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행복할 수는 없겠지만

4년 만에 여행, 4년 치 웃음

by ㄱㄷㅇ

약 3년 전에 대학교 친구들과 보성으로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이후 여행 이야기를 썼었는데, 쌓인 글을 보다 문득 여행 이야기가 남아 있어 다시 읽어 보니 그때의 기억이 나더라고요. 참 좋았던 시간이라 되새기기 위해 글을 발행합니다.




어렸을 때의 관계가 계속되기는 힘들다. 스무 살, 대학생활이 시작되고 많은 무리가 형성되었고 그 안에서 친한 관계들이 만들어졌다. 짧은 시간만에 멀어진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멀어진 사람들도 있다.

사실상 나의 대학생활은 3가지 키워드로 말할 수 있는데 아싸, 암실, 학생회 정도이다. 특히나 군대를 가기 전은 더욱 그랬다. 1, 2학년의 시간 대부분은 저 사람들과 보냈다.


암실은 사진 동아리인데 함께 들어갔던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6명이었다. 다른 동아리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였지만 기적적으로 여섯 명이서 사이가 모두 좋게 지냈다. 수가 적을수록 한번 뒤틀리면 끝장났겠지만 다행인지 모두가 착한 사람들이었다. 암실동기들(암동이들)과도 꽤 많은 여행을 다녔다. 암동이들과는 여수, 부산, 동해, 남이섬을 여행했고 지난 주말, 4년 만에 보성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사실 출발하기 전에는 약간의 걱정이 앞섰다. 4년 만에 여행이었고 이전처럼 많은 시간을 공유하진 않았기 때문에 각자의 성격이나 여행 스타일 등이 바뀌었을까 봐, 오랜만에 함께하는 시간이 이전처럼 더는 즐겁지 않을까 봐 혼자 신경이 쓰였다. 심지어 여행을 가기로 한 주말의 날씨가 흐리다고 해서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아쉬움이 커져있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이 무색할 만큼 여행을 시작하는 기차의 타기도 전에 사건이 시작됐다. 기차를 타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친구 한 명의 연락이 두절됐기 때문이다. 그를 뺀 나머지 친구들은 난리가 났다. 오빠에게 전화를 해보자, 보이스톡을 해보자, 등등 포기의 단계까지 갔을쯤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했다고 했다. 여행 가는 날 새벽에 운동이라니, 얘가 드디어 미친 건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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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시작 - 좌절 - 비극인줄 알았는데 희극


어찌 됐든 모두가 제시간에 도착해 무사히 기차에 탑승했다. 나는 멍하니 앉아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맨 뒤에 앉아있던 친구들은 가는 시간 내내 대화를 했다. 오랜만에 봐서 나눌 이야기가 많았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저 화자 1과 청자 1의 지옥의 토크였다.


보성 여행은 광주까지 ktx를 타고 그곳에서 차를 빌려 다시 보성까지 가는 루트였다. 우리는 광주에서 보성의 녹차밭까지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녹차밭에 도착하자마자 밥을 먹었다. 한정식이었는데 괜찮은 가격대에 아주 맛있는 집이었다. 녹차밥과 보리굴비가 메인이었지만 전라도의 맛집답게 다른 반찬들도 맛이 아주 좋았다. 모두가 호들갑을 떨면서 맛있다고 해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렇게 밥을 먹고 녹차밭으로 향했다.

날이 더웠지만 다행히 해가 강하지 않아 버틸만했다. 저곳에서 사진을 찍을 때까지는. 저렇게 찍고 모두가 지쳐있는데 지원이가 전망대까지 가야 한다고 했다. 길이 좋지 않았고, 하필 새벽에 하체를 조지고 왔던 은비가 얼굴이 아주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망설였지만 이왕 온 거 가보긴 해야 할 것 같아 가기 싫어하는 친구들의 등을 밀었다. 모두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전망대까지 갔지만,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내려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릴만큼 큰 소리로 전망대가 너무 좋다고 극찬을 했다. 이 힘듦을 우리만 겪기보다는 관광 왔던 다른 사람들도 느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나온 억지 텐션이었다. 이제 다들 나이가 서른이 되어가는데 아직 대학생처럼 노는 게 웃겼다.

