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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승혜 Jun 25. 2020

라디오를 듣습니다

애매하게 삽니다 

최근 몇 개월, 오랫동안 관심에서 멀어졌던 라디오를 다시 듣고 있다. 컴퓨터로 일을 해야 할 땐 자꾸 유튜브나 네이버 뉴스 페이지를 들락거리고 독서를 해야 할 땐 자꾸 스마트폰에 손이 가서 생각해낸 궁여지책이다. 귀로 무언가를 집중해 듣다 보면 시각적인 자극을 찾지 않게 돼서 습관적 유튜브 시청, 인터넷 서핑에서 잠시 멀어질 수 있다. 글쎄, 이건 그냥 라디오를 듣자는 거지 일에 집중하는 데는 하등 소용없는 짓 같지만 시선이라도 한글파일의 여백을 응시하다 보면 결국 한 문장이라도 쓰게 된다. 일단 문장 한 줄을 쓰면 손가락에 시동이 걸리면서 두 번째, 세 번째 문장은 수월해진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라디오 소리는 백색소음이 된다. DJ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노래가 흘러나오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을 인지하면 '아 내가 집중하고 있었구나'하는 묘한 쾌감을 느낀다. 

이렇게 적으니 라디오는 정말 워드 작업을 위한 수단처럼 느껴지지만 오롯하게 라디오에 귀를 열여 두는 시간도 적진 않다. DJ의 이야기가 공감되어서, 또 음악이 좋아서... 30대 중반이면 충분히 라디오 키드 막차 탑승 세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고3 때까지도 CD플레이어를 가진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카세트테이프를 즐겨 듣고 특정 라디오 프로그램의 애청자임을 자부했으니 말이다. 그때도 라디오를 켜 두고 공부를 하다가 라디오 소리가 안 들리는 순간을 알아차리면 내심 뿌듯해하곤 했다. 음, 이걸 공부 못하는 애들 특징이라고 해야 할까.ㅎㅎ


내 학창 시절 올타임 페이버릿 DJ는 유희열이었다. (유열이 아닙니다) 나와 같은 세대로 라디오 좀 들은 이라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이 '유희열'이라는 이름 석자에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그의 막방 때 '흐흐흡', 함께 오열한 '음도시민'이었다. 그때 유희열의 음악도시, 이어서 올댓뮤직까지 열심히 청취한 이들이라면 '나를 모르는 유희열'과 쌓은 내적 친분이 가족 못지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만큼 '시장 유희열'은 특유의 진솔함과 센스 덕분에 일방향 멘트를 던짐에도 쌍방향 소통을 하는 느낌을 주는 DJ였다.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 그 만개한 잇몸웃음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 그것은 거의 사랑에 가까운 감정이어서 그의 입에서 '그녀'를 주어로 한 문장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훈내 나는 목소리만 듣다가 그의 외모를 인터넷 사진으로 접하고 '충공깽'했다는 애청자들도 있었다지만 나는 '어머, 외모도 수려하네' 할 정도였다. 

유희열의 올댓뮤직은 2004년 4월 종방했고 나 역시 04학번 새내기 대학생이 되면서 라디오와 멀어졌다.





2007년쯤, 나의 세 번째 남자친구와 커플 라디오(...)를 사게 됐다. 내가 사서 선물했는지 그가 내게 선물을 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연애의 기억은 이렇듯 형편없다.) 에코 라디오라고 해서 전기를 이용하지 않고 이용자가 직접 태엽을 돌려 자가발전으로 전원을 켜서 듣는 친환경 라디오였다. 깔끔한 디자인과 특이한 이용 방식이 돋보였지만 태엽을 거의 1시간 동안 돌려도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은 수분에 그쳤다. 그야말로 팔뚝이 남아나질 않는 상당히 비효율적인 방식의 라디오..라고 적는 순간 문득, 전기가 차단된 재난 상황에 닥친다면 아주 유용하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아무튼 뭐, 세 번째 남자친구 얼굴도 가물가물한 오늘날, 어디에 박혀있는지 모르겠는 그 작은 라디오는 주파수를 손으로 돌려 맞추는 내 마지막 '아날로그 라디오'로 남았다.


라디오를 애플리케이션으로 듣는 세상이다. 라디오라는 매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수많은 애플리케이션 중 하나가 되어버린 듯하다. '비디오 킬 더 래디오 스타' 시대가 도래한 후 라디오 스튜디오에 카메라를 켜 둔 '보이는 라디오' 방송이 흔해졌는데 라디오 청취의 본질을 생각하면 '소리 없는 아우성' 같은 시도다.  그나마 게스트가 있다면 토크쇼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지만 DJ 혼자 진행하는 라디오는 진행자도 청취자도 뻘줌한 형태다. 부러 보이는 라디오를 찾아보는 이라면 청취자가 아닌 시청자가 되겠지만서도. 

