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한국공학교육학회 인재니움 33권 1호 테헤란로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틀린 질문에서는 옳은 답이 나올 수 없다.”
“그거는 네가 답을 맞추는 데에만 욕심을 내기 때문에 눈에 아무것도 안보이는 거야.
답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질문이 무언지 아는게 더 중요한 기다.
왜냐하면 틀린 질문에선 옳은 답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지.
답을 맞추는 것보다 답을 찾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서 탈북한 천재 수학자 이학성이 남긴 이 대사는 오늘날 대한민국 공학 교육의 정곡을 찌른다. 우리는 흔히 공학을 ‘문제 해결의 학문’이라 정의하며, 오랜 시간 최적의 해(Solution)를 도출하는 해결자(Solver)를 양성하는 데 집중해 왔다. 주어진 조건을 분석하고, 더 빠르고 정확하게 계산하는 능력은 산업화 시대의 강력한 엔진이었으며 지금도 그 가치는 유효하다. 그러나 정답을 찾는 능력과 기술이 가공할 만큼 진보한 지금,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해결하려는 그 문제가 과연 ‘해결할 가치가 있는 올바른 질문’인가 하는 점이다.
공학교육학회의 많은 교육자가 공감하듯, 정답을 맞히는 교육은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질문을 설계하고 문제를 정의하는 역량(Reframer)은 상대적으로 체계화되지 못했다. 해결책(Solution)은 풍요롭지만 정작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한 통찰은 빈곤한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틀린 질문에 대한 옳은 답은 자원 낭비를 넘어 공학적 실패로 이어진다. 이제 우리는 해결자 양성이라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넘어,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고 창조하는 ‘리프레이머(Reframer)’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정답 확인인가, 문제 이해인가
모스크바 유학 시절, 중간고사에서 겪은 경험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어느 강의 시간에 중간고사에 대해 교수님이 얘기해 줬다. 당시 러시아어가 유창하지 않아 교수님을 찾아가서 중간고사 시험 시간과 범위에 대해 다시 여쭤봤다. 교수님의 대답은 시간은 아침 9시부터이고 장소는 교수 연구실, 범위는 참고도서 3권 중 배운 데까지라고 알려줬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닌 경험으로 시험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고, 책을 볼 수도 있는 시험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
중간고사 당일이 되어 9시에 교수 연구실로 찾아갔다. 같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줄을 서 있어서 끝에 섰다. 드디어 차례가 되어 교수실에 들어갔을 때는 충격이었다. 교수님 책상에 A4 용지 5장이 뒤집혀 있었다. 교수가 그중 한 장을 가지고 나가서 문제를 다 풀면 다시 오라고 했다. 언제까지 와야 하는지 물어보니 그날 저녁까지는 와야 한다고 했다. 시험 시간은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였다.
시험지를 들고 나와 다른 학생들 문제를 보니 5가지 시험지가 있었다. 시험지는 단순했다. 계산하는 문제 3개와 서술형 문제 2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계산기와 책을 뒤져가면서 3개 문제를 풀었고 서술형은 거의 교과서를 복사하듯이 작성했다.
다시 교수실을 찾아가서 답안지를 제출했다. 교수님이 답안지를 보고 질문을 했다. 계산 문제에 대한 질문부터 서술형 문제에 대한 질문까지 질문이 꼬리를 물고 계속 나왔다. 단지 교과서에 있는 내용뿐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까지도 질문하는 바람에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야 했다. 사실 그때는 러시아어를 잘 못해서 공식과 화학원소를 활용하여 대답하였지만, 다행히 시험 결과는 좋게 나왔다.
이 시험을 보고 느낀 점은 정답만 외워서는 시험에 통과 못 한다는 것이다.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관련 지식을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날 시험은 밤 9시에 모두 끝난 것 같았다. 효율성과 절대평가를 생각하면 당장 교육 현장에 적용하기 어렵지만 시험에 대한 인식을 바뀐 일이었다.
이러한 통찰은 이후 박사 과정 중 수행했던 소재 합성 실험에서 실천적 경험으로 이어졌다. 특정 소재를 합성한 뒤 분석 장비로 확인하면 항상 이해할 수 없는 오차가 발생했다.
필자는 당연히 ‘분석 장비의 결함’이나 ‘측정 세팅의 오류’를 의심하며 수개월을 낭비했다. 하지만 진짜 원인은 장비가 아닌 ‘원재료의 순도’에 있었다. “원재료는 당연히 순도가 높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문제를 정의하니, 진짜 문제를 찾아내지 못한 채 엉뚱한 곳에서 해법을 찾았던 것이다.
문제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관점이 바뀌고 정의가 달라지는 순간 해결의 방향은 완전히 뒤바뀐다. 이는 공학 교육이 왜 ‘해결’보다 ‘정의’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TRIZ와 공학교육
한국으로 돌아와 기업 현장에서 TRIZ 전문가로 활동하며, 필자는 문제 정의의 힘을 이론적으로 정립할 수 있었다. TRIZ(트리즈)는 단순히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는 도구가 아니라, 시스템 내부의 ‘모순’을 직시하고 문제를 구조적으로 재정의하는 방법론이다. 일반적인 공학은 성능과 비용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Trade-off)을 찾으려 하지만, TRIZ는 이 타협 자체를 거부한다. “부품이 강도를 위해 두꺼워져야 하는 동시에, 연비를 위해 가벼워져야 한다”는 물리적 모순을 추출하고, 이를 시간 분리와 공간 분리, 조건 분리로 해결하는 과정은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혁신의 본질임을 증명한다.
