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자 Oct 09. 2023

타이베이 저녁 9시 무렵, 태풍 조금

 이번 출장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꼽으라면.

이번 4박 5일 출장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꼽으라면.




저녁 9시 무렵이었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내일 호텔 로비에서 집결해서 행사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먼 타국에서의 고된 하루를 마치고 한국에서 온 우리 출장일행은 각자 객실로 이동하고 있었다. 실장님과 팀장님을 배웅하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괜스레 마음속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내 객실이 있는 27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도 같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흥나는 마음에 살짝 실룩거리며 객실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거하게 하품하며 호텔 침대로 몸을 던졌다. 일순간 내 무게만큼 침대가 움푹 패이며 폭 파묻히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객실키를 꽂자마자 자동으로 TV가 켜지며 귓가에 들리는 호텔 광고음악도 나의 자유를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내 안의 고생한 회사원을 재우고 내 안의 아이를 흔들흔들 깨웠다.

하루종일 노고로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신난 발가락

사실 다음날 학술대회 개최를 앞두고 막바지 준비로 하루종일 여기저기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몸은 이미 물에 젖은 솜방망이 같았다. 회사원도, 아이도 같은 육신사용하고 있기에 충분한 체력 충전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이는 계속 나를 보챘다. 사실 아이가 보채는 마음이 싫지 않았고 나도 결국 호텔 밖으로 나가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마침 태풍이 타이베이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던 때라 바람이 꽤 거칠었다. 그래도 바람이 거센 것에 비해 비는 그다지 굵지 않아서 작은 우산하나 들고 호기롭게 신나는 마음으로 나섰다. 모두가 잠에 들 준비를 하는 듯 고요한 호텔 로비를 지키던 지배인이 살짝  걱정 어린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에게 살짝 싱긋이 웃어주었다.




타이베이에 도착한 지 며칠새 익숙해진 호텔 앞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거친 바람에 헝클어진 머릿결을 마구 뒤흔드는 야자수 말고는 거리에 소리를 내는 생물이 없었다. 지도앱은 끄고 구석구석 걸었다. 하루종일 내 비서 역할을 자처했던 구글 맵스는 이제야 편히 쉴 수 있다. 하루종일 어느 특정 목적지를 찾아가기 위해 최단경로를 찾아주기 바빴던 구글 맵스의 용도는 이 순간부터 변화한다. 여기저기 발길 닿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돌다가도 원한다면 언제든 다시 따뜻한 호텔로 돌아올 수 있도록 나의 생명과 안위 보장을 위한 최소한의 목적만 갖는다. 구글 맵스도 잠시 잠들게 두었다.


저녁 9시가 넘어서인지, 태풍 탓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고요하고 어둑한 타이베이의 저녁 분위기가 좋았다. 번화가가 아닌 곳임은 분명했다. 시끌벅적하고 소란했던 대낮의 피로를 잠재워주는 기분이었다. 한 시간 전에 출장 일행들과 함께 걸었던 길목도 지났다. 그들과 같이 걸을 때는 당장 침대에 大자로 뻗고 싶을 만큼 정말 피곤했던 거리였는데 지금은 어딘가 꽁꽁 숨겨져 있었던 힘이 샘솟기 시작했다.

고요한 타이베이 저녁


이제야 편안히 의미 없는 공상에 잠길 수 있었다. 사실 오늘 낮은 아이에게는 조금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분명 생경하고 재밌는 풍경이 옆을 지나치는데도 한치도 눈길을 줄 수 없음이 슬펐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신호등이 왜 저렇게 생겼지', '타일은 왜 저 모양이지' 하며 관찰하고, 동시에 머릿속에 마구 떠오르는 혼자만의 잡념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그들은 '도착지까지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남은 시간을 고려할 때 가장 합리적인 이동 동선이 어떤 것인지'와 같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한 소통에 대체로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구불구불 간판들

타국에 방문할 때면 여러 간판들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어떠한 상점이라고 안내하는 네모난 철판이 예쁜 그림이 그려진 액자로 보이는 순간이다. 타이베이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소통의 수단이겠으나 나에게는 아무리 눈을 비비고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구불구불 그림처럼 보이는 그 기분이 좋다. 무슨 상점일지 혼자 상상해 보는 것도 놓칠 수 없는 재미이다. 이젠 영어로 적힌 간판에서는 그 신나는 기분을 느낄 수 없음이 아쉽다. 외계 행성의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하고 외계인들과 소통하고 싶은 마음으로 방문하는 출장지마다 외계어를 배우고 있지만 더 깊이 배우고 싶 않은 마음이 공존한다.


