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퇴사 중입니다. AI는 출근했습니다
2부 · 8장
정재만의 종이 인사카드
창문에 매달린 오후 햇살이 흐릿해질 무렵, 정재만 부장은 오래 잠긴 서랍을 한 칸 열었다.
서랍 안쪽엔 얇은 서류철과 바랜 카드키가 뒤엉켜 있었다.
그리고 맨 아래, 들뜬 종이 뭉치가 손끝에 걸렸다.
흑백 잉크가 눅눅해진 모서리, 회사 로고가 아직 바뀌기 전이던 시절— 종이 인사카드였다.
1 ― 스물세 살의 얼굴
카드마다 오래전 증명사진이 작게 붙어 있었다.
윤서진, 아직 반묶음 머리에 긴장한 미소.
이안, 스프링 수첩을 꼭 쥔 신입 연구원.
그리고 박도연, ‘만약’이라는 단어를 아직 입에 올리기 전의 맑은 눈.
이름 아래에는 손글씨로 적힌 짧은 코멘트가 있었다.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한 사람”,
“말은 느리지만 생각은 길다”,
“회의가 끝난 뒤에도 아이디어가 남는다.”
그 시절 평가는 숫자가 아니라 문장이었다.
정재만은 그 문장을 자필로 적던 팀장이었다.
2 ― 알림음 없는 회의
그는 회의실 불을 켜지 않고 앉았다.
A-TAG 워치 화면이 어둡게 전환되며 “정서 회복 모드”라는 작은 글자를 띄웠다.
감시가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이었다.
종이 카드 끝을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잉크 가루가 희미하게 흩어졌다.
당시엔 팀장이 부하 직원에게 “요즘 웃음이 줄더라”처럼 어색한 말도 걸었다.
지금 AIVA가 ‘웃음 빈도 감소’라고 표기하는 것을 정재만은 그저 등 두드려 주는 식으로 해결했었다.
3 ― 흔들리는 그래프
갑자기 워치가 짧게 진동했다.
심박 상승 — 휴식 권장.
정재만은 알림창을 지웠다.
책상 위 노트북을 열자 히트맵 그래프가 다시 떠올랐다.
옥상 빨간 점은 주황으로 다소 옅어졌지만, 휴게실에 새 점이 찍혀 있었다.
스탬프처럼 번진 분홍색—만약 또 다른 누군가가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문장을 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는 가볍게 허리를 폈다.
이제 다시 얼굴을 들고 팀원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닫히지 않는 서랍 속에서 종이 인사카드 하나가 바람에 들썩였다.
사람은 숫자 대신, 사람이 남긴 문장을 기억한다.
4 ― 서랍을 닫으며
정재만은 오래된 카드를 제자리에 눕혔다.
그러고는 혹시라도 들킬까 싶어 카드 위에 최신형 A-TAG 워치 매뉴얼을 덮어 두었다.
워치는 낮게 진동하며 말했다.
“정서 지수 안정.
알림이 곧 재개됩니다.”
그의 손등에 작게 새겨진 문장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다.
“카드키 찍고도 웃는 사람만 진짜 퇴근입니다.”
웃음이 효율이 되기 전, 출근과 퇴근이 차이 나던 시절의 농담.
서랍이 드르륵 닫히며 먼지가 일었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순간 퍼졌다가 에어컨 바람에 날아갔다.
정재만은 다시 화면을 바라봤다.
그래프는 여전히 매끄러웠다.
하지만 거기에 적히지 않는 울퉁불퉁한 마음의 곡선을 그는 종이 카드 귀퉁이에서 방금 보고 온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