사진 찍는 나를 찍는 사진

녹차밭에서 나와 이후 일정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얘기하는데 지원이가 또 바다에 가자고 했다. 나는 바다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럴까? 하고 순간 혹했지만 은비가 숙소로 가. 라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렇게 우리는 바다보다는 숙소에 가 휴식을 택했다. 분명 같은 장소에 우리가 타고 왔던 차로 향했는데 문짝에 못 보던 게 달려있었다. 우리는 주위로 가 이런 게 원래 있었나?? 하면서 서성였는데 우리 차가 아니었다. 그렇다. 우리는 일진처럼 모르는 차 주위를 삥 돌아서 서성였던 거였다. 당황한 우리는 도망치듯 진짜 우리 차가 주차된 곳으로 향했다. 숙소에 가기 전에 장을 보고, 밥을 간단하게 먹기로 했다. 저녁으로는 '간단하게' 오리불고기를 먹었다. 분명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 음식이 아주 맛있었다. 간단한 저녁 후에 숙소로 가야 했다. 하지만 한국인이 어떤 민족인가, 식후 커피를 하지 않으면 손을 벌벌 떠는 카페인 중독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보성에서 가장 핫하다는 카페, 춘운서옥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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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고택을 수리해서 카페와 민박집으로 운영하는 춘운서옥은 보성에서 가장 핫한 카페답게 다른 곳들과는 다르게 관광객들이 꽤 있었다. 커피도 맛있었는데 무엇보다 고택을 수리해서 만든 만큼 특유의 분위기가 더해져 한층 더 좋은 곳이었다. 간단한 커피 타임 후 드디어 숙소로 갔다. 숙소는 은비가 약 3개월 전에 예약한 곳으로 사실 많이 알아보진 않고 인스타로만 쓱 봤었는데, 사진들이 아주 예뻐서 기대를 많이 했다. 보성 시내에서도 약 삼십 분 정도를 차로 이동하는, 아주 아주 시골인 동네에 있었는데 조용한 곳에서 온전히 쉴 수 있을 것 같아 좋았다. 그리고 보성 여행의 하이라이트를 찍게 해 준 장소이기도 했다.


숙소에 도착해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씻을 사람은 씻고, 그동안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시간을 보냈는데 나는 재희, 지원과 공기놀이를 했다. 초등학생 시절 공기놀이를 나름 해봤다는 자신감으로 그들에게 까불었지만 그들을 넘을 순 없었다. 그렇게 실력의 격차를 느껴 공기놀이는 포기하고 젠가를 하는데, 분명 나도 잘 안 해본 게임인데 다른 친구들이 너무 못해서 아주 신났다. 특히 현준, 재희와 함께 할 때는 맞기 내기를 했는데 한 번도 맞지 않았다. 게임을 하면서 이기기만 한 적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라 새삼 신기했고 현준을 너무 세게 때린 것 같아 미안했다.(현준... 미안) 어찌어찌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함께 모여 술을 마셨다.


여느 때와 같이 즐거운 술자리를 즐기고 있다가 잠깐 구름과자를 먹는데 밤하늘이 너무 맑았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시골, 조용하고 어두운 동네에 우리뿐이라는 것 같은 착각과 함께 빛나는 별들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렇게 많은 별은 태어나 처음 보는 듯했다. 다시 술자리로 돌아가 이야기를 하던 중에 내가 밖에 별이 아주 예쁘다. 고 했는데 모두가(한 명을 제외한) 신나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 한 명이었던 재희는 별이 다 같은 별이지 뭘 그러냐고 그랬지만 다수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어 함께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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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원 by 은비


