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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혜 Jun 24. 2020

의식의 흐름대로

오늘 산책 발견

요 며칠 많이 더웠는데 이제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네요. 비가 오면 산책이 어렵습니다. 우산을 쓰거나 우비를 입고 걸으면 되겠지만 손에 뭘 들거나 옷에 뭘 걸치면 거추장스럽고 성가십니다. 걸을 때만큼은 두 손에 아무것도 들고 싶지 않아요. 하다못해 저는 한쪽 어깨에만 걸치거나 손에 드는 가방을 들지 않은 지 7~8년은 된 것 같습니다. 손이 자유롭지 않아서요. 그래서 등에 메는 가방을 항상 이용하는데 오죽하면 만나는 사람마다 뭘 그렇게 등에 지고 다니냐고 할 정도입니다. 짐이 많아서 가방을 멘다기보다 등에 딱 붙는 안정감과 두 손의 자유로움 때문에 등가방을 선호하는 것이죠.  이런 제가 우산을 손에 드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온몸으로 비를 맞고 다닐 수도 없어서 비 오는 날의 야외활동을 꺼립니다. 비 오는 날을 싫다 싫다 하다 보니 이제는 비예보만 들어도 살짝 우울해집니다. 물론 비의 소중함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아, 오늘 쓰려던 소재는 비가 아닌데... 날씨로 운을 띄우다 보니 또 한 단락을 써버렸네요. 제 자신을 못 말리는 투머치 토커라고 느낄 때가 바로 이럴 때입니다. 샛길로 한참을 들어가 버려서 어쩔 때는 본래의 목적지를 잊거나 아예 다음에 가는 것으로 일정을 바꿉니다. 그리고는 마음 놓고 샛길을 걷는 것이지요. 지금 쓰고 있는 글이 딱 그렇게 될 판입니다. 아무리 비 오는 날씨를 꺼린 들 '우천 산책'이라고 주제를 던져놓으면 쓸거리가 없진 않으니까요.


그래도 오늘은 쓰려던 말을 써야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산책이 '샛길'과 전혀 무관하진 않겠네요. 동네 산책이라는 게 늘 그렇듯 보통은 다니던 길로만 걷게 됩니다. 그 길 위에서 어제의 꽃봉오리가 오늘은 꽃잎을 활짝 펼쳤는지, 고장 났던 공원의 분수가 이제는 물줄기를 뿜어내는지, 바깥에 내놓고 파는 분식집 떡볶이가 오늘은 불지 않았는지 등의 소소한 변화에 주목합니다. 기억할만한 이벤트가 벌어진다면 그것은 보통 길 위를 오가는 사람들이 벌이는 사건이겠지요. 사람이야말로 단 몇 초의 관찰만으로 이야깃거리를 만들 수 있는 가장 역동적이고 변화무쌍한 존재일 테니까요.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이 동네에 이사 온 이후 주목할만한 사건을 마주한 적은 없었습니다. 소란한 말싸움이랄지 불량학생들의 시비랄지 뭐 그런 것들이요. 그나저나 주목할만한 사건이라 하니 왜 낯을 붉히는 부정적인 방향로만 떠오를까요. 사실 서울에 살 때, 그러니까 봉천동 다세대주택촌에 살 때는 조금 과장하면 하루 걸러 하루 꼴로 동네에 싸움이 나고 경찰차가 출동하고, 뭐 그랬거든요. 그럴 때면 온 동네 사람들이 창문을 열거나 현관 밖으로 나와 싸움 구경을 했는데 때론 싸움보다 구경꾼들 모습이 더 흥미로웠죠.  



아무튼 그래서,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익숙한 산책로에서 살짝 벗어나기로 했습니다. 잔디밭 사이 산책로를 걷다가 대로변 큰길로 쓰윽 빠졌던 것인데요. 한가로운 산책을 원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잘 정돈된 산책로를 두고 굳이 시끄럽고 위험한 4차선 대로변을 걷진 않을 겁니다. 그러나 가끔은 저 같은 사람도 있을 테지요. 매일 걷던 길이 그만 무료해져 누가 봐도 불편하고 시끄러운 길을 걷는... 쓰고 보니 그게 인생인가 싶네요.  일상의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 우리들이 스스로 사건을 만들어 기어이 불안과 걱정의 시간을 살고 결국에는 과거의 무료함을 그리워하고... 여차저차 사건이 봉합되어 또다시 무료한 일상을 되찾았을 때 그것을 또 견디지 못하는 무한반복의 인생 고리... 거참, 이렇게 괴롭습니다. 우리 인생이.


