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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네 Apr 22. 2016

비참함과 비루함에 관한 고찰

2015.5.16

비참함과 비루함에 관한 고찰.

어젯밤 느즈막히 일이 끝났다. 오늘 저녁엔 오랜만에 다같이 영활 보자던 준이오빠덕에, 예매해 둔 밤 11시 영화 시간을 맞춘답시고 꾸역꾸역 메워져있던 업무들을 하나씩 꺼내서 급하게 해치웠다. 그래도 아홉시 이십이분에서야 연구실을 나섰다. 그렇게 서대문에서 다함께 만나 영화관으로 가는 중, 뒷좌석에서 할게 없어 심심하던 차에, 늘 가지고 다니는 책 한권을 꺼내어 읽었다. 강신주의 감정수업. 두꺼운 책이라 아직까지 오일 째 끝내지 못한 책이다. 사실 두꺼워서라기보단 시간이 없었던 데에 그 이유가 더 가깝겠다. 늦은 밤이었기 때문에 핸드폰에 라이트를 켜서 책을 보고있는데 앞자리에서 말을 걸어왔다. 무엇을 읽느냐고.


그래서 첫 장에서 스피노자가 정의한 첫번째 인간의 감정. '비루함'이라는 단어를 던졌다. 운전하던 준이오빤 '비루함과 비참함의 차이가 뭐냐'고 물어왔는데 순간 우리는 무어라 대답을 단번에 해주지 못했다.잠시를 뜸들이다 내가 대답하길,
'비참함'은 다른 사람의 언행이나 외부적인 요인으로부터 자극되어 느껴지는 감정이고, '비루함'은 타인과 같은 외부적인 자극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내적으로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감정이 아닐까_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곧 이 이야기는 흩뜨려지고 다른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이 두가지 말이 어제부터 나를 따라다녀 생각케하는것을 두고 어떡해야하나 싶지만 쫓아내기에 귀찮아 그냥 더 따라다니게 둔다. 나는 비참한 사람인가 비루한 사람인가. 두가지 전부일수도, 두가지모두 아닐수도 있다. 적어도 내가 생각했던 저 두가지 말의 정의가 아주 틀린 의미가 아니라면_ 나는 내가 비참해지는 외적인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할 의무가 있고, 비루함을 느끼게끔 하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나를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철학의 대가 스피노자가 풀어낸 비루함의 정의는 _'비루함'이란, 슬픔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것_이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느끼는 것'이라면, 절제또한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인간의 감정은 스스로가 절제할 능력이 있다. 그 감정또한 나의 소유이고 내 신체의 일부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절제할 수 있다 분명. 그렇지만 간혹 엄청난 집체를 뽐내며 나를 에워싸 덮어버리는 감정, 특히나 슬프거나 화나는 등의 부정적 감정들을 이겨내 비집고 헤어나오고자 할 때, 그 무게를 걷어내기엔 너무 많은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하기에 그 감정들을 절제하고 통제하길 포기하여,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 중심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철저하게 내가 우는것이 싫다. 슬픈것이 싫은게 아니라 한낱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무력한 내 모습을 눈물 흘리는 일로 대면하는 것 같아서다. 예외는 있겠다.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때. 이를 제외하고는, 오랜시간 진득하니 생각하고 진하게 농익은 어떠한 것으로 인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렇다면 비참하고 비루함을 함께 느끼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 아래서부터 목까지 격하게 차올라서 치미는 눈물을, 정말 할 수 있는 최대로 꾸역꾸역 밀어넣었다. 억지로 다시 밀어넣어서 힘겹게 삼키고서는, 나오는길에 수고했다- 고 스치듯 생각하곤 다시 어마어마한 감정의 속으로 빠져들었다. 태어나 눈물을 이렇게까지 참아본적 없었는데, 그러는 편이 나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좋을거라 판단했다. 그날 참아진 눈물이 마치 내게 복수하듯이, 턱끝에서부터 쇄골에 이르는 목 전체에 알이 배긴 근육통을 선사했고, 덕분에 숨쉴 때, 삼킬 때마다 보란듯이 고통을 쥐어짜내주고 있다.

시간은 흐르고 있고, 많은 것은 또 변할 것이며, 그러한 현상들 가운데 나는 앞으로도 오롯이 서있겠다만, 그럴때에 나를 흔드는 것으로부터 온전히 나를 보호할 용기를 가지는 사람이길. 덧없이 어줍잖은 배려심으로 너의 표피를 먼저 생각하느라 나를 방치하지말고, 이기적이게 나를 먼저 생각해주어야 할 의무가 나에겐 분명 있음을 나이가 지남에 따라 더욱 생각한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 누구의 실수도 아니며, 그 누구의 생각도 그럴 수 있노라고 우리는 서로에게 그렇게 말을 해주며 살아갈 것이다. 물론 어쩜 그것을 말하는 입술들이 전부 진심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이 진심이라고 자신은 믿지만, 그 자신 속의 무의식은 믿지 않을지도 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속아주는 삶"을 살아가는 나와 너와 우리에게 조금 더 시간이 빨라가는 것이 능사이길 바라면서.

인간이 어떠한 순간에 느끼는 감정은, 해결이란 의미를 적용시킬 수 없다. 감정은 해결하여 끝맺음을 할 수 있는게 아니다 누구에게도. 천천히 그때그때 할수 있는 만큼씩만 그냥 흘려보내는 수 밖에. 혹여나 비참함을 원치않게 느껴버렸다면 더 이상 그것이 나를 잠식시켜 비루함으로 변모하지 않도록 철저히 절제하고 제한하는 삶과, 앞으로의 지나는 시간만큼의 지혜를 모두에게 기대하며.
우리 모두, 좋은 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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