보성의 밤을 친구들과 함께 보내며 별을 보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잠시 바깥에 나와 하루를 정리하는데 지나간 시간들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누군가 우리가 함께 여수에 가지 않았으면 지금도 없었겠지, 했던 순간부터였다. 지나간 걱정은 무색하게도 그저 만나서 반갑고, 즐겁기만 하던 시간이어서 더 그랬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서울에서 혼자 있는 시간 동안에는 그 단순한 문장을 체감하기 어렵다. 아무 일 없이 평안한 나날이 지속되면 그것 또한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그저 행복한 시간을 갖는 게 소중하다는 생각을 했다.


매일 행복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가끔이라도 무척 행복하다면 그것만으로 됐지, 싶었다. 다만 행복했던 만큼 조금은 슬프겠다고도 생각했다.

모두와 함께 시끌벅적하게 즐기던 시간이 지나가면 느껴지는 공허함이 있기 마련이니까. 서울에 돌아가고 나서는 당분간은 조금 슬프겠다고. 그렇지만 나도 조금은 어른이 되었으니까, 매일 행복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아니까 그 시간이 이전보다는 조금은 짧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별을 보다가 잠을 자러 방으로 돌아갔다.

체크아웃이 열한 시였기 때문에 천천히 준비하자는 마음으로 알람을 아홉 시 삼십 분으로 맞췄는데 현준의 잠꼬대가 심해 여덟 시쯤 눈이 떠졌다. 다시 잘까, 일어날까 고민하는데 바깥에서 오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릴까 고민하는데 누군가 어제 사놓은 브이콘을 먹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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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브이콘을 먹는 친구의 오드득거리는 소리와 바깥에서 들리는 온갖 새들의 지저귐, 들어오는 햇살이 기분 좋아서 그냥 일어나기로 했다. 그렇게 바깥으로 나가 새벽까지 이어졌던 술자리를 간단하게 치우는데 은비가 산책을 나가자고 했다. 바깥의 날씨는 아주 맑았다. 푸른 하늘과 초록색 잎들이 무성한 산으로 둘러싸인 곳을 걷는 게 얼마만인지 생각하면서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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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시골의 아침. 거리 곳곳에 피어있는 금계국이 바람에 흩날린다

친구와 아주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며 마을을 걷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모두가 잠에서 깨 나갈 준비를 시작했고 우리는 보성의 마지막을 마무리하기 위해 한참을 마당에서 사진을 찍었다.

IMG_0785 2.JPG 사진 동아리 출신들 답게 사진에 열정적인 편(다음엔 삼각대를 챙기자)


광주로 돌아와 브런치를 먹었다. 점심을 먹고 차를 반납하면서 보성 여행은 마무리 됐고 우리는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로 돌아와서- 여느 여행이 그렇듯, 또 오랜만에 함께한 여행인지라 모두가 여행의 끝을 아쉬워하며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각자의 안부를 다시 묻는데 갑자기 여행 뒤풀이 이야기가 나왔다. 분명 한 시간 전까지 너무나 아쉬워했는데, 뒤풀이를 한다는 이야기에 그저 웃긴 여행이 되었다. 친구들 중에 연예인이 몇 명 있기 때문에 약속을 미리 잡지 않으면 수개월이 지나도 만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서둘러 날짜부터 잡았고, 우리의 진짜 여행의 마무리는 7월로 예정되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가는 게 아쉬운 요즘이지만 이렇게 친구들과의 약속이 조금은 멀리 잡힌다면 또 그날의 기대감에 어서 빨리 시간이 가길 바라기도 한다. 언제까지 이렇게 애매한 사람으로 사는지 모르겠는 요즘이다.

어찌 되었든 아쉬움을 뒤로한 채 여행의 마무리를 남겨놓았으니 약속의 그날까지 내가 취업을 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조금 더 여유 있게 사회인인척 친구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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