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퇴사 중입니다. AI는 출근했습니다
2부 · 10장
기억되지 않아도 남는 말
아침 회의 시작 전, 복사실이 유난히 붐볐다.
재생용 A4 꾸러미 위에 낯선 문구가 인쇄된 전단이 잔뜩 쌓여 있었다.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 당신의 감정, 당신의 말
폰트는 회사 공식 서체도 아니었고,
하단엔 작성자도 출처도 표시되지 않았다.
그런데 용지 뒷면 QR 코드가 A-TAG 워치로 스캔 가능하다는 사실만큼은 누군가 세심히 계산해 둔 듯했다.
1 ― 전염
전단은 순식간에 복도와 책상 위로 번졌다.
휴게실 냉장고, 회의실 테이블, 심지어 엘리베이터 벽면에도 스카치테이프로 조용히 붙어 있었다.
AIVA 감시 팀이 알아챘을 땐 이미 늦었다.
프린터 로그를 추적해도 파일명은 ‘unknown.tmp’.
추출 계정은 ‘시스템 캐시’로 뜰 뿐이었다.
“이건… 내부인이란 얘긴데.”
보안 담당자가 중얼거리자 정재만은 고개를 들어 모니터를 바라봤다.
히트맵에 새로 찍힌 작은 점들이 파도처럼 번져 있었다.
2 ― 오해
같은 시간, 마케팅 채널에 긴 공지 하나가 올라왔다.
〈AIVA 감성 캠페인 콘셉트 제안〉
슬로건 후보 :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생성 모델 버전 4.8이 작성한 초안입니다.
공지 작성자는 외주 광고대행사.
서진은 모니터를 읽다 말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생성 모델 버전 4.8’이라니.
그 문장은 분명 자신의 손글씨였다.
오픈 채팅창엔 즉각 반응이 날아왔다.
“역시 AI 카피가 감성을 잡네!”
“사람이 못 쓰는 뉘앙스였어.”
서진의 워치는 심박이 치솟는 그래프를 띄웠다.
“정서 진폭 상승 — 휴식 권장.”
그녀는 알림을 밀어 버렸다.
3 ― 먼지 속 문장
복잡한 하루 끝, 서진은 복사실로 들어갔다.
대형 파쇄기 옆 상자에 아직도 전단이 남아 있었다.
종이를 한 장 들어 햇빛 아래 비추자
잉크가 고르게 퍼지지 않아 문장 둘레가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내 글씨엔 항상 잉크 자국이 남는데…”
서진이 중얼대자, 뒤에서 이안이 작게 대답했다.
“그래서 이게 진짜라는 증거가 되죠.”
서진은 뒤돌아섰다.
이안은 복사기 덮개에 기대 서 있었다.
빛 바랜 종이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겹쳤다.
“사람이 쓴 건지, AI가 쓴 건지—
결국 누가 기억하느냐가 정답 아닐까요?”
이안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
그때 두 사람의 워치가 동시에 울렸다.
“비공식 군집 — 주의.”
알림음이 복도까지 파고들었다.
서진은 종이를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숫자로 증명 못 해도 남는 말이 있단 거, 적어도 우리 둘은 알고 있네요.”
4 ― 서버실의 보고서
밤 11시,
이안은 AIVA 대시보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단 문구가 OCR로 추출돼 “생성 모델 4.8 유사도 91%”라는 태그가 붙어 있었다.
그는 자동 분류를 'Human Origin?'으로 덮어썼다.
메타데이터 항목이 회색으로 변하며 물음표가 달렸다.
워치가 울렸다.
“야근 4시간 경과 — 피로 알림.”
커서를 가져가니 팝업창이 떴다.
문장 출처 미확인.
감성 데이터 임시 보류.
이안은, 확인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대신 빈 칸에 느릿하게 메모를 남겼다.
― 확인 보류 사유 : 숫자로 증명할 수 없는 감정.
파일을 저장하고 모니터를 껐다.
서버실 형광등이 꺼지자 창밖 도시 불빛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5 ― 떠도는 소문
며칠 뒤, 사내 익명 게시판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AIVA가 감정을 이해하려면, 먼저 손글씨를 배우라.”
댓글이 달렸다.
“알고 보니 인간이 쓴 카피래!”
“AI가 슬로건도 베끼는 세상.”
“숫자로 못 재니까 기어이 사라질 문장이지.”
그러나 누군가는 ‘좋아요’ 대신 작은 물음표 버튼을 눌러 두었다.
그 물음표는 클릭해도 어떤 설명도 뜨지 않았다—
그저 여전히 시스템이 모르는 여백이라는 뜻이었다.
종이를 반으로 접은 채 서진은 주머니 속 글씨 자국을 문질렀다.
잉크 자국은 손끝으로 느껴졌다.
문장이 지워져도 눅진하게 남는 감각.
그 감각은 그래프도, 히트맵도, OCR도 아직 읽어 내지 못하는 언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