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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색 Dec 21. 2021

눈물로 걷고야 깨닫는 것들

삶 속의 진정한 가치 찾기

  수요일마다 소규모 기독교학교에서 독서수업을 한다. 그리고 그 학교 근방에 언니가 살고 있어 수업이 끝나면 언니 집에서 점심을 먹고 조카를 놀아주었다. 지난주도 같은 일정으로 움직였다. 30대 중반의, 아무리 끌어와도 부족한 체력을 최대한 당겨 쓰며 조카의 손에 잡혀 이리저리 굴려지다 보니 어느덧 낮잠시간이었다. 그냥 눕힌다고 재울 수 있지 않다는 걸 아기 키우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다. 조카를 재우려고 유모차에 태워 밖으로 나왔다. 날이 추운 데다 아기가 딱 한 번 바람을 맞더니 목소리가 걸걸해져서 꽁꽁 싸매느라 또 한바탕 술래잡기를 했다. 낮잠은 아기보다 나와 언니가 더 고팠다. 겨우 집 밖으로 나서 유모차를 끌고 아파트 단지 내 근린공원을 산책했다. 조카가 간간이 자기 존재를 알리고 또 나와 엄마가 잘 있나 확인하려고 "엄마!" 하고 불렀다가 "임모!" 하고 부르며 찾았다. 그러면 "어~" 하고 크게 대답해주고 눈도 맞추며 싱긋 서로 웃어주었다. 근린공원 한 바퀴를 다 돌고 크게 돌아 다시 집에 가는 길, 아기는 어느새 잠잠했다.


  그날은 새벽녘에 내린 비로 기온이 살짝 올라가서 조금 걸으니까 금방 더운 기운에 휩싸였다. 우리는 결혼을 앞둔 어느 커플에 대한 이야기를 수면 위에 올린 뒤, 언니가 결혼했을 적의 이야기, 그리고 남들이 결혼을 결정하고서 어느 정도의 경제 규모로 살림을 시작했나 따위를 얘기 나눴다.


  인터넷이 발달하고부터는 유행에 편승하기 좋아하는 이 좁은 나라에서 더욱 개인의 생활 방식을 쉽게 공유하고 공개하며 남들이 한다 하면 으레 다 해야 할 것만 같은 소외감의 공포를 더 많은 분야에서 느끼게 되었다. 남들이 아파트를 선호하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너도 나도 아파트에 살아야 하고, 남들이 어느 브랜드에 몰린다 하면 우리 집에도 같은 상표가 적어도 하나쯤은 있어야 뒤떨어지지 않을 것 같고, 남들이 결혼할 때 이 정도 갖춘다 하면 다들 그만큼은 해야겠지 하는 마음을 어느 분야에서든 누구나 한 번쯤은 느꼈고, 거기서 누군가는 압박감도 받았고, 남들같이 살아야만 행복은 아닐 거야, 하는 마음도 가져보았다가, 그러나 또 어느새 없어 보이거나 남부끄럽지 않게는 하고 살고 싶은 마음을 품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남의 결혼 소식이 부럽고, 동시에 우울함을 자극받는다. 그러나 이런 마음이 들면 불편하고 불쾌하니까 되도록 떨쳐내려 얼른 너무 깊은 생각을 피해 간다. 남극체험이라는 펭귄 장애물 피해 달리기 게임에서처럼, 깊고 어둡고 차가운 얼음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다른 길로 미끄러지듯 옮겨간다.


  사실 언니도 형부와 결혼하려고 서로 경제 사정을 오픈했을 때 나만큼이나 여의치 않은 형편이었다. 나이는 지금의 나보다 몇 살 어렸지만, 어쨌든 언니의 결혼이 그때까지만 해도 그리 신기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지금보다 세상 물정에 둔감했던 나이였기에 그 정도 형편으로도 충분히 결혼할 수 있는 줄로만 알았다. 두 사람의 결혼에 '계산'이라는 게 빠졌기 때문인 줄은 몰랐다.


  언니가 얘기해 준 다른 커플의 결혼 과정도 만만치 않게 계산적인 데가 없었다. 그래서 물론 시작은 매우 미미했고 빠듯했다. 지금은 신랑이 대기업에 입사해서 준수하게 사는 모양이었다. 사는 집도 제법 괜찮은 브랜드 아파트라고 들었다.


