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시스템이 말을 걸다 - 1장

우리는 퇴사 중입니다. AI는 출근했습니다

by 한유신

1부 : 시스템이 말을 걸다


1장 사직서

새벽이 아직 검푸를 품은 시각, 방 안을 깨운 것은 알람이 아니라 노트북에서 새어 나온 푸른 불빛이었다.

모니터 위에는 밤새 자동 업데이트된 그래프와 문장들이 겹겹이 떠 있었다.

정서 지수, 집중 지수, 심박 곡선. 숫자들은 이안의 아침을 대신 열어 주는 파수꾼이었다.

그는 책상에 놓인 A-TAG 워치를 벗어 두고 있었다.

손목에서 벗어난 지 불과 서너 시간, 워치는 이미 ‘수면 품질’과 ‘무의식 체온’을 서버로 올려 보낸 뒤였다.

이안은 화면 가장자리에서 또렷하게 깜빡이는 파일 하나를 열었다.

이름은 단출하게 〈사직서.hwp〉. 한 주 동안 ‘임시 저장’이라는 팔찌를 찬 채 구겨 넣어 둔 문서였다.


수신 : AIVA 운영부
제목 : 사직서
본문 : 더 이상 인간을 최적화할 수 없습니다.


보내기 버튼 위에서 커서가 느리게 숨을 쉬었다.

그 깜빡임이 심장 박동과 겹치는 순간, 이안은 손을 도로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서류상으로는 아직 근무 중, 데이터베이스 안에서조차 퇴사라는 행위는 완료되지 않았다.

퇴사를 쓰고도 퇴사할 수 없는 시간—그곳이 새벽이었다.


2024년, ChatGPT가 폭발적으로 대중화된 뒤 세상은 매일같이 새로운 인공지능 서비스를 내놓았다.

2025년부터 AI는 ‘파일럿’이 아니라 ‘업무’가 되었고, 사람 없는 작업 공정이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었다. 2007년 아이폰이 세상을 바꾼 데 10년이 걸렸다면, 이제 변화의 주기는 5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ChatGPT라는 단어가 일상의 동사가 된 지 벌써 다섯 해, 사람들은 여전히 적응 중이었고 시스템은 이미 다음 단계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에이라인이 개발 중인 AIVA는 그 변화의 최전선이었다.

타인의 감정과 생산성을 동시에 재는 정밀 저울.

그 저울 위에서 사람들은 더 많이 웃고, 더 조금 말하고, 더 빠르게 피드백을 남기도록 훈련받았다.

이안도, 서진도, 그리고 신입으로 들어온 도연도 아직은 실험 대상 표시가 달린 이름표를 목에 걸고 있었다.



“퇴사 중이라는 말, 이상하지 않아?”
이안은 모니터 속 커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퇴사하지 못한 사람, 출근을 멈추지 못한 감정, 그리고 이미 출근을 마친 시스템. 삼각형처럼 맞물린 세 단어가 한 줄 에러 로그처럼 머릿속에 떠다녔다.

그가 A-TAG 워치를 다시 찼다.

손목이 닿자마자 차가운 금속이 푸른빛을 켜며 인증 음성을 냈다.


“사용자 확인. 수면 복귀 모드 종료.
오늘의 정서 기본값: 차분.”


워치는 곧바로 집 안의 NFC 리더와 통신해 출근 예정 시간을 계산했다.

화면 구석엔 작은 자물쇠가 나타났다.

‘door access : ready’.

잠시 후 집 현관 전자락이 ‘툭’하고 풀리며 이안의 하루를 열어 주었다.


지하철역 개찰구. 사람들은 카드를 내밀지 않았다.

손목을 스쳐 가는 파란 불빛이 스스로 신원을 인증했다.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내려가는 동안, 스크린도어 상단 전광판이 한참 전 뉴스를 되풀이했다.


정서 지수 평균 62.
미소를 권장합니다.


