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퇴사 중입니다. AI는 출근했습니다
3부 · 13장
국물은 로그가 안 된다
정미순 여사의 식당은 점심시간마다 ‘가장 가까운 외부’였다.
건물 현관을 지나 횡단보도를 한 번 건너면, A-TAG 기지국 신호가 어색하게 약해졌다.
워치는 여전히 위치를 기록했지만 냄새까지는 담지 못했다.
1 ― 감칠맛의 시작
문을 열자 구수한 된장 냄새가 얼굴을 감쌌다.
정미순 여사는 국을 끓이느라 이마가 벌겋게 달아 있었다.
“밥 먹으러 왔으면, 워치 화면부터 꺼요.”
그녀는 국자로 가스불을 휘저으며 손짓했다.
“숫자로 맛을 평가할 작정이면 그냥 돌아가고.”
이안·서진·도연·지훈 네 사람은 말없이 프라이버시 모드로 전환했다.
파란 불빛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회색 스크린이 검은 거울처럼 반짝였다.
“오늘은 된장찌개에 들깨 칼국수야.
레시피? 없어.”
정미순 여사가 호탕하게 웃었다.
“국물은 레시피가 아니라 하루 기분으로 끓이는 거니까.”
2 ― 뜨겁고 흐릿한 데이터
서진이 첫 숟가락을 입에 넣자마자 워치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체온 상승 — 향·맛 요소 미감지.”
아무리 최신 센서라도 ‘맛’은 추출하지 못했다.
서진은 알림을 밀어 두고, 숟가락을 다시 국물로 담갔다.
“숫자로 등록 안 되는 맛이네요.”
도연이 웃었다.
“만약 이 맛을 그래프로 딴다면, 날짜마다 곡선이 들쭉날쭉일 거예요.”
지훈은 갓 지은 밥을 푹 떠서 된장국에 말아 넣었다.
워치가 새로 감지한 것은 다만 ‘심박 안정―포만감’이었다.
3 ― 부장의 묵은 기대
뒤늦게 들어온 정재만 부장은 식탁에 앉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이 국물,
옛날에 내가 손으로 평가표 적던 시절 맛이랑 똑같네.”
그가 예전 종이 인사카드 얘기를 꺼내자 정미순 여사가 멀리서 소리쳤다.
“그러면 잘 끓였단 소리지!
사람이 먹자고 끓이는 국이라
사람 입으로 인정받으면 됐지.”
부장이 미소 짓는 순간 워치가 ‘정서 진폭’이라는 불완전한 값을 띄웠다.
그러나 누가 그 미소에 ‘성공’ or ‘실패’를 태그할 수 있을까?
표준 분류엔 없는 항목이었다.
4 ― 작은 문장, 첫 피드백
식사를 마칠 즈음, 서진이 종이 냅킨에 짧은 글씨를 남겼다.
국물은 로그가 안 되니까 오늘 기록은 우리의 혀에 맡겨 두자.
이안은 그 글을 보며 A-TAG 워치에 새로 생긴 ‘동료 코멘트’ 칸을 열었다.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50자 제한—숫자는 작지만 의미는 넉넉했다.
“국 한 그릇으로,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저장 버튼을 누르자 회색 칸이 초록으로 변했다.
AIVA가 즉시 해석하지 못한 두 줄.
그러나 시스템 로그엔 새로운 감정 좌표가 찍혔다.
5 ― 알 수 없는 포만감
가게를 나서기 전, 정미순 여사는 빈 그릇을 바라보며 말했다.
“국물까지 싹 비웠으니 마음이 좀 채워졌겠지?”
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로는 ‘포만감’이라던데, 제게는… 방패 같은 맛이었어요.”
정재만이 웃었다.
“그래, 방패.
세상이 숫자로만 뛰어도 사람은 가끔 국물 뒤에 숨으면 되니까.”
워치가 동시에 켜졌다.
센서가 다시 심박·땀·온도를 재기 시작했지만 국물의 온도만큼은 기록되지 않았다.
그 뜨거움은 이미 몸 안으로 스며든 뒤였다.
문을 나서며 서진은 생각했다.
그래프는 다시 파란 선을 그리겠지.
하지만 오늘 국물 맛은 아무 색으로도 칠할 수 없을 거야.
바람이 식당 굴뚝 위로 김을 올려 보냈다.
김은 곧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속은 아직 따뜻했다.
그 따뜻함엔 숫자도 태그도 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