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길 건너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역사공원이라 이름 붙은 작은 공원에 갔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7분이면 닿을 수 있는데도 이사를 오고 2년이 다 되어서야 처음 갔습니다. 음.. 사실 내가 살지 않는 어떤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는 걸음 자체가 조금은 내키지 않았달까요. 아파트 단지를 거치지 않는 길도 있지만 그 길은 너무도 많은 아파트들을 지나고 또 돌아야 합니다.
당연히도 길 건너 다른 아파트에서 온 나를 의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 역시 앞집에 누가 사는지조차 모르는걸요. 13개동으로 이루어진 대단지 아파트 안을 걷는 저는 거주자도 이방인도 뭣도 아닌 여성으로 짐작되는 인간일 따름이겠지요. 대익명의 시대에 마스크까지 필수로 써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으니 누구 말마따나 불편한 점은 오직 호흡 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길바닥에서 불편한 시선을 주고 받는 확률이 훨씬 줄었테니 말입니다. 마스크는 무적가면입니다. 입으로 욕을 하든 혀를 내밀든 상관없습니다. 눈매만으로는 표정을 알 수 없고 완전한 생김새를 유추하기도 어렵지요. 우리는 다같이 마스크를 쓴 '인간'인 것입니다.
처음 들어선 아파트 단지 안에는 곳곳에 정자가 있더군요. 정자에는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계셨습니다. 하늘로 비죽비죽 솟은 20층 아파트들 사이에 야트막한 한옥 정자들은, 사실 오늘날 여느 대단지 아파트의 흔한 풍경이지만 저는 아직까지도 그 풍경을 조화롭다해야할지 부조화롭다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대단지 아파트는 내가 사는 아파트보다 좀더 값져 보였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지은 듯 했고 복층도 여러 세대 인듯 했습니다. 우리 단지에서는 보이지 않는 외제차들도 여러 대 보였고요. 나는 그 아파트에 살고자 노력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런 것들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걸까요. 서울에서 안성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의 기쁨을 잊은 걸까요. 더이상 구부려 앉은 채 세안하지 않아도 되고, 두 손바닥보다 훨씬 큰 하늘을 볼 수 있는 집에 살게 되어 몹시 즐거워하지 않았나요. 어디 그뿐인가요. 버스정류장이 도보 1분 거리라고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욕심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내가 죽지 않을만큼만 일해왔다면 욕심이 아닌 정당한 보상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고보니 누군가에게는 자발적 가난의 삶을 산다고도 말했지요.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은 또 얼마나 요상한 말인가요. 정말 이 사회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쉴만큼 쉬면 돈을 벌 수 없는 구조인걸까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쉴만큼 쉬면서 돈을 벌면 금수저, 사기꾼 소리를 듣게 될까요. 아니, 그에 앞서 사회구조탓을 할만큼 나는 노력이란걸 했는가 자문이 앞서야할까요.
내 눈높이에 닿는 풍경이 죄다 철골과 시멘트, 철강판, 유리로 만들어진 구조물들 뿐이어서 의식하는 것이지 절대 내 욕심은 아니라고, 나는 그럴 욕심을 부릴 사람이 아니라고 얘기한다면 너무 곤궁해 보일까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아파트의 휴게 장소는 필히 나무로 지은 한옥 정자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철과 시멘트, 유리에서 튕겨져 나온 시선이 머물 곳으로는 나무가 적절할 테니까요. 물론 나같은 이방인들 좋으라고 만들어놓은 것은 아닐테지만요.
단지를 통과하니 찻길 건너편에 공원이 보였습니다. 얼핏 평범한 근린 공원의 모습이었지만 시선을 멀리 던지니 공원 끄트머리에 커다란 유리 덮개 같은 것이 보였습니다. 그제서야 고고학자이자 문화,역사 연구원인 K선생님이 내가 B읍에 산다고 했을 때 왜 그렇게 반가워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내가 거기 택지 개발할 때 발굴을 했다"고 전했는데 당시의 나는 그 말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간행물 기획자와 필자로 만난 사이였기에 나는 그가 기획 외에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몰랐고 더욱이 내가 사는 곳 지척에 발굴지가 있다는 사실 또한 몰랐기에 함께 반가워할 수 없었지요.