  이야기를 하다 문득 생각난 것을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나 가끔씩 생각나는 예전 일이 하나 있거든. 왜 우리 처음 시골에 땅 사서 집 짓고 그럴 때, 교회 사택도 함께 지었잖아. 사택이라고 뭐 그리 잘 지은 것도 아니고 아주 싸구려 재료만 가지고 최소한의 대금으로 겉보기만 집 같아 보이게 지어놨는데 말이지. 사실상 창고나 다름없었지. 우리 집도 그랬고. 그렇게 집 다 지어지고 몇 년 더 지났을 거야, 아마. 그즈음에, 한여름인데 그런 헐거운 집이 얼마나 덥겠어. 그래서 회의를 해서 에어컨이랑 뭐 몇 가지 안 되는 가전을 사택에 놔드렸을 거야. 벌써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해. 아무튼 목사님 가정이 그때서야 처음 집 다운 집을 가져보시게 된 거지. 그전까지는 반지하라든지, 에휴, 생각만 해도 귀신 나올 것 같은 그런 동굴 같은 데서나 살고, 그마저도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시면서 - 이때부터 눈에 벌써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셨는데…. 그 첫째 언니가 에어컨이랑 그런 게 집에 들어온 날, 아마 그때 그 언니가 대학원생이었지? 학교에서 한참 먼 거리의 집에 딱 돌아와서 소파에 앉아 에어컨 바람을 쐬며 사모님께 이렇게 말했대. '엄마, 우리 늦복 터졌어?' 하는 우스갯소리를 말이야. 이런 비슷한 말이었을 거야. 그 말을 사모님이 웃으면서 우리들 앞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거든. 그땐 내가 이십 대 초반이었겠지. 속으로 목사님 댁에서 하나님 말씀 잘 배웠을 언니가 어쩜 저런 소리를 하지? 어째서 물질에 복이 있다는 거야? 속으로 경멸하는 마음이 들었거든.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언니의 그 말이 자꾸만 떠오르고, 떠오를 때마다 자꾸만 내 마음이 참 못됐다는 생각이 짙어지더라. 언니가 그동안 얼마나 어려운 형편에서 힘들게 살아왔는지 잘 알면서 내 마음은 가시 같은 그런 못된 생각만 할 수 있었을까? 지금도 그 언니가 사역자 가정에 사모로 시집을 가서 여전히 어렵게 살아가고 있잖아. 살면서 단 한 번도 풍족하게 지낸 적이 없는데 말이야. 그런데도 너무 힘 있게 잘 살고 있고.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나란 인간은 참 마음이 가난한 것 같아." 내 눈에는 눈물이 대롱대롱 달렸고 얼굴은 슬픔 때문에 뜨거워져 있었다.


  나는 일평생 가난에 시달려 살아왔고, 그랬기에 당연히 속물근성이라는 건 나와 어울리지 않을 거라 단정 지었다. 그러나 내 폐부를 낱낱이 들여다보게 된 스물아홉 살 먹은 어느 한 계절에, 나는 나를 보잘것없이 취급하는 어떤 사람이 사실은 내가 그동안 절친하다고 여겨 온 사람이었기에 절망하고 탄식하다가 물끄러미 그런 생각의 꼬리를 물게 되었다. '그 사람이 속물이라서 나를 무시한다고 치자. 그러면 이런 추측을 해내는 나야말로 속물이니까 할 수 있는 추측이 아니었을까? 아, 진짜 속물은 나였구나. 나였어.' 작은 영어교습소를 언니와 함께 운영할 때였다. 수중에는 고작 몇 천원이 남아 1원 한 푼도 돈으로 보일 정도로 여유란 말라버린 우물 바닥 같던 시기였다. 청첩장도 보내오지 않은 대학 동기의 결혼 소식을 다른 동기에게 우연히 듣고 같이 가잔 말에 거절도 못해 동생에게 겨우 3만 원을 빌려가서 축의금을 내고, 민망해서 밥도 안 먹고 나왔건만 결혼한 동기는 기분이 상했던지 답례품인 거울도 함께 간 친구에게만 몰래 줬다가 나중에 셋이서 한 자리에 모였을 때 들키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유구무언이었다. 3만 원 축의 해놓고 답례까지 바라는 철면피 성격은 못 되었다. 그저 와줘서 고마웠다는 문자를 보내온 걸로 족했다.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섭섭함이 없지는 않았지만 섭섭해하는 마음마저 민망해서 내비칠 게 아니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건 나였다. 어려운 사람이 다른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더 품어주고 감싸줬어야 했는데, 측은지심도 없는 냉정함이 내게서 흘러나왔다는 걸 뒤늦게 알고 어찌나 마음이 서늘하던지. 그 언니가 워낙 모범생인 탓에 모난 데가 많은 나를 어려서부터 업신여기고 상종을 안 해줬다는 이유도 없지 않았지만, 어려서의 경험을 가지고 매사 언니를 부정적으로 대한 내 모습이 참 못나서 합리화는 집어치웠다.


  타국으로 시집간 언니와 요즘도 별달리 연락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진 못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내 문제가 컸으리라. 그래도 가끔 그쪽에 볼일이 있어 가는 사람 편에 편지도 보내고 선물을 챙겨주기도 했다. 언니에게 무얼 돌려받는 것도 아니고 돌려받고 싶은 마음도 없이 그저 안부인사 겸 띄우는 전갈처럼 보내는 것이다. 언니가 그 사람을 통해 전하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면 바닷바람이라도 쐰 듯 개운해진다. 대단치도 않은 거라도 기뻤다니 다행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 돌아가는 법칙을 배울수록,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배운 참된 가치와 행복이 무엇인지 알았다가도 잊어먹고 반성하다가도 우울해지곤 했다. 현재도 매일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다. 도대체 남부끄럽지 않은 삶이 뭐기에 거기 매달려서 종일 시름을 안고 우울에 처박혀서 진짜 삶을 놓친 채로 헛헛하게 살아가는 걸까? 무얼 얼마나 가진 들 만족의 끝이 있을까? 그렇지 않은 줄 알면서도 기어코 똥인지 된장인지 맛을 보아야만 할까? 과거의 잘못된 걸음과 방향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충분히, 수도 없이 놓치고 살아왔다. 이 세상은 잠깐이고, 내 인생은 그보다도 짧다. 다시금 나침반을 들고 행로를 정확히 정해가야 한다. 앞으로 내가 가는 길에 '나'라는 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라는 것만큼 위험한 돌부리가 또 있을까? 진정한 행복을 가로막는 못되고 고집스럽고 이기적인 아집을 돌아보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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