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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세호 Mar 30. 2020

아론 카터 기억나냐?

그게 도대체 누굴까

  

아론 카터


  코로나 탓인지 카페에 손님이 없다. 사실 전에도 손님이 없었다. 주변에서 다들 코로나 탓을 하길래 나도 해보고 싶었다. 심심했다. 고양이랑 놀려했지만 소파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턱을 괴고 인터넷 서핑을 했다. 의미 없이 스크롤을 내리다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아론 카터 형 닉 카터 살해 협박, 접근금지 처분’


아론 카터라니 반가운 이름이다. 언제쯤이었을까? 20년 전쯤 아론 카터를 알게 된 거 같았다.


  그때 난 초등학교 고학년이었고 전교회장 선거에서 막 떨어진 상황이었다. 전교생이 100명 정도인 작은 시골학교에서 10표가 넘는 차이로 진다는 건 굴욕적인 패배였다. 화가 났다. 생일이 빠르다는 이유로 6년간 1번으로 살았다. 그 말은 즉 무시무시한 예방주사를 첫 번째로 맞아야 했고, 하기 싫은 발표와 신체검사에서 옷통을 벗는 수치심도 먼저 겪어야 했다는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과학의 날에는 학교를 대표해 고무동력기로 시 대회에 나가 무려 3등을 했다. 사제 고무가 아닌 보급 고무로 3등을 한 건 1등을 한 거나 마찬가지다. 6년간 학우들을 위해 희생과 노력한 내가 외면받았다.


아론 카터


  나를 이긴 상대는 사사건건 나와 부딪치는 여자애였다. 그 애는 햇빛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피부, 고집스러운 작은 입, 그리고 머리를 항상 뒤로 질끈 매고 다녔다. 그 애는 승부욕이 강했다. 발야구를 할 때면 웬만한 남자애들보다 멀리 찼고, 피구를 하다 일부러 살살 던지면 봐주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는 애였다. 당시엔 나도 승부욕이 강해 수도 없이 그 애와 싸웠다. 그러면 작은 입으로 쉴 새 없이 쏘아붙이곤 했는데 나는 입도 못 열고 얼굴만 울그락불그락 해졌었다. 가끔은 주먹다짐도 했는데 온 몸에 손톱자국이 난 적도 있었다. 그런 애한테 패배한 거였다. 겉으론 웃으며 축하한다고 했지만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속에서 열등감이 끓어올랐다.


  얼마 뒤 방과 후 부서를 선택하던 때였다. 그전까지 나는 사물놀이 부였다. 재능이 없어 장구에서 북으로 최종적으론 징으로 좌천됐다.  징은 굉장히 지루한 포지션이었다. 애매한 아이돌 멤버의 추임새만큼이나 존재감 없는 자리였다. 자주 딴생각을 하다 징을 치지 못하기 일 수였다. 때리다 지친 담당 선생님에게 다른 부서로 옮기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래서 들어가게 된 부서는 모두가 기피하는 ‘영어부’였다. 마음이 울적해져 털레털레 걸었다. 영어부 교실문을 열었다. 넓은 교실에 맨 앞자리에 그 애가 혼자 앉아 있었다. 전교회장, 재수 없는 애 , 선생님이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말했다. “자 다 왔으니 수업 시작할까?”


아론 카터


  영어부는 그 애랑 나 둘 뿐이었다. 선생님은 수업에 의욕이 없었는데 부원이 두 명뿐 이어서인지 원래 그런 사람인지 헷갈렸다. 영어수업은 대강이랬다. ebs 어린이 영어 프로그램을 한 편 본다. 선생님이 좋아하는 팝송을 듣는다. 선생님과 잡담을 한다. 그중 잡담시간이 가장 길었는데 기억에 남는 건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냐는 대화였다. 나는 그 당시 만화 노래만 듣던 때였는데 이를테면 드래곤볼 GT , 디지몬 어드벤처 엔딩, 닥터슬럼프, 탱구와 울라쑝 같은 노래만 들었다. 그런데 내가 대답한 가수는 형 컴퓨터 번개모양 윈앰프 노래 리스트에 있던 ‘브라운아이즈’였다. 다분히 옆에 있는 재수 없는 애를 의식해서 한 말이었다. 나는 너보다 수준이 높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선생님은 약간 흥미로워했지만 어린애답지 않는 노래를 듣네 정도의 반응이었다. 곁눈질로 본 그 애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리곤 내 얘기가 끝난 것 같자 자기 차례라는 듯 말했다.


“아론 카터 좋아해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패배감이 들었다. 아론 카터라니 너무 있어 보이는 이름이었다. 내가 말한 갈색 눈동자보다 우위에 있는 네이밍이었다.(지금은 아니지만) 선생님과 그 애는 아론 카터로 시작해 백스트릿 보이즈까지 긴 대화를 했고 난 외면받았다. 저 재수 없는 애한테 또 진 거였다.


