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승혜 Mar 11. 2021

서울의 맛

지난 일요일, 무려 '일'로 서울에 다녀왔다. 나는 일이 바쁜 사람이 아닌데다가 대부분의 일 진행은 전화나 메일로 이뤄지기에 새삼스러운 방문이었다. 지난 일요일 오후는 산책하기에 적당한 햇빛과 온도였는데 그래도 그렇지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할 줄은..! 대다수가 20대로 보였고 그들의 절반 이상은 커플이어서 요즘 젊은이들 연애 포기한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구나...그렇구나... 그렇지만 나는 그들이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에너지가 넘치고 뻗칠 때 하필 코로나 시국일게 뭐람. 친구들과 침 튀겨가며 수다도 떨고 애인들이랑 길거리 뽀뽀도 갈기도 싶을텐데! 


안국역 근처에 요즘 핫하다는 도넛츠 가게가 있다기에 이왕 서울까지 온 거 시골에는 없는 주전부리 몇 개 사서 가족과 나눠 먹어야지 싶었다. 아이구 그런데 웬 줄이..... 포장만 해가는데도 30분을 기다렸다. 줄을 서는 동안 그냥 갈까 말까 번뇌를 오만번쯤 한 것 같다. 줄이 내내 정체되면 일찌감치 포기했을텐데 갈까 할때마다 앞에서 한 명이 빠졌다. 아휴 인생..... 

그렇게 어렵사리 산 도넛의 맛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별로였다. 크림이 맛있으면 뭐하냐. 도넛빵이 별론데. 나는 할애한 시간과 돈을 보상 받지 못한 기분이었다. 개인적으로 크림으로 칠갑한 베이커리류는 믿으면 안된다는 신념을 다시 한번 다지는 계기가 됐다. 그것은 마치 구린내나 신선도를 감추려고 자극적인 양념을 쏟아 부은 음식과 다를 바 없다.  아무리 동물성 생크림을 얹었대도 빵이 후지거나 크림 대 빵의 밸런스가 무너지면 '맛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눼눼...맛칼럼니스트 납셨죠.


2005년인가...15년도 넘은 옛날이라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내가 스무 살이 갓 넘었을 무렵, 우리나라에 크리스피 도넛이 들어왔다. 그 무렵 한 친구와 방문했던 신촌 크리스피 크림에서 맛본 글레이즈드의 맛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한입 베어 물었을 때 확신했다. 이것은 인간이 밀가루와 설탕으로 창조할 수 있는 최상의 맛이라고. 야 이건 미친, 천국의 맛 아니냐?? 그 이후로 나는 크리스피크림의 불 켜진 레온사인 앞을 쉬이 지나치지 못했다. 마침 당시 크리스피크림에선 레온사인에 불이 켜졌을 때 매장을 방문하면 1인 1글레이즈드를 공짜로 주는 공격적인 마케팅(이후 박스 단위로 사면 1개를 공짜로 주는 프로모션으로 바뀜)을 진행하고 있었다.   

촌티를 벗지 못했던 그때, 나는 서울의 맛을 크리스피크림 글레이즈드로 정의했다. 이렇게 부드럽고 달콤한 헤븐을... 서울 것들만 맛보고 있었구나.. 그랬던거구나... 나도 이제 서울 것이 되보갔어.

그렇다고 안국역 도넛츠가 추억으로 미화된 글레이즈드에 가려져 맛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냥 그 자체로 맛이 없었던 것이지, 뭐 개취다.


서울의 맛은 아직도 달달헌가? 

그러니까, 서울에 살았던 십몇년의 시간들이 달달했냐면 확실히 그렇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서울에서 보낸 20대의 모든 순간은 소중했다. 반짝였다. 쓰고 시고 매웠던 순간들도 20대여서, 20대의 서울이어서 괜찮았다. 이제는 얼굴조차 희미해진 사람들과 카페 테라스에 앉아 수백잔의 커피를 마셨다. 이따금 마음이 맞는 이들과 새벽 도심을 걸었다. 그 누구와도 사계절을 넘기지 못했지만, 그 정도면 팔자에 없는 연애도 넘치게 했다.  술 마시고 개진상된 건 매우 부끄럽지만 이젠 시켜도 못할 짓이니까 평생의 지랄 총량은 그때 '서울 안에서' 다 떨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참 나대던 시기에 마스크 쓰고 방역에 힘쓰지 않아도 됐고 거리로 나가 민주화를 부르짖지 않아도 됐으니 얼마나 다행이었나.


....크리스피크림 글레이즈드를 먹어본지도 한참 됐네.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나의 20대를 회상했고 그정도면... 굳이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아도, 뭐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한테 새치 염색이 잘 먹었다고 자랑했는데 엄마가 요즘은 왜 밝은 색의 '멋내기 염색'을 하지 않냐고 물으셨다. 나는 새치가 너무 많아서 멋내기 염색을 하기에 적절치 않고 무엇보다 '멋내기'에 관심이 없어진지 퍽 오래됐다고 했더니 엄마가 "왜, 아직 아가씬데" 했다. 나는 '아가씨'라는 단어조차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가씨라..... 

36세의 나는 63세의 엄마한테 나는 멋 내고 싶었던 거 다 해봐서 미련이 없다고 말했다. 착한 우리 엄마는 으응 하고 말았는데 속마음은 아이구 까부네 하셨을지도 모르겠다. 


뭐 이제 서울의 맛엔 흥미가 없고 다만 해를 거듭할수록 체력이 떨어져서 걱정이고 혹시 건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싶고 그냥 나와 가족의 건강만을 생각한다. 무엇보다 잠이 무척 늘었는데 요즘은 8시간 이하로 자면 하루가 온전치 않다. 삼십몇년을 살면서 내 수면시간은 7시간으로 고정되었다고 철썩 같이 믿었는데, 아니다. 7시간 자면 반드시 낮에 졸립다...그건 다른 사람들도 그런가?    

잠도 많아졌는데 문장도 한줄, 한줄, 겨우, 울면서 쓴다. 올해 써야 할 원고 분량을 할당해보니 매달 150매 정도를 써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벌써 일사분기 다 지났고 하반기에 뒤졌지 뭐.  그래도 브런치에 글 하나 게시한 오늘은 나름 선방했네. 공교롭게도 오늘 일진이 '문서업무가 잘 됨'이다.  

  



 

작가의 이전글 혼밥 가능 혼작 불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