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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세호 Apr 07. 2020

양해문

한 장의 포스터에 담은 긴 이야기

  


  양해문입니다. 뒤에 글이 투정뿐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토요일 저는 서울대입구역 과 낙성대입구역 사이 대로변에 있었습니다. 모르시겠지만 그곳엔 가로수로 벚꽃나무가 심어져 있습니다. 하늘이 파랗고 벚꽃도 만개해 잠시 가던 길을 잃고 멍하니 있었습니다. 도미노피자 앞에 있는 벚꽃나무를 올려다보는데 나비인지 나방인지가 보였고 작은 바람이 불어 벚꽃이 흩날렸습니다. 나비의 날갯짓이 일으킨 바람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속에도 미풍이 일어 어떤 기억이 스치었습니다.


  2015년 귀사가 주최하는 헌혈 공모전 포스터 부분에 참가했습니다. 당시 사설단체에 큰돈을 내고 광고를 배울 때고, 한 해 전 귀사의 에이즈 공모전에서 입선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자신 있었습니다.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3일 뒤가 마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참여했습니다. 저는 한계에 몰리게 되면 위기 감지 세포가 활성화됩니다. 그게 어느 기관에 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약간의 편두통으로 관자놀이 어딘가에 있다고 짐작합니다. 누구나 그렇다고 비웃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보다 그 세포가 발달되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아무튼 혼자 공모전에 참여하진 않았습니다. 같이 사설단체에 다니던 여후배와 팀으로 참가했습니다. 그 친구는 첫 이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슬픔에서 눈 돌리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사적으로 마음이 있던 건 아닙니다. 그저 자취하던 저에게 구운 김과 계란을 주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나비가 날던, 도미노 피자 앞, 벚꽃나무를 보며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은 아는 만큼 행할 수 있습니다. 당시 제가 아는 그럴듯한 이론은 ‘나비효과’밖에 없었습니다. 도미노피자에서 일하고 있었고, 벚꽃은 큰 연관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공모전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후배와 머리를 맞대고 아무리 고민해봐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나비효과, 도미노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는 ‘나의 헌혈이 나비의 작은 날갯짓처럼 퍼져 나가 큰 바람을 일으킨다’라는 메시지를 담자는 것이었습니다. 나비가 날아 헌혈 팩 모양 도미노가 쓰러지는 모양으로 시각화하는 포스터를 만들기로 한 겁니다. 이제 제가 왜 기억이 떠올랐는지 이해가 되셨을 겁니다.


  구상이 끝났으니 행동했습니다. 우선 도미노를 구해야 했습니다. 온라인으로 구매해 택배로 받으면 간단하지만 이제 이틀밖에 여유가 없었습니다. 당장 구입하기 위해 우린 압구정 현대백화점에 갔었고, 로데오거리 일대 문구점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도미노는 없었습니다. 강남 어린이들은 도미노가 뭔지는 알까 궁금해졌습니다. 우린 점점 외곽으로 벗어났습니다. 가로수길을 거쳐 잠원 아파트 단지 앞 상가 문구점에 도착했습니다. 주인이 도미노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창가 어디를 뒤지더니 도미노 상자를 꺼냈습니다. 그때의 기쁨은 수상의 크기와 같았을 겁니다. 도미노와 하얀색 큰 종이를 샀습니다. 종이 위에 도미노를 두고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습니다. 잠원에서 압구정으로 다시 걸어갔습니다. 후배가 큰 종이를 돌돌 말아 나팔을 불기 시작했습니다. 이별 후유증으로 이상행동을 많이 하던 아이였습니다. 내 옆에서 울며 걷는 것보다 나팔을 부는 게 남들이 보기에 덜 난처하기에 한참을 불도록 내버려 뒀습니다. 입으로 내는 나팔소리가 의외로 괜찮았습니다.


