응 좋아. 유년시절 원고지에는 없던 '브이로그 일상'이 조금은 어두운 색채로 쓰여진 습작 안에서 문우들은 물론이고 작자마저 어떤 의미도 발견하지 못했다.       





요즘 나는 어떤 욕망으로 사는가. 오늘을 충실하게 채운 욕망은 무엇이었던가. 요즘 인기 드라마인 <부부의 세계>에서 유부남 태오와 연애한 20대 여성 다경이란 캐릭터에 대한 많은 코멘트는 이런 것이다. 아니 집안 좋고 인물 좋고 젊기까지 한 여자가 뭐가 아쉬워서? 누군가 그 댓글에 대댓글을 달았다. 부족한 것 없는 삶이다보니 무료해서, 재미가 없어서, '살맛'을 느끼고 싶어서. 


크... '살맛'


엉키고 부대끼며 원펀치 투펀치 두들겨 맞아야 '아 내가 사는구나'하고 느끼는 삶은 얼마나 피학적인지. 양념을 쳐야 맛있지, 고춧가루 뿌리고 캡사이신 치고 후추도 톡톡톡. 연애가 신라면 쯤 되면 불륜은 핵불닭볶음면 쯤 되는걸까.  


사회에 발을 디딘지 13년차가 되도록 인간관계는 여전히 버겁다. 그것이 조직생활이든 연애관계든. 그리하여 생활도 정신도 가난해진 것이라면 딱히 댈만한 핑계도 없지만 이 버거움을 개선(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걸까)해나갈 마땅한 의지도 없는걸 보면 나는 여전히 '살맛'을 갈구하진 않는 듯 하다. 이리 튀고 저리 튀는 욕망들이 일치되어 '다같이 행복한' 순간은 극히 드물다. 그 일치를 위해 서로는 얼마나 인내하고 배려해야 했나. 피어나는 인내와 배려 속에 움트는 암세포. 누군가는 뭐가 이렇게 극단적일까 생각하겠지만. 나는 어디에 기대는 것도, 누군가의 나를 위한 배려도 버겁다. 물론 내가 어떤 관계조차 맺지 않는다해도, 내가 살아있음으로 익명의 누군가는 필시 '희생적 위치'가 될 수 있음을 안다.  가족은 당연할테고.


고작 30대 중반에 지껄이는 소리가 이 따위로 너절하다. 


먹방 영상을 자주 보고 내일 먹을 음식을 계획한다. 내 안의 욕망은 실로 다양하다. 다만 이 욕망들의 부딪힘이 두려워 섣불리 꺼내지 못한다. 갇힌 욕망들은 혀 끝에 닿아 오로지 음식에 탐닉한다. 오늘은 동생이 해준 닭도리탕(인가 볶음탕인가의 논란에서 결말은 나온 것도 같고 아닌것도 같아서 항상 검색을 해보는데 지금은 귀찮아서 그냥 쓴다)에 중국당면과 떡 사리를 곁들여 아주 맛있게 먹었다. 포슬하게 익은 감자를 밥에 비벼, 그 비빈 밥에 양념을 흥건히 적시고 한 숟갈 두 숟갈 세 숟갈.... 딸기도 먹고 오렌지도 먹었다. 과자도 먹었다. 커피는 한 잔. 내일은 무얼 먹을까. 지독하다. 정말.




검은 옷의 사람들 밀려 나온다. 볼펜을 쥔 손으로 나는 무력하다. 순간들 박히는 이 거룩함. 점점 어두워지는 손끝으로 더듬는 글자들, 날아오르네. 어둠은 깊어가고 우리가 밤이라고 읽는 것들이 빛나갈 때. 어디로 갔는지. 그러므로 이제 누구도 믿지 않는다.  유희경, <금요일>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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