  수요일은 4교시다. 나는 늘 하던 축구도 하지 않고, 새로 산 루어가 있는데도 형과 배스낚시를 가지 않았다. 혼자 시내에 있는 PC방에 가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회시간이 되면 선생님들은 운동장에 있는 우리에게 마이크에 대고 두 가지를 강조했었다. 아폴로 눈병이 유행이니 시내에 나가지마 라, pc방과 오락실은 나쁜 곳이니 가지 마라 나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어길 셈이었다. ‘아론 카터’를 공부해서 재수 없는 애가 지켜보는 가운데 선생님과 ‘아론 카터’를 주제로 더 많은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무튼 나는 열등감의 화신이 되어 혼자 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PC방에 갔다.(당시 메가패스는 우리 집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야후코리아에 들어가 아론 카터를 검색했다. 그가 낸 노래, 형인 닉 카터와 백스트릿 보이즈, 좋아하는 음식이 피자라는 것 까지 1시간을 빼곡하게 아론 카터로 채웠다. 그리고 포켓몬 게임 공략집을 프린트한 이후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조사한 내용을 인쇄했다. PC방에서 나와 세븐일레븐에 갔었다. 900원을 내고 큰 컵을 받아 환타, 콜라, 스프라이트를 섞어 받는다. 한 손에 음료, 한 손에 아론 카터를 들고 집에 걸어갔던 수요일이 기억난다.


  

아론 카터


  기다리던 영어부 수업 날이었다. 가방에는 여러 번 읽어 본  아론 카터 정보가 들어있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오래전이라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의뭉스럽게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디즈니 만화동산에 도날드 덕을 봤는데 그걸 따라 하던 아론 카터가 생각나더라” 이런 식으로 그 애 기준에선 수준 낮은 만화에 아론 카터를 첨가해서 말했던 것 같다. 너는 나를 수준 낮은 애로 생각하지만 사실 난 아론 카터도 아는 스텍트럼이 넓은 초등학생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 것이다. 나에게 무관심하던 애가 고개를 돌려 반응했다. 그때부터 내가 공부한 아론 카터 얘기와 그 애가 좋아하는 아론 카터 얘기를 나눴다. 싫어하던 애와 나누는 대화가 이상하게 즐거웠다. 수준 낮은 애들과 섞여 따분한 표정만 짓던 애의 생기 어린 표정이 보기 좋았다. 지난 수요일에 노력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그 후로 그 애는 선생님이 오기 전 컴퓨터로 아론 카터 노래를 들려줬고, 나는 고모 미용실 잡지에서 아론 카터가 나오면 그 애한테 빌려줬다. 그렇게 우린 꽤나 친해졌다. 그 해 방과 후 학습발표회에서 그 애와 부른 B-I-N-G-O와 Santa Claus Is Coming to Town의 가창과 안부는 다른 부서의 어떤 것보다 세련되고 수준 높았다. 싫어하던 사이에서 아론 카터로 뭉쳐진 괜찮은 듀오로 발전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난 남중-남고로 진학했고, 그 애는 여중-여고로 진학했다. 안성이라는 도시는 작다. 시험기간 시립도서관에서, 하굣길 정류장에서 마주쳤었다. 가끔 이메일과 문자로 연락하기도 했었다. 졸업 후에도 대화는 비슷했었다. 내가 ‘믿거나 말거나’를 말하면 그 애는 ‘CSI’를, ‘몽정기’를 말하면 ‘아멜리에’를, ‘버즈’를 말하면 ‘브로콜리 너마저’를 말했다. 여전히 그 애가 말해주면 난 그걸 공부하고 대화하며 즐거워했다. 이제 와서 말하자면 동경했다. 닮고 싶었다. 어쩌면 좋아한 걸 수도 있다. 고3이 되어 그 애와 나눈 마지막 대화는 진학에 관한 거였다. 나는 레크레이션학과에 진학하려 했다. 이번만큼은 그 애가 나를 공부할 거라 생각했다. 그 애한테 이 말을 전했다. 흥미로워했다. 기분 좋았다. 그 애한테 온 다음 문자는 이랬다. “나 교도관이 될 거야” 끝까지 멋있는 애였다. 난 레크레이션학과에 떨어졌다. 그 애는 교정보호학과에 붙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SNS로 그 애를 찾을 수 있다. 구질구질하게 그러고 싶지 않다. 죽기 전에 한번쯤 마주칠 것이다. 정류장이나 여행지 혹은 죄지어 들어간 교도소에서 만날 것 같다. 오랜만에 그 애를 만나 건네는 첫마디가 “ 너 교도관 됐어?”같은 말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 말을 할 것 같다.


아론 카터 기억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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