  조용한 스터디룸에서 도미노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도미노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강남 일대 사람들 모두 귀사의 공모전에 참여하는지 스터디룸에 우리 자리는 없었습니다. 거리를 헤매다 압구정 파스쿠찌에 들어갔습니다. 그곳도 사람들이 많았지만 딱 한 곳 4인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비워져 있었습니다. 그곳에 앉았습니다. 단체석에 두 명이 앉아 미안했습니다. 허니브레드라도 시키고 싶었지만 가진돈이 넉넉하지 않아 아메리카노를 2잔만 시켰습니다. 테이블 간격이 무척이나 좁았습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옆사람과 닿았습니다. 그런 곳에서 도미노를 만들어야 했던 겁니다. 도미노는 계속 쓰러지고, 떨어진 조각을 찾으려 사과를 하며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후배는 도미노가 무너지면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했습니다.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랐을 때 도미노가 헌혈 팩 모양으로 대강 완성됐습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 빠르게 사진을 찍었습니다. 작업을 마무리하고 2층 파스쿠찌에서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갈 때마다 가방에 든 도미노에서 짝짝 소리가 났습니다. 방금 전까지 괴롭히던 녀석이 박수를 쳐주니 기분이 좀 나아졌습니다. 사과는 역시 빠를수록 좋습니다.


  집에 와 컴퓨터로 도미노 사진을 보니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이제 나비 사진을 찍고 포토샵으로 나비와 헌혈 팩 모양 도미노를 합성해 포스터를 완성시키면 됐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우선 서울시내에서 나비를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가로수길 은행나무 밑을 몇 시간이나 서성였는데 나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미지 사이트에서 5000원 정도 지불하고 나비 이미지를 구입했습니다. 나중에 공모전에 떨어지고 나서 실패 요인을 분석했을 때 나비를 산 게 가장 큰 이유같더군요. 이미지를 구입한 걸 어떻게 아셨는지 궁금합니다. 날개에 작게 판매자의 각인이 있었습니까? 아마도 내부적으로 색출 프로그램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쨋든 이건  정당하게 돈을 지불했으니 반칙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순수한 과정에 약간의 흠집이 생겼다는  건 저도 인정합니다.


  두 번째는 포토샵입니다. 포토샵을 사용할 줄 몰랐습니다. 이제 하루도 남지 않았는데 포토샵으로 나비와 도미노를 합성해야 했습니다. 대상을 받을 수 있는 정도의 퀄리티로 말입니다. 아까 제 얘기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위기관리 세포를 활성화시켰습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고 화끈 달아올랐습니다. 집중력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유튜브, 블로그, 지인에게 필요한 지식을 습득했습니다.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니 드디어 포스터가 완성됐습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얼핏 봐도 좋은 작품이었고, 모니터에 코가 닿을 듯 자세히 봐도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샤워를 하고 차가워진 머리로 봐도 좋은 작품이길래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대상을 받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너는 ktx를 타고 동쪽으로 달려 호텔에서 파란 바다를 향해 소리 지르는 호화스러운 이별여행을 할 수 있고, 나는 맥북을 사기당해 시무룩한 룸메이트에게 참치회를 사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며 작품을 제출했습니다.


  떨어졌습니다. 몇 번을 확인해도 우리 이름은 없었습니다. 당시 실망감은 꽤나 컸는데 자주 가던 칼국수집에서 만두를 남길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전 뒤끝은 없는 남자입니다. 지금도 종종 헌혈을 합니다. 귀사에 이렇게 서신을 하며 듣고 싶은 말은 ‘나쁘지 않았다” 정도의 코멘트입니다. 그래야 가끔 꿈에서 만나는 그 시절 저에게 이만하면 됐다고 말하며 ‘후’하고 불어 기억을 날려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워낙 바쁘신 분들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 글에 답해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전 그저 할아버지에게 푸념이나 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내 얘기라면 한 음 절도 흘리지 않고 들어주던 분입니다. 양해문입니다. 이 앞에 글이 투정뿐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할아버지 이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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