많이 늦었지만 나는 이제서야 진심으로 반가워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의 발굴 현장을 두눈으로 확인했으니까요. 유리 덮개가 보호하고 있는 것은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유구였습니다. 거주지와 무덤 흔적이 여럿이었는데 지붕만 씌운다면 그대로 작은 박물관이 되어도 좋을만큼 넓은 규모였습니다. 유구에서는 각종 촉과 검, 토기, 장신구 들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무엇이 희귀하고 가치있는 유물인지 알지 못하지만 나는 다만 그것들이 예리하고 반듯했던 시절을 헤아리다 그만 아연해졌습니다. 청동기는 기원전 2,000년...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에 시작된 시대로...
가까운 자리에 지석묘도 있었습니다. 지석묘라고 하면 선뜻 시대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고인돌이라고 해야 머릿 속 타임머신이 돌아갑니다. 언젠가 고창 산기슭에 놓인 수백기의 고인돌 군락을 보고 기분이 묘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글을 쓴다는 사람이 그 기분을 실감나게 표현하지 못함에 부끄럽지만....시간이 흐른 지금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 머릿 속에는 문장 단위로 정리되지 않은 단어들이 동동 떠다닐 뿐이니까요. 죽음, 돌, 영원, 기도, 우주, 사랑, 신비, 공포, 두려움...
높은 아파트들 아래 바짝 엎드린 1기의 고인돌, 그리고 유구들이 과거 고창에서 느꼈던만큼의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곳에 닿기 직전, 아파트 단지를 거칠 때의 번민은 더이상 없었습니다. 그래요. 어쩌면 일종의 요식행위의 결과물로 극히 일부만을 남겨둔 청동기시대의 집터와 무덤들 앞에서, 아파트와 한옥정자의 공존만큼이나 낯설고 엉뚱한 이 존재 앞에서 나는 작은 안위를 얻은 것입니다.
전국토가 무덤일테지요. 방금 지나쳐 온 대단지 아파트 지하에는 얼마나 많은 유구가 층을 이루어 묻혀있을지요. 언젠가 다음 생에는 건축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곳 유적공원에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고고학자가 되면 어떨까하고요. 이 생에선 땅을 어떻게 해볼 재주가 없을 것 같습니다. 파지도, 짓지도 못하겠지요. 아마 가질 수도 없을 겁니다. 그러기엔 내 생이 유한한 까닭이지만 나는 혹여 이말이 또다시 곤궁한 핑계로 들릴까봐서 이 글을 서둘러 마무리합니다.
어제 산 책 발견
허수경,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2018년, 시인 허수경의 부고에 많이 슬펐습니다. 내가 접한 유명인의 부고 중 가장 큰 슬픔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그의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랴』는 그가 스무살을 갓 넘겼을 적 쓴 시들을 모아낸 책입니다. 내가 이십대에 그 시집을 펴본 일은 아주 큰 행운이었습니다. 숱한 문학소녀들이 그의 시집을 아껴가며 읽었을겁니다. 내가 삼십대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그의 시뿐만 아니라 산문 또한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일찌감치 독일로 건너가 고고학을 공부한 그의 문장에는 폐허, 발굴, 영원, 영혼, 역사, 토기, 유물 등의 단어가 자주 등장했는데 그의 문장을 읽을 때에, 그 단어들은 마치 원래 사라졌던 것인데 그의 손으로 발굴해 길어올린 단어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제는 절판된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은 제가 처음 접한 허수경 시인의 산문집으로 여행을 갈 때 자주 끼고 다닌 책입니다. 이 책에 실린 짧은 이야기들은 책이 절판된 이후 출간된 그의 다른 산문집들에도 실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수경 시인의 산문집이 꽤 여러 권인데 최근에 유고 산문집 『오늘의 착각』이 출간되었습니다. '유고'가 붙은 이 산문집은 좀처럼 읽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