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퇴사 중입니다. AI는 출근했습니다
3부 · 12장
출근하지 않아도 출근한 상태
아침 여섯 시,
이안은 아직 눈을 뜨지 않았는데도 워치가 먼저 깨어 있었다.
침대 옆 무선 도킹 스탠드에서 파란 불빛이 점멸하며 그의 심박·체온·호흡수를 서버로 실어 날랐다.
“수면 효율 83 %.
예상 기상 시각 — 06 : 42.”
알림음이 속삭이듯 흘렀다.
그러나 이안은 여전히 꿈 한 귀퉁이에 붙어 있었다.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출근 준비가 절반은 끝나 있는 세계—
워치는 이미 ‘자리 이탈 없음’이라는 완벽한 기록을 적어 두었다.
1 ― 이안의 파란 선
9 시 정각,
대시보드가 자동으로 갱신되자 히트맵에 파란 선 하나가 또렷하게 그어졌다.
집 → 역 → 사무실 → 서버실 → 역 → 집.
기울기 없는 단선.
점 하나도 번지지 않는 최적 동선.
AIVA는 그 선을 ‘우수 루틴’이라 칭찬했고, 알림은 차분한 음성을 덧붙였다.
“출근 동선 최적화 달성 120일차.
집중 지수 74, 스트레스 지수 42.”
숫자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안의 가슴 한복판은 알 수 없는 뜨거움으로 울렸다.
퇴사 중인 사람이 이렇게도 성실히 출근할 수 있다니, 그래프는 그 모순을 이해하지 못했다.
2 ― 멈춰 선 엘리베이터
오전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이안은 습관처럼 서버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워크플로 앱이 짧은 경고를 띄웠다.
“이동 경로 변경 감지.
예상 회의실 복귀 지연 5분.”
그 순간, 서진이 열려 있던 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같이 내려가요?”
서진의 손목엔 어젯밤 등록된 초록 점—‘감성 코멘트’가 아직도 반짝이고 있었다.
이안은 잠시 머뭇거리다 문을 붙잡았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열렸다.
워치는 두 사람의 군집을 감지하고 낮게 떨었다.
“동선 겹침 — 감정 로그 측정 중.”
둘은 동시에 볼륨을 낮추듯 웃었다.
말은 없었지만, 엘리베이터 내부 카메라가 없는 틈새 공기가 순간 따뜻해졌다.
3 ― 서버실 섬광
서버실 조도가 자동으로 올라가자 벽면 모니터엔 전날 ‘회색지대’ 로그가 흐르고 있었다.
감성 코멘트는 여전히 1개.
빈 칸 옆엔 연필 모양 아이콘이 깜빡였다.
“여기에… 누가 문장을 하나씩 쓴다고요?”
서진이 화면을 가리켰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턴 자유 입력 테스트예요.
사람이 사람에게 남기는 50자.”
서진은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그녀의 손글씨가 아직 잉크 냄새를 품고 있었다.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안이 조용히 키보드를 쳤다.
빈 칸에 문장이 새겨졌다.
“같이 웃으면, 숫자는 잠깐 멈춘다.”
엔터를 치자 모니터 한쪽이 초록으로 물들었다.
AIVA가 즉시 해석하려 했지만 ‘의미 불분명’이라는 회색 태그만 덧붙였다.
4 ― 그래프의 첫 흔들림
오후 네 시,
대시보드가 다시 갱신됐다.
회색 공백을 메우던 초록 점이 둘, 셋, 넷… 서서히 번져 가고 있었다.
“감성 코멘트 24 건 등록.”
“정서 로그 신뢰도 +3 %.”
기이한 일이었다.
숫자를 넣은 것이 아니라 숫자를 거절하는 문장을 넣었는데 그래프가 오히려 안정됐다.
이안은 모니터를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워치가 속삭였다.
“출근 상태 유지.
정서 지수 편안.”
출근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출근하지 않아도 출근해 있는 것 같았다.
파란 선은 그대로였지만, 마음 속 어디엔가 작은 초록 점이 새로 찍히는 느낌.
5 ― 저녁의 파란 불빛
퇴근 시간,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을 향해 내려갔다.
둘만 남은 좁은 공간, 워치 알림이 잦아들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서진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숫자로 표현 안 된 시간, 첫날이었거든요.”
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출구 센서가 신호를 잡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워치가 ‘귀가 동선 확인’이라 알렸지만 둘은 잠시 문 앞에 멈춰 섰다.
기록되지 않는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파란 불빛은 계단 모서리를 따라 반짝였지만 그 아래 새로 돋아난 초록 점들은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출근은 내일도 어김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숫자보다 문장을 먼저 기억하는 사람으로 두 사람은 조용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