종종걸음 신호등

여기저기 재미난 풍경들을 채집하는 데 정신이 팔려 신호등이 깜빡이는 것을 발견하고 서둘러 횡단보도를 건너던 와중에 네모칸 안에서 나처럼 서두르고 있는 초록색 사나이를 발견했다. 그는 빨간 불로 변하기 직전까지 종종걸음을 더욱 재촉하며 나와 함께 달려주었다. 우리나라는 초록불이 꺼지기 임박해지면 뛰지 말고 다음 신호에 건너라는 차분한 기계음이 괜스레 눈치 보게 만들곤 하는데, '타이베이는 좀 더 인간적인 신호등을 갖추고 있군!' 하는 생각이 들면서 피식 웃음이 났다.

나랑 같이 뛰어주는 초록색 사나이
더듬더듬 동화책 쇼핑

조금 더 걸었을까, 곧 하루 장사를 마감할 것 같은 조용한 서점을 발견했다. 비바람을 헤치고 돌아다니느라 눅눅해진 기운을 지울 겸 책 구경도 할 겸 방문했다. 가지런히 진열된 외계어로 가득한 책들을 둘러보며 진작 서점에 와볼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책이나 집어 들고 펼쳐봤는데 정말 예쁜 그림이지 뭔가. 아, 동화책이 더 재미있겠다, 하는 생각이 스쳐 동화책 코너로 이동했다. 마침 아이들을 위한 죄그만한 의자가 2개 있었다. 맞은편 의자에는 이미 어떤 여성분이 앉아있었다. 동화책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그냥 다리를 조금 쉴 곳이 필요했던 건가. 아무튼 별로 편안하지 않은 표정을 한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 옆에 나도 쭈그리고  의자에 몸을 맡겼다.

책 中, "돌아오는 길에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보지 뭐야, 큰 호랑이다!"

역시나 동화책이 더 재미있었다. 출장오기 직전에 HSK 4급을 취득하고 왔는데 딱 동화책을 읽어볼 수 있는 수준이었나 보다. 더듬더듬 한 자 한 자 읽을 때마디 구불구불 예쁘기만 한 그림에서 짤막한 의미 덩어리로 탈바꿈하는 현상이 신기했다. '커다란 호랑이를 갖고 싶어.' 한 음 한 음 나지막이 읊조리는데 맞은편 여성분과 눈이 마주쳤다.

동화책을 하나 사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중국어로 더듬어 보며 가장 인상적인 책을 고르고 싶었다. 그래도 너무 비싼 건 말고. 이왕이면 그림도 예쁘면 좋겠다. 책장을 뒤적이다 짙푸른 녹색 책이 눈에 밟혔다.



저멀리 지나가는 기차를 보며 꿈을 꾸는 젖소

더 듬 더 듬 한 자 한 자


드넓은 녹색 초원에만 살던 젖소가 울타리 너머 지나가는 기차를 보고 다른 세계로 떠나보고 싶은 꿈을 품고선 작은 새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였다. 일평생을 보내던 익숙한 초원을 벗어나 도전하는 젖소의 모험라니. 한가득 꿈을 품은 채 캐리어에 여물을 챙기는 젖소의 신이 난 엉덩이에서 내 모습이 비쳐 보이는 듯했다. 빨간 노을이 진 사원, 수확을 앞둔 노란 들판, 새하얀 눈밭, 깜깜한 도시의 저녁을 돌아다니는 젖소의 자유로움이 좋았다.


여행 막바지에 젖소는 그래도 나의 초원이 최고라며 흡족한 마음으로 도전을 마무리한다. 젖소는 충분히 도전한 것일까, 아니면 더 이상 도전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깨달은 것일까. 겸허히 만족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작은 새와 함께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결말은 살짝 뭉클하기까지 했다. 아쉽게도 작은 새와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은 아직 해독할 수 없었다. 꽤 중요한 구절인 듯한데. 중국어를 더 배워서 다음에 또 해독해 봐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사유와 행동, 그리고 용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