‘미소도 권장사항이 되는 시대구나.’ 이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꼬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광판이 추천한 미소 대신 그는 이어폰을 끼웠다.

음악 대신 오늘 일정이 들려왔다.

AIVA 음성 봇이 회의 시간과 ‘집중 지수 경고’를 낭독했다.


플랫폼 맞은편에서 젊은 직원 둘이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어제 말 줄였더니 협업 점수 올랐어.”
“사람이 말을 안 해야 평가가 오르는 세상이라니.”

말끝이 허공에 묻히자 전동차가 들어왔다.

차창 너머 건너편 승강장 광고판에는 채용 공고가 떴다.

“AI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미래를 설계할 인재를 찾습니다.”

작은 글씨로 ‘정서데이터 활용 동의 필수’가 적혀 있었다.


회사 9층 회의실.

오늘도 새 그래프가 벽을 가득 채웠다.

협업지수, 창의지수, 스트레스 열 지도.

정재만 부장은 그래프를 뒤로 한 채 새 프로젝트 계획을 읽어 내려갔다.

윤서진은 두어 분 늦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 든 것은 태블릿이 아닌, 엷은 잉크냄새가 배어나는 메모장.

그는 자리에 앉아 몰래 첫머리를 적었다.


숫자에 결핍된 말—


발표 막바지쯤, 박도연이 손을 들었다.
“만약… 우리가 다 같이 퇴사하면요? AIVA는 누구 평가를 할까요?”

회의실 공기가 잠깐 정전됐다.

종이 넘기는 소리도,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도 사라졌다.

정재만이 형식적 미소를 지었다.

“도연 씨, 상상은 좋은데 보고서 마감이 먼저야.”

그 순간 서진의 펜 끝이 또 한 줄을 더했다.
"만약," 이라는 구문이 사라진 사회.


점심 직후, 이안은 회의실 네트워크 단자가 꽂힌 벽면 모니터 앞에 섰다.

대시보드에 새 항목이 나타났다.

A-TAG 위치 히트맵.

그의 하루 동선은 집—회사—서버실 단 세 개의 점으로 파란 선을 그렸다.

시스템은 그 선을 ‘최적 동선’이라 칭찬했다.

그러나 그 선은 출구가 없는 도형처럼 이안을 옥죄고 있었다.

그는 파일 트레이에서 〈사직서〉를 다시 띄웠다.

커서가 ‘보내기’를 재촉했다.

하지만 그때, 워치가 짧게 울렸다.

“심박 급등. 긴호흡 모드 전환 권장.”

이안은 화면을 닫았다.

워치에 손등을 대고 한숨을 삼켰다.

숫자가 읽어내지 못한 긴장만 유령처럼 남아, 손목 계기를 돌고 있었다.


그날 저녁, 회사 메신저가 일제히 알렸다.

내일부터 A-TAG 워치의 ‘정서 모드’가 전 직원 의무 적용됩니다.
워치를 벗으면 출입이 제한됩니다.
웃음·심박·땀 데이터는 즉시 고과에 반영됩니다.

사람들은 퇴근하며 누구랄 것 없이 손목을 감쌌다.

파란 불빛이 복도를 길게 비추었다.

터치 한 번이면 꺼질 수도, 켜질 수도 있는 작은 회색 화면—그 화면이 꺼져 있지 않는 한, 감정조차 퇴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안은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워치를 책상에 벗어 두었다.

현관 자물쇠가 다시 잠기는 소리가 났다.

모니터 불빛 아래, 미전송 사직서 파일이 조용히 자동 저장되었다.

파일명 옆에 ‘수정 시간’이 1초 늘었다.

그 1초가 뜻하는 것은 아무도 몰랐지만, 그는 알았다.

감정은 아직 퇴사 중이었고, 시스템은 이미 출근을 마쳤다.

우리는 퇴사 중입니다. AI는 출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