잠깐만요, 산책을 얘기하고 있었는데 또 어쩌다가 인생 얘기까지 하고 있는 거죠...?

오늘 쓰려던 얘기는 이게 아닌데.....


 



어제 산 책 발견

강병융, 『아내를 닮은 도시』


2016년, 가족과 함께 발칸반도를 여행을 했습니다. 여행 끝자락에 슬로베니아 류블랴나가 있었죠. 이 도시에서 머문 시간이 그리 길진 않았습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3~4박 정도로 머물렀던 것 같아요. 사실 도시 규모가 작아서 관광을 목적으로 들른다면 하루 이틀이면 충분한 도시이기도 합니다. 우리 가족은 그때 류블랴나에서 이탈리아를 넘어가냐 마냐 고민을 했는데 결국은 가지 않고 류블랴나 주변의 소도시 두어 곳을 들르고 여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우리는 그때 마주했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에 대해 자주 회상하곤 합니다.

저는 부모님과 류블랴나 시내를 걸을 때 정말 여러 번 이곳에 다시, 혼자 오고 말겠다 다짐했습니다. 물론 부모님과 함께한 류블랴나도 충분히 좋았고 또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지요. 그런데 류블랴나는 어쩐지 혼자서 천천히, 그 도시를 걸을 때서야 도시의 찐한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소설가 강병융 작가의 에세이 『아내를 닮은 도시』의 도시가 바로 류블랴나입니다. (류블랴나는 사랑의 도시라는 뜻의 이름이라는데 아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우시면!)  강병융 작가는 류블랴나국립대학교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는데요, 당연히 거주지는 류블랴나. (아아, 제가 선망해마지않는 류블랴나 솔로 산책을 매일 하시겠군요! 부러워라.) 이 책은 그의 류블랴나 일상과 단상을 담백하게 담아낸 에세이입니다. 문학동네 임프린트인 난다에서 출간하는 '걸어본다' 시리즈 중 한 권이지요. 예상하시겠지만 저는 이 시리즈를 참 좋아합니다. 앞서 소개한 허수경 시인도 이 시리즈로『너 없이 걸었다』를 출간한 바 있어요. 제가 걸어본다 시리즈를 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제껏 읽은 이 시리즈의 작품 중에는 강병융 작가의 에세이를 가장 유쾌한 리듬으로 읽었습니다. 다른 작가들의 에세이를 새벽이나 늦은 밤 분위기로 읽었다면 강병융 작가의 『아내를 닮은 도시』는 오후 12시 햇빛 잘 드는 레스토랑 야외석에서 친구와 점심식사를 하며 나누는 수다 같았달까요.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9102351


의식의 흐름이 참 자유분방한(?) 저는 가끔 아무 페이지나 펴서 읽어도 잘 읽히는 책을  일부러 찾아 읽는데요, 뭐 사실 서사가 없는 에세이집이 대부분 그런 성격을 가졌지만 『너 없이 걸었다』는 특히나 더 제 의도에 부합하는 책입니다.  아무 페이지나 열어도 뭔가 재밌는 요소가 많은 책이거든요. 챕터별 제목 상단에는 슬로베니아 단어와 그 뜻이 쓰여있고요(하루 한 단어의 느낌으로),  챕터 끝에는 'Walking Sound Track'이라고 해서 노래가 한곡씩 소개되어 있습니다. 슬로베니아 밴드 노래도 있고 우리나라 인디밴드 노래도 있고 지드래곤 같은 유명가수의 노래도 있어요. 걸어본다 시리즈 치고 사진도 꽤 많습니다. 게다가 사진 속 풍경마다 작가님의 산책 친구(?)인 녹색 공룡 녹용 군이 앉아있는데 그 귀여운 자태에 피식 웃음이 나와요. 아무튼 간에 어떤 페이지를 펼쳐도 읽는 재미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결론!

그렇다고 작가님의 에세이가 지금까지 읽으신 저의 의식의 흐름대로 글 뭉치처럼 파편적이고 산만하단 얘긴 절대 아닙니다. 뭐 당연한 얘기지만요. ^^  그나저나 저는 언제쯤 류블랴나에 다시 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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