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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혜 Jun 15. 2020

삐라와 다시마 2장

6월 14일

한량처럼 하루를 보냈다. 이런 날이 어디 하루 이틀이겠냐마는. 움직이지 않을수록 무기력해짐을 모르지 않는바, 내일부터는 칸트처럼(....) 시간을 정해놓고 산책이라도 해야겠다. 실제로 산책일기를 써볼까 진지하게 생각 중이다. 할 일을 쌓아두고도 이런 식의 나태와 방만을 일삼는 정신상태는 결국 자기혐오를 불러일으킬 뿐...까지 쓰는데 정신상태를 떠나 이런 문장을 쓰는 내 자신이 되게 별로다. ㅎㅎ 


노력한 만큼의 적절한 보상이 없으면 설사 그것을 '실패'라 규정지을 수는 없다해도 좌절할 수밖에 없는데 좌절이 반복되면 뭐든 시작 자체를 꺼리게 된다. 종단에는 요행을 바라게 되는 데, 여기까지 내가 주기적으로 로또를 사고 있는 이유...라고 적으려니까 또 한없이 자괴감이 몰려오네.  


나는 살면서 뽑기운, 당첨운이 (유난히) 없었다. 이제껏 없었으니 앞으로도 없을 것인데, 그것을 일찍 깨달은 덕분인지(?) 유년시절 생활기록부는 물론이거니와 살면서도 꽤, '성실하다'는 소릴 많이 들었다. 


'성실하다'. 

표현 자체가 워낙 판에 박힌,  그러니까 교사들이 학생 100명 중 99명쯤에게 써줄법한, 딱히 수식할 말이 없을 때 쓰는 보통 사람의 흔한 형용사라 딱히 특별한 의미는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작 5년의 직장생활에서도 "승혜씨는 성실해"라는 말을 왕왕 들었는데 왜 그런 이미지였을까 생각해보면 1. 머리가 좋지 못해서 근성하나 믿고 사는 타입 2. 남에게 싫은 소리는 죽어도 못듣겠는, 좋은사람 콤플렉스가 있음 3. 눈앞의 지름길도 못보고, 지름길을 직접 만들지도 못하며, 여기가 지름길이야 라고 안내해주는 사람도 없기에 정도를 걸을 수 밖에 없다는 숙명임을 알고 있음 에 성실함의 원인(?)이 있지 않을까 싶다. 


아니,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면 (또 이렇게 장황해지고 마는데...) 


여덟, 아홉살쯤이었나. 논두렁에서 삐라를 잘 줍는 친구가 있었다. 곱슬머리 사내아이였는데 모은 삐라를 경찰서에 가져다주고 이런저런 학용품을 받아 내게 자랑했던 기억이 난다. 너무 부러워서 이후 학교를 오가는 길에 눈에 불을 켜고 삐라를 찾았지만 단 한 장도 주워본 적이 없었다. 다만 나는 그 '삐라'라는 것의 발원지가 북한이라는 점이 정말 신기했다. 어떻게 북한에서 이런 종이들이 날아올 수가 있을까? 우편배달부도 없이? 뭐 이런 궁금증들. 삐라는 총천연색으로 인쇄된, 껌종이만한 작은 종이였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딱히 '북한스러운' 특징은 없었다. 백두체로 수령님 어쩌구가 써있던 것 같지도 않고..


비슷한 이야기로 초등학교 저학년 때 소풍가면 으레 하던 '보물찾기' 또한 한번도 쪽지를 찾아본 적이 없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잡초 속에서 쪽지를 찾아 '상' 도장이 찍힌 새 공책을 경품으로 받아가던 친구들을 부러워하던 그때의 아쉬움이 아직도 마음 한 켠에 남아있을 정도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복권은 물론이거니와 온갖 종류의 추첨행사는 죄다 '꽝'처리 되어 뭐 하나 경품으로 타 본적이 없고 해서 일찍이 -노오오오오오력-이 아니면 안된다는 인생의 교훈을 터득, 막춤을 춰서 자전거를 타거나 시낭송을 해서 커피 메이커를 받거나 라디오 사연을 보내 목캔디 같은 걸 받으며 정정당당히(...) 경품을 타내곤 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로또는 내 로또 구매 역사에서 5등 당첨도 손에 꼽을까 말까하냐!!!


물론 나같은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라고 쓰면서도 유난히 내가 당첨운이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삐라 발견도 로또 당첨도 소수에 한정되어 있으니 절대다수는 다 나같은 사람이겠지. 그래서 (요행을 바라지 않고) '성실하다'는 표현이 보통의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흔한 수사가 됐을지도.


어떤 사람이 돼지꿈을 꾸고 다음날 복권을 샀는데 꽝이었고, 헛헛한 마음으로 라면이나 먹자해서 너구리 한 봉지를 뜯었더니 그 안에 건조 다시마가 1장이 아니고 2장이 들어있더라는 아주 유명한 썰이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라면이 너구리여서 너구리를 먹을 때마다 그 썰을 떠올리곤 한다. 최근 너구리와 비슷한 오동통면을 생산하는 오뚜기에서 건조 다시마 2장을 넣은 오동통면 한정판을 출시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제는 돼지꿈을 안꿔도 다시마 2장짜리 라면을 먹을 수가 있는 세상이 됐다!(...)


(앞으로도 로또 낙첨 확률이 99.9%에 수렴하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로또 구매를 그만두지 못하는 까닭은 0.000001%의 당첨 가능성을 믿는다기보다 십억 쯤 있으면 뭘할까 하는 '일주일 간의 내적망상'을 위함이리라..) 


어쩌다 하나 있는 네잎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지만 지천에 널린 세잎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입니다 

같은 말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진 않았는데 그렇게 마무리하지 않으면 1% 부족할 것 같아서 끄적여봤다. 


새로운 한주, '성실한 승혜씨'가 되기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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