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 중에 기분 나쁜 일로 괜시리 맘이 상해선 5시에 일찍 도망나오듯 퇴근해서 자전거를 타고 귀가했다. 겨울이라 손이 좀 시릴지언정 바람을 가르며 차가운 공기가 내 피부와 귓가에 부딪힐 때는 낮동안의 피로도 같이 날아가는 기분이 든다. 평소보다 조금이라도 일찍 퇴근한 날이면 약속이나 했듯이 집 앞 카페로 달려가곤 하는데, 오늘은 자전거 페달에게 화풀이하듯 더욱 세게 밟으며 카페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퇴근길 해지던 하늘, 예쁘지만 조급히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얼른 이 그림을 카페에 앉아 감상해야하므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겨울이라 해가 금방 자취를 감춰서
나의 행복한 순간이 1분이라도 빼앗길까봐.
지극히 평범하지만 가장 큰 행복 중 하나. '퇴근 후 5시 무렵, 집 앞 카페.'
평일 5시. 오후라기도 그렇고 저녁이라기도 애매한 시간. 점심시간에 잠깐 붐볐다가 저녁식사를 마친 손님들을 맞이하기 전에 잠시 조용한 집 앞 작은 카페.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창가자리에 혼자 앉아 햇빛을 맞으면서 빈 하늘이나 구름을 보고 빈 종이에 그냥 낙서도 해보다가, 멍하니 아무 생각에 잠겼다가, 그러다 일기도 쓰는 일. 아, 두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좋아하는 음악에 잠겼다가 리듬에 맞춰 발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어 주면 더욱 금상첨화다.
지극히 평범할지 모르지만 아주 소중한 나의 취미이자 가히 나의 일상 중 가장 큰 행복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다. 깜깜한 밤하늘도 나쁘진 않지만, 꼭 햇빛을 쬐고 파란 하늘과 구름을 감상하며 일련의 이 행위를 즐기는 것이 훨씬 좋더라. 햇빛이 주는 비타민 D가 도파민을 분비시키기 때문만은 아니다.
'퇴근 후 5시 무렵 ver. 여름.' 이 글을 쓰다가 갤러리를 뒤져서 올해 5월 19일 동일한 카페에서 찍었던 순간을 찾았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 ?.. 저를 알아 보세요?"
"그럼요, 기억하죠. 오늘도 아메리카노 시키실거죠^^?"
아직은 분이 덜 풀려 살짝 일그러진 눈썹을 하고선 자주 가는 집 앞 카페에 도착해 주문하려는데, 사장님이 내게 말을 걸었다. 순간 동그래진 눈으로 사장님과 눈을 맞추곤 나를 아느냐고 물었는데, 나를 기억하신단다. 아니, 아메리카노를 시키는 사람이 나뿐이겠나. 매번 메뉴판 앞에서 뭐 시킬지 고민만 하다 결국 뒷 맛이 깔끔한 그 맛을 잊지 못해 아메리카노를 시키곤 하는데, 오늘도 아메리카노를 시키겠냐고 묻는 사장님을 보니 '좀 다른 메뉴도 시켜줄 걸 그랬나' 하는 마음이 한 구석에 들었다. 아무튼 오늘도 어김없이 아메리카노를 시켰고, 요새 야근이 많아서 자주 못 와서 미안하다고 작은 푸념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혼자 창가에 앉아선 하릴없이 멍하니 한 시간쯤 있다 가는 손님이라 그녀의 눈에 띄었던 걸까. 일행과 담소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바삐 노트북을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요즘 같이 생산성이 중요한 시대에 시간을 바닥에 내다버리는 사람 같아 보였던 건가. 이유가 뭐가 되었든 전혀 예상치 못한 이방인과의 기분 나쁘지 않은 접촉에 일그러져있던 눈썹이 살짝 풀어졌다.
오후동안 과열되었던 머리를 식히듯 오늘도 주문해버린(?)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힘껏 빨아당기며 여느 때처럼 이어폰을 끼고 낙서에 열중했다. 아, 살 것 같았다. 시간은 이제 오후 5시 반 밖에 안되었는데도 해는 이미 산 너머로 자취를 감춰서 조금 아쉬웠지만 말이다. 그러다 종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서 고개를 들었는데, 또 사장님이었다.
"혹시 저녁 안 드셨어요?"
"네?.. 먹긴 했는데..."
"다름 아니라 저희 케익 신제품이 나와서요, 배부르지 않으시면 한 번 맛보실래요?"
연이은 사장님의 호의에 어안이 벙벙했으나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니 내 일그러진 눈썹이 티가 났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님 오늘 기분 좋은 일이 있으셨나? 그것도 아니라면 꽤 자주 방문하는 손님의 얼굴이 찌푸려져 있을 때는 케익을 건네주자는 가이드라인이라도 있는 걸까? 하는 괴상한 생각까지 들었다.
괴상한 상상
그렇게 몇 분 뒤 내 탁자에 도착한 예고없이 찾아온 손님은 자그맣고 네모난 빙하 조각같은, 각 단면에는 딸기 조각이 박혀있고 빙하의 꼭대기에는 온전한 딸기 하나가 꽂혀있는 조각 케이크였다.
친절한 사장님께 경의를 표하고 의미있는 오늘을 기념하고자 카페에서 직접 끄적여본, 지금은 내 뱃속에 있는 딸기케익.
사장님의 이유 모를 호의와 적당히 달큰한 딸기 케이크 덕분에 어느새 기분이 한층 더 좋아져 있음을 발견했다. 달큰한 딸기를 한 입 베어물고선 오후에 있었던 일들을 곱씹어 봤는데,
에휴 그래. 그렇게까지 화 날 일이었나, 싶었다.
회사라는 조직 내에서는 꽤나 비일비재한 애매한 업무분장과 그에 따른 업무과중에 관한 일이었다.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분명 화가 날 일은 맞지만 내 기분을 오래 상하게 할 일까진 아니었다.
계속 기분 나빠하기엔 한정된 내 시간은 매우 소중했고, 그 사건과 그 때의 감정들을 곱씹는 일은 나의 정신에너지를 갉아 먹는 벌레를 내 머릿속에 스스로 키우는 셈이었다.
누군가 꽤 유명한 사람이 그랬다. 기분이 태도가 되게 해선 안되고, 사람의 기분이라는 것은 사실 손바닥이나 종이를 뒤집는 일과 같다고. 어느새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발가락을 까딱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오늘의 귀인이신 카페 사장님과 딸기 케익 한 조각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사실 이미 배가 많이 부른 상태였지만 내 기분을 단숨에 뒤바꿔주시고 귀한 교훈을 일깨워준 사장님께 보답하고자 딸기 케익을 모조리 깔끔하게 해치웠다.
오늘도 여느때처럼 거의 1시간 넘게 홀로 고요히 시간을 보냈고 카페를 나서는 길엔 너무 맛있었다며, 덕분에 하루를 참 기분 좋게 마무리하게 되었다며, 사장님께 감사한 마음을 담아 활짝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의 이 한마디와 웃음이 그녀에게도 별 볼일 없이 지나갈 뻔한 오늘 하루에 작은 의미를 더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