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질문이 남는 사람들 - 9

우리는 퇴사 중입니다. AI는 출근했습니다

by 한유신

2부 · 9장

감정 워치를 끄고 먹자

연말이라지만 회사 건물 앞 가로수엔 전구 대신 센서가 달려 있었다.
조명보다 데이터가 우선인 시대—빛은 장식이었고, 불빛의 깜박임은 A-TAG 기지국의 신호 세기 그래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재만 부장은 오래된 관습을 포기하지 않았다.
“송년회는 해야지. 시간 되는 사람만 옵시다.”
그의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대부분 ‘옵시다’보다 ‘되는’ 쪽에 마음이 걸렸다.
워치가 퇴근 로그를 찍지 않으면 출입이 제한되니까.


1 ― ‘프라이버시 모드’라는 약속

회사 근처 낡은 식당, 정미순 여사의 국밥집.
음식 냄새는 기록되지 않는 향기로 방 안을 채웠다.
식당 입구엔 카드 리더기도, NFC 태그도 없었다.

도어벨 따위 없는 목재문을 들어서며 정재만이 테이블 중앙을 두드렸다.

“다들 퇴근했으니… 워치는 끄고 먹읍시다.”

순간 조용한 파문이 번졌다.
서진이 가장 먼저 손목을 툭 건드렸다.
A-TAG 화면이 어두워지고, 푸른 불빛이 꺼졌다.
이어 이안, 도연, 지훈—
워치 네 개가 거의 동시에 ‘프라이버시 모드’로 전환됐다.

식당 안엔 어둑한 전구 불빛과 김 모락모락 오르는 국물 냄새만 남았다.


2 ― 기록되지 않는 대화

서진은 젓가락을 들며 웃었다.
“이 공간, 히트맵엔 공백으로 찍히겠네요.”
도연이 숟가락을 들고 맞받았다.
“만약 공백이 증거가 된다면?
누군가가 ‘왜 이 시간에 아무 로그가 없지?’ 하고 의심할 거야.”

이안이 한입 국물을 삼키고 조용히 말했다.
“그때는… 우리가 정말 사람이었단 증거겠죠.”

정재만이 두 팔을 벌려 테이블을 가리켰다.
“사람다운 건 테이블 가운데 국 하나면 충분해.”

워치가 꺼지자, 누구도 눈치를 보지 않고 말끝을 길게 늘였다.
형용사와 감탄사가 살아났다.
웃음이 쓰다듬는 공기가 느릿하게 떠올랐다.


3 ― 서진의 문장

식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윤서진은 조용히 수첩 한 장을 뜯어 펜으로 단정한 글씨를 적었다.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문장은 짧았고, 잉크는 선명했다.
이안이 그 글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시스템을 흔들죠.”
서진은 눈웃음을 건넸다.

옆자리 지훈이 물었다.
“저 문장을… 우리 AI 캠페인 카피로 써도 되나요?”
젓가락을 멈춘 정재만이 고개를 저었다.
“숫자가 감정보다 앞서면, 결국 또 다른 그래프일 뿐이야.
카피가 되려면, 먼저 사람 입에서 퍼져야지.”

식당 천장의 낡은 형광등이 깜빡였다.
마치 ‘퍼져라’ 하고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4 ― 로그 없는 17 분

밥상 위 잔이 비워지고, 이야기가 가벼운 과거로, 미래로 번지는 동안 테이블 시계는 17 분을 넘겼다.
A-TAG 워치가 꺼져 있다는 사실이 잊힐 만큼.

도연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 송년회라 해도 괜찮아요.
기억될 건 로그가 아니라… 오늘 국물 맛이니까.”

정미순 여사가 주방 쪽에서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국물 맛은 비밀이야. 레시피 따위 없어.”
그리고는 다시 불을 세차게 올렸다.
언제 사라질지 모를 온기지만, 밍밍해지기 전에 한 번 더 끓여 내겠다는 집념 같은 불빛이었다.


5 ― 워치를 켜는 순간

식당을 나설 때, 사람들은 문 앞에서 워치를 다시 켰다.
파란 불빛이 깜빡이며 재부팅됐다.


“접속 재개.
출근 귀가 동선 확인.”


모두의 손목이 동시에 떨렸다.
공백이었던 17 분이 순식간에 닫혔다.
그러나 워치는 알 수 없었다—그 허공을 채운 냄새, 소리, 웃음,
그리고 잉크가 마르는 속도.

서진은 주머니 속 노트를 꺼내지 않았다.
이안은 여전히 사직서 파일을 보내지 않았고, 도연은 만약이라는 물음표를 품은 채 전철역으로 향했다.
정재만은 마지막으로 문 잠금을 확인하며 속삭였다.

“밥 먹는 데 감정이 필요 없는 세상이라면, 밥을 먹을 이유도 없다.”

문이 닫히고, 식당 간판 불이 꺼졌다.
거리 가로등은 램프 교체 날짜를 자동으로 서버에 보고했고, 파란 불빛이 다시 도심 위를 그물처럼 덮어 갔다.

숫자가 효율이라면, 효율 밖에 남은 것은 지나치게 뜨겁거나, 지나치게 뜨거웠다는 기억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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