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산책 발견
태풍이 빠져나간 자리에 아직은 바람이 남아 하늘은 청명하고 시원한 하루였습니다. 네, 가을이 성큼 온 듯 했어요. 창문 밖을 보니 오늘 산책은 절대 미룰 수 없겠다 싶었지요. 걸었어요. 늘 걷던 방향으로. 볕도 바람도 다 좋았는데 결정적으로 재미가 없었어요. 배가 불렀지요. 건강한 두 다리로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에 걷는 것 자체가 축복일텐데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죠. 매일 같은 풍경을 보며 걷는 것이 지루해졌어요. 동네를 벗어나면 되지 않냐고요? 아예 대도시거나 아예 시골이라면 가능하겠어요. 그런데 이 동네는 보행자에게 그리 친절한 곳은 아니에요. 걷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고립된 형태랄까요. 동네를 이루고 있는 '구조물'이라면 아파트 단지가 80% 쯤 되고 그 중심을 도시와 도시를 잇는 왕복 6차선 도로가 지나고 있어요. 2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톨게이트고요. 좀 걸어볼까 싶어도 이 큰 길들이 걷는 길을 툭툭 끊어놔요. 접근이 쉬운 산책로라 하면 아파트 단지 내외에 조성된 공원들 뿐이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공원은 고인돌과 선사시대 유구를 전시한 유적 공원인데 처음 한 두번 갈때나 흥미로웠지 이제는 아주 익숙해져버렸어요. 하..익숙함. 익숙함은 곧 편안함이 될 수도 있을텐데 저는 왜 그 편안함에 '안주'하고 '의지'하지 못하는 걸까요.
지루한 발걸음으로 대형마트까지 걸어가서 안사도 되는 황도통조림, 청포도 스파클링 에이드 같은 간식을 사고 짧은 산책을 마쳤어요. 제주도는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가야지, 아니, 아예 나중에 가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해외여행 불가능으로 다들 제주도로 몰려가는 분위기인데 저까지 발을 보태고 싶진 않아서요) 오늘은 올레길이 무척 걷고 싶었어요. 오늘 같은 날씨라면 10km 정도는 거뜬할텐데요.
올레길 열풍 이후 온갖 지자체에서 트레킹코스 개발해대는 모습이 그리 좋아보이지만은 않았는데 막상 산책로가 한정적인 동네에 살다보니 오직 사람만 걷을 수 있는 길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겠더라고요. 오늘은 정말이지 걸음마다 새로운 풍경을 접하며 다리가 아플 때까지 걷고 싶었어요.
나름 브런치에 '산책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매일 같은 길을 산책해도 새롭게 발견하는 소소한 것들과 그에 대한 행복을 적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오늘은 안되겠어요. 동네 산책의 위기가 와버렸어요.
그래도 사족을 하나 달아볼까요. 돌아오는 길에 볕이 좋아 잠시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는데요. 이름 모를 새 한마리가 참매미를 사냥해 조금씩 쪼아먹는 모습을 봤어요. 새에게 잡힌 매미는 날 수 있는 힘을 상실하고도 꽤 오랫동안 자지러지게 울어댔어요. 아무렴요. 죽음이 코 앞인걸요. 새가 부리로 천천히 쪼아가며 매미를 먹었어요. 거의 5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새가 매미를 잡아먹는 모습은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이라 저는 멀찍이 떨어진 벤치에 앉아 뚫어져라 관찰했어요. **새의 참매미 라이브 먹방. 신기했죠. 한번에 꿀떡도 아니고 안심스테이크 잘라 먹듯 조금씩 조금씩... 오늘 산책 중 있었던 가장 인상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동네 산책이 다시 재밌어진 건 아니에요. 재미는 매미 먹은 새가 봤지 제가 본 게 아니라서.
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 씨 이야기』
독일의 이상한(..!) 천재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입니다. 책 몇 권 있는 집이라면 그의 저서 한 권 쯤은 다 소장하고 있을텐데요,『좀머 씨 이야기』나 『향수』가 아마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네요.
주인공 '나'는 나무타기를 좋아하는 감수성 풍부한 소년입니다. 숲과 호수가 있는 마을에 평화로운 마을에 살지요. 다만 전쟁이 끝난 직후라 다들 풍족한 삶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동네에는 좀머씨라는 이상한 아저씨가 삽니다. 동네사람들 누구도 그를 모르는 이가 없죠. 폭설이 내리든 폭우가 쏟아지든 매일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마을 근방을 줄기차게 걸어다니니까요. 늘 배낭과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면서 우스꽝스럽게 걷는 좀머씨, 그가 무엇 때문에, 또 어디를 그렇게 다니는 지는 아무도 몰랐죠. 사나운 날씨로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 '그러다 죽겠어요!'라고 소리를 쳐도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고집스럽고 절망스럽게 외치는 좀머씨입니다.
'나'는 그런 좀머 아저씨를 이따금 자세히 관찰하곤 합니다. '나'는 미스 풍켈로 불리는 할머니 선생님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는데요, 어느날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레슨에 지각하고 변명조차 하지 못한 채 혼이 납니다. 그런데 하필! 미스 풍켈에게 레슨을 받는 도중 그녀가 재채기를 하고 건반 위로 코딱지가 날아듭니다. (...으악..) 이른바 '코딱지 사건'으로 '나'는 더욱 억울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요. 그게 얼마나 서럽고 화가 났는지 나무에 올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합니다. 나무에서 떨어질까 말까 하고 있던 그때! 탁-탁-탁-탁, 좀머씨가 나무 아래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늘 그렇듯 재게 걷다가 나무 뿌리에 앉아 허둥지둥 빵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사방을 살피면서요. 그리곤 허둥대며 자리를 일어나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나'는 그런 좀머씨를 보며 그깟 코딱지 하나로 자살을 하려고 했던 자신을 어리석다고 깨닫습니다.
좀머라는 이름은 독일어로 썸머, 그러니까 여름을 뜻합니다. 동네 산책이 너-무 지루해진 제가 문득 떠올린 사람이 좀머 씨였어요. 그것도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듯했던 오늘말이죠. 좀머씨를 떠올리면 저의 동네 산책 불평은 정말 배가 부른 소리일 수 있겠어요. 금방이라도 닥칠 죽음이 두려워 끊임없이 걸어야만 했던 사람 좀머씨. 아마도 전쟁 트라우마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되는 그에게 걷는 일이란 생존을 위한 유일한 방편이었을겁니다. 그렇다면 저에게 걷기란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욕망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걸까요? '어제 산 책' 덕분에 단순한 불평이 복잡한 생각으로 이어지네요.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25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