개인방송이 난무하는 오늘날 제아무리 공중파 라디오라도 청취율이 높지 않다는 사실은 확인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년 넘게 매일 라디오 방송을 하는 DJ 배철수는 얼마나 대단한가. 같은 MBC에서 33년 넘게  싱글벙글쇼를 진행한 DJ 강석, 김혜영은 지난 5월 하차했다. 그 프로그램을 듣진 않았지만 내심 많이 아쉬웠다. 사회초년생 때 김혜영 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의 밝은 에너지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TV 방송보다 라디오로 선방하는 CBS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내 핸드폰에 설치한 라디오 애플리케이션은 CBS레인보우, BTN라디오, BBS불교방송, KBS World Radio로 총 4개다. 가장 자주 이용하는 앱은 CBS 레인보우, 그다음은 BTN라디오 울림이다. 이게 무슨 종교 대통합적인 라디오 선택인가 싶지만 특정 종교와는 전혀 관계없이 그냥 좋아서 듣는 방송들이고 고정적으로 듣는 프로그램들도 종교성은 없다. 가끔 일부러 염불소리를 듣기 위해 BTN이나 BBS를 켜기도 하지만 부처님 말씀 같은 건 귓등으로도 이해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이다. 


CBS 라디오는 고정 청취자가 많고 나름 영향력도 큰 것으로 알고 있다. 표준 FM 김현정의 뉴스쇼는 간판급 프로그램이고 시사자키 전관용입니다 역시 못지않은 인기 프로그램이다. 나는 '밀레니엄 시대 래디오 갬성'을 충족시켜줄 프로그램을 원하기에 주로 늦은 밤 음악 FM 프로그램을 즐겨 듣는다. 오후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제법 긴 시간, 총 3개의 프로그램이 2시간씩 진행되는데 뭐가 제일 좋다고 꼽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 좋다. 10시에는 '허윤희의 꿈과 음악사이에', 자정에는 '시작하는 밤, 박준입니다', 새벽 2시에는 '이지민의 All that Jazz'가 방송된다. 이중 꿈과 음악사이에는 DJ 허윤희의 목소리를 오래전에 우연히 듣고 반해 진작에 알고 있던 프로그램이었다. 10년 넘게 장수한 방송으로 언제 들어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허윤희 님은 내가 갖고픈 이상적인 목소리와 분위기를 가지셨다. (과거 정지영의 스윗박스를 즐겨듣던 청취자들이라면 특히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자정에는 시인계의 인기남(!) 박준 시인이 라디오를 진행한다. '준디'라는 호칭은 들을 때마다 어색한데 그래도 담백한 진행이 편안한 방송이다. 시인 DJ가 시를 읽어주고, 노랫말을 읽어주는 코너는 나의 최애 코너다. 그의 시집이야 워낙 베스트셀러기도 해서 진작에 갖고 있지만 작년에 그의 강연에 갔다가 '찐팬'이 됐다. 실로 매력이 철철 흘러넘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지민의 올댓재즈는 재즈의 문외한인 내가 음악이 좋아서 졸음을 참고 듣게 되는 프로그램이다. 아나운서 이지민 DJ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진행도 참 좋다. BTN라디오 울림에서는 운성스님의 '그대에게 이르는 길 운성입니다'를 좋아한다. 스님의 편안한 목소리와 진행이 과장 조금 보태서 번민을 사라지게 한다.  매일 아침마다 했던 프로그램인데 지난달 개편 후 일주일에 한 번 방송으로 단축되어서 너무나 아쉽다. 




라디오 청취를 '취미'로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청취자들이 정좌하고 라디오를 듣진 않을 테니까. 운전을 하거나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청소를 하거나 기계를 만지거나... 귀는 시시때때로 열되 손과 발은 바쁘게 움직이는 청취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처럼 라디오 청취가 단순히  일상의 어떤 보조적 역할에 지나지 않는대도 오늘날 라디오를 듣는 행위는 전술한 이유로 말미암아 특별하다. 오래된 일기장을 펴보는 그런 느낌이랄까. 주파수를 손으로 돌려 맞추는 라디오가 아니라 터치 한 번에 열리는 첨단(?) 디지털 기기로 라디오를 접하면서도 라디오 청취는 '아날로그'의 카테고리에 분류해야 할 취미같다. 


지금 이 글을 끄적이는 동안에도 내 귀에 캔디(는 또 얼마나 오래된 노래인가), 아니 내 귀에 라디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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