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스피스 병동에서
#췌장암 진단을 받고 난 다음 날의 이야기
아버지의 췌장암 진단 사실을 듣게 된 다음 날, 나는 아침부터 병원으로 향했다.
1호선 온수역에서 2호선 서울아산병원까지 가는 길은 처음이었던 탓에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 멀기만 한 기분이었다.
어제의 나는 많이 울었으니, 오늘의 나는 누구보다 밝으리라 다짐했다.
꽃집에 들러 꽃을 한다발을 사고, 금색 포장지에 '아버님, 어머님 사랑해요.'라는 문구를 남겼다.
19살 내 인생에 있는 낭만을 끌어 써 만든 최대치의 결괏값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허술하기 짝이 없다.
잠실나루역에 내려 좁은 다리를 건너 병원에 도착했다. 인디언 핑크색 반팔티에 흰 운동화를 신은 기억이다. (가끔 나는 소름 돋게도 구체적인 기억이 있을 때가 있다. 내 머릿속에 영화 속 장면처럼 또렷하게 남아있는 조각들. 그러나 대부분의 타인은 기억하지 못하기에 내 기억이 진실인지는 항상 의문이다.) 병원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병원의 뾰족한 냄새가 풍겼다. 대부분 병원 냄새를 싫어한다지만 나에겐 어떠한 감정도 주지 않은 '냄새'일 뿐이었다. 병실에 들어가서 아버지를 만났다. 몰라보게 수척해졌다거나 살이 빠지는 변화는 없었다. 황달 수치가 높았던 탓에 담즙을 빼내려 연두색 콧줄을 했다는 차이뿐이었다.
요동치는 슬픔과 함께 언제고 바닥에 붙어버릴 것 같은 내 입꼬리를 부여잡아 하늘 위로 끄집어 올렸다. 웃으며 꽃을 전했고, 웃으며 포장지에 적힌 말을 자랑했고, 웃으며 어제 보냈던 일상을 말했다.
19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시작된 날이지만, 이날만큼은 묘하게 전 남자 친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To. MY X
눈물을 쏟으며 학교에서의 남은 시간을 버텼던 나는, 하교하자마자 남자 친구를 붙잡고 다시 한번 눈물을 쏟았다. 남자 친구에게 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하는데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내가 내뱉는 문장이, 단어가, 소리가 하나같이 생경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내뱉는 것처럼. 남자 친구는 우는 나를 달래더니 내 핸드폰 메모지에 글을 남겼다.
'다 괜찮을 거야. 울면 아버지도 슬프실 테니까 내일은 웃고만 와.'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런 말이었다. (실제 메모가 핸드폰 구석에 남아있지만 구태여 열어보지는 않았다.) 비현실 같던 현실 속에서 영화 같은 말을 남겨줬던 친구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름 어른이 되어간다고 느끼는 지금의 나는, 문득 그날을 떠올리며 그 당시 그 친구의 어른스러움에 새삼 고마움을 느끼곤 한다.
학교와 병실을 오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을 즈음에, 나는 아버지에게 랜디 포시 교수의 <마지막 강의> 책을 선물했다. 그 책에서 살아 숨 쉬는 랜디 포시의 삶이 아버지에게 용기가 되기를, 그리고 정해진 결말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행복하기를 바랐다. 책을 선물하는 동안 몇 번이고 울컥하는 감정을 달래야만 했다. 다행히 그다음 돌아온 아버지의 현실적이고도 담백한 답변에 눈물을 쏟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빠는 노안이라 가까이에 있는 글은 잘 안 보여. 돋보기로 보면 잘 보이겠다."
말랑하던 감정이 쾌적해지는 시원한 답이었다. 나는 남자 친구에게 연락헀다. '혹시 돋보기 있어?'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가 돋보기를 갖고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왜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그 친구는 '찾아볼게'하고 말했다. 그리고 며칠 후 학교에서 종이 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과학 시간에 쓸법한 커다란 원형의 돋보기와 비타민 몇 개. 예전에 학교에서 썼던 기억이 있어서 온 집안을 다 뒤져서 찾아왔다고 했다. 정말 그래 보였다. 어린 날에 썼음직한 시간을 머금은 돋보기였다. 그 돋보기는 곧장 서울아산병원 6인실 탁상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돋보기는 아직도 집에 남아있다.
사람이 힘들 때 옆에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말 한마디 건네는 것도 얼마나 고뇌해야 하는 일인지 알고 있다. 그 시간을 묵묵히 견디고, 또 마음과 시간을 써준 친구에 대한 마음이 진하게 남아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