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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벅지 재떨이 대소동

아뜨뜨

by 양세호


오토바이를 타고 서호김밥 방향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에서 요란한 클락션 소리가 들린다. 선두 차량이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움직이지 않은 것 같다. 이런 경우 애매한 위치에 있는 나는 주황색불에서 달릴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평소라면 오른 손목을 바짝 돌려 지나가겠지만 오늘은 왠지 느긋하게 다음 신호를 기다리기로 했다. 나의 슈퍼커브 옆으로 빨간색 시티백이 선다. 생김새는 같지만 국적이 다른 오토바이 두대가 나란히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곁눈질로 보니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건 단발머리의 여자였다. 여자는 헬맷이 아닌 안전모를 비스듬히 쓰고 오른손에 있는 담배를 마저 피웠다. 턱끈이 작은지 양볼이 가운데로 쏠려있어 입술이 금붕어처럼 모아져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담배를 피우고 검지로 재를 턴 뒤 주머니에 꽁초를 욱여넣었다. 나는 그 장면이 인상적이어서 곁눈질로 보는 걸 깜박하고 고개를 돌려 빤히 쳐다봤다. 그 사이 신호가 바뀌고 여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 뒤 출발했다.


여자가 탄 시티백 서호김밥을 지나고 김가네를 끼고돌아 골목으로 사라졌다. 마음이 급해져 여자를 따라갔지만 골목에 그녀의 오토바이는 보이지 않았다. 카페거리 이곳저곳을 뒤지다 저 멀리 편의점 앞에 세워진 시티백이 보였다. 근처 공원에 슈퍼커브를 세워두고 자연스럽게 편의점에 들어가 흰 우유를 샀다. 그녀는 야외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주변에 앉기 위해 하늘을 보고 청명함에 기분 좋은 사람처럼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생긋 웃기도 했다. 그리고 옆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는 도로에서 음미하지 못한 담배를 한대 더 피우고 있었다.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고 있는 동안 나는 흰 우유를 홀짝이며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걸지 고민했다. 그녀의 담배가 점점 타들어가자 마음이 급해져 우유를 삼키다 사례에 걸렸다. 요란스럽게 기침을 했고 코에서 이차돈처럼 흰 우유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담배연기 탓으로 알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여태 고민한 생각보다 좋은 행동이었다.


편의점 의자 마법에 빠져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놨다. 순간 우리가 여행지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이인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그녀는 근처 북경반점에서 일한 다고 했다. 이직 타이밍이 맞지 않아 쉬는 겸 부모님 가게일을 도와주고 있으며, 브레이크타임에 나와 쉬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잠시 그녀의 하얀 셔츠에 튄 춘장을 바라보며 멍하게 있었다. 그녀가 내 눈을 빤히 바라봤다. 순간 당황해 사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을 봤다고 말했다. 붕어빵이 입김을 내뿜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녀는 웃으며 담뱃갑에서 한 가치를 빼내 나에게 건넸다. 우유갑을 내려놓고 담배를 받았다. 동시에 라이터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어딘가에서 본 것처럼 오른손을 모아 라이터 불을 감싸고 입에 문 담배를 빨았다. 선선해진 날씨에 따듯한 담배 한 모금이 입에 들어오니 어딘가 나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 역시 편의점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 나의 얘기를 했다. 나는 곧 카페라던가 술집을 열건대 그럼 우리 가게에 놀러 와라/손목의 타투를 보여주며 이건 달빛에 비친 윤슬이다/당신 티셔츠에 튄 춘장을 말해줘야 하는지 고민된다 등의 얘기들을 나눴다. 어느새 담배 길이가 짧아졌고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담배를 털고 주머니에 꽁초를 넣으며 그녀에게 번호를 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그녀는 겉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 번호를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례에 걸렸다. 코에서 담배연기가 올라왔다.



한참을 웃던 그녀는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면 번호를 주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무라카미 류에 푹 빠져있고 나에게 그 작가를 아냐고 물어봤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읽었고 침냄새와 땀냄새나는 책이어서 별로였다고 말했다. 그녀는 웃으며 “모든 금지된 것은 쾌락적이다”라는 말이 너무 좋았다고 했다. 그래서 부탁이 뭐냐고 물으니 내 허벅지에 담배를 지지고 싶다고 했다. 그녀를 바라봤다. 눈동자가 소용돌이치는 나선모양이 보이는 것 같았다. 최면에 빠진 것처럼 난 알겠다고 대답했다. 작게 “모든 금지된 것은 쾌락적이다”라고 읊조리니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이라 뜨거울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번호를 받을 수 있다. 이정재처럼 허벅지에 난 흉터를 보여주며 친구들에게 썰을 풀 수도 있다. 그녀는 우선 처음이니 얇은 에쎄로 하자고 했다. 상상해 보니 자존심이 상했다. 흉터도 얇고 옹졸한 느낌이었다. 나는 말보로 레드를 말했다. 그녀는 그런 건 어린애들이나 피는 담배라고 했다. 제주도에 가고 싶은데 한라산은 어떻냐고 물으니 할아버지냐고 되물었다. 그밖에 장미는 길어서 싫다, 던힐은 흉터가 느끼하게 날 것 같다. 등등의 이유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그녀와 난 점점 흥미가 사라져 갔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며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최면에 풀린 건지 나 역시 번호가 궁금해지지 않았다. 그녀의 오토바이가 떠날 때 훗날 만나면 아무 말 말고 내 허벅지를 지져달라고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그녀는 한 손을 들어 흔들었다.


시간이 흘렀다. 스마일포차에서 친구들과 연말모임을 가졌다. 묵은지닭볶음탕에 소주를 연신 들이켰다. 친한 친구는 얼마 전 태어난 딸 사진을 보여줬고, 다른 친구는 관심 없는 캠핑얘길 했다. 지루해진 탓인지 취한 탓인지 고개가 숙여졌다. 밋밋한 나의 허벅지가 보였다. 친구들이 자냐고 소리쳤다. 잠시 바람만 쐬면 금방 회복한다고 말하고 밖으로 나왔다. 세상이 흔들리는지 내 몸이 나선형으로 빙빙 돌았다. 어지러워 가게 앞 의자에 앉았다. 고개를 들어 한참 하늘을 바라봤다. 크게 심호흡하고 숨을 뱉었다. 까만 밤에 하얀 입김이 퍼져나갔다. 속호흡이다. 피식 웃음이 났다. 몸이 점점 따듯해져 갔다. 따듯해져 갔다? 왜 따듯한 거지? 따듯함은 점점 고통으로 바뀐다. 허벅지에 타들어가는 통증이 온다. 악 비명을 지르고 앞을 봤다. 그녀가 쪼그려 앉아 웃으며 내 허벅지에 담배를 지지고 있었다.


나는 구멍 난 바지를 보고 재밌어진 허벅지를 문지르며 그녀에게 번호를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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