TRIZ는 러시아 원어로 ‘теория решения изобретательских задач‘의 앞글자로 트리즈라고 한다. 직역을 하면 ’발명문제들의 해결 이론‘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창의적 문제 해결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TRIZ를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이론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제 TRIZ는 창의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이론이다. 다시 말해 문제를 먼저 창의적으로 변환하는 것이 트리즈의 본질이다.
특히 TRIZ의 ‘이상적 최종 결과(IFR, Ideal Final Result)’와 ‘멀티스크린(Multi-Screen)’ 사고는 공학자에게 입체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IFR은 현재의 제약 조건에서 한 걸음씩 나가는 개선이 아니라, “시스템이 사라져도 기능은 수행되는 완벽한 미래”에서 거꾸로 현재를 바라보게 한다. 또한 멀티스크린 사고를 통해 시간(과거-현재-미래)과 공간(하위-시스템-상위 시스템)을 종횡무진 횡단하다 보면, 현재 시스템의 결함 원인이 사실은 상위 시스템이나 하위 시스템에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 재구성 역량’은 단순한 아이디어 발상을 넘어 R&D의 병목 현상을 뚫어내는 핵심 동력이 된다.
오늘날 생성형 AI의 등장은 이러한 공학적 사고의 가치를 더욱 격상시키고 있다. AI는 계산, 설계, 최적화에 이르기까지 해결의 과정(Process)을 압도적인 속도로 자동화하고 있다. 그러나 AI는 주어진 문제를 잘 풀뿐, 그 문제의 타당성을 스스로 의심하거나 새로운 목적을 설정하지는 않는다.
1990년에 개봉한 ’토탈 리콜‘ 영화의 배경은 2084년이다. 당시로서는 2084년을 상상하면 화성에 사람이 산다는 상상을 하였다. 영화 줄거리를 떠나서 그 당시에 미래 택시를 상상하여 영화에 자율주행택시가 등장했다. 당시 사고로는 자율주행은 가능하다고 상상했지만, 목적지와 택시 요금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 자니 '캡이라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운전을 하고 손님에게 목적지를 물어본다. 지금 자율주행 택시를 상상하라고 하면 누구나 스마트폰과 자율주행 택시를 연결할 것이다.
자율주행 택시에 인공지능 로봇 ‘자니’가 앉아 있었던 것처럼, 인간의 상상력이 기존의 틀에 갇히면 질문의 수준도 제한된다. 해결이 쉬워지고 자동화될수록 인간 공학자에게 남겨진 영역은 ‘무엇을 해결할 것인가’를 선택하고, AI에게 던질 정교한 질문을 설계하는 일이 된다. 목적을 잃은 효율적인 해결은 의미가 없다. 이제 질문의 방향 설정은 기술적 역량을 넘어 공학자의 윤리이자 철학이 되고 있다. 질문의 틀이 바뀌면 상상의 수준도 바뀐다.
또한 고정관념을 없애는 것이 필요하다.
달걀을 외부 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달걀로만 똑바로 세울 수 있을까? 달걀 밑을 깨서 세운 콜럼버스의 달걀은 유명하다. 실제 콜럼버스가 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달걀 밑을 깬다는 것은 고정관념을 깬다는 사례로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 옳은 것인지는 확인해야 한다.
2011년에 브라이언 스폿(Brian Spotts)이 달걀을 깨지 않고 900개의 달걀을 바닥에 세웠다.
(https://www.timescall.com/2011/06/22/dacono-man-restores-guinness-record-in-egg-balancing/)
대부분 사람들은 콜럼버스가 달걀을 깨서 세웠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공학교육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옳다고 알고 있는 것에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그리고 브라이언 스폿이 달걀을 세운 것은 새로운 정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2019년 한국전기연구원(KERI)에서 초전도체를 활용하여 달걀을 세웠다. 이런 정보를 모르고 아직도 달걀을 세울 때 밑을 깨려고 하는 시도는 과거에 옳다고 한 내용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전제는 가끔 가장 강력한 제약 조건이기도 하다.
공학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검증과 판단력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Solver를 넘어 Reframer로
공학교육은 이제 충분히 많은 해결자를 넘어, 문제를 다시 쓰는 리프레이머(Reframer)를 길러내야 한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들기보다, 그 문제가 정말 해결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부터 묻는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다. 우리 공학 교육도 학생들이 당연시해 온 전제를 의심하고, 익숙한 오답보다 낯선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
미국의 교육자이자 평화운동가로 193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니콜라스 머레이 버틀러(Nicholas Murray Butler)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는 일으키는 사람 (Those who make things happen):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변화를 주도하는 극소수의 사람
두 번째는 지켜보는 사람 (Those who watch things happen):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그저 구경만 하는 사람들
마지막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사람 (Those who wonder what happened):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조차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
이제는 두 번째 사람을 첫 번째 사람으로 만드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 공학교육은 과연 어떤 사람을 길러내고 있는가?
우리는 학생들이 AI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단순히 변화를 구경하는 자를 넘어, 스스로 질문을 던져 혁신을 창조하는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
공학교육의 종착지는 정답의 확인이 아니라, 더 깊은 질문의 창조여야 한다. 학생들이 정답을 맞혔을 때 박수 치는 대신, “그 질문이 최선인가?”, “우리가 놓치고 있는 진짜 문제는 무엇인가?”라고 다시 물을 수 있는 용기를 북돋워야 한다.
변화는 결코 답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문제를 다시 정의하는 그 찰나의 순간, 이미 변화와 창조는 시작된 것이다.
AI가 답을 대신하는 시대에 공학 교육이 지켜야 할 마지막 자존심은 ‘질문을 설계하는 인간의 사고력’이다. 무엇을 아는가 보다, 어떤 질문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는가가 공학자의 경쟁력이 되는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