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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색 Jan 24. 2022

목이 길고 생각이 짧아 슬픈 짐승

  서른다섯, 경력도 없는 분야의 회사에서 면접 제의가 들어왔고 면접 후 이튿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입사까지 기한이 좀 남았건만 전 직장이 낳은 회사 공포증 때문에 출근이 망설여진다. 이미 입사 제의를 받아놓고서 무를 기회가 찾아오길 슬며시 기다리는 마음은 뭘까?


  충분히 긴 방학을 보냈음에도 역시 출근일이 다가올수록 아쉬워진다. 어떻게 하면 더 신나게, 더 편하게, 더 충분히 남은 방학을 즐길까 고뇌에 빠졌다. 이렇게 멍청한 나라서, 이기적이고 경박한 나라서 또 무식한 짓을 저질러버리고 말았다.



  오전, 오후 예배가 모두 끝나고 차례로 인사까지 마친 직후, 교회 막내 윤진이가 요석이 양복 옷자락부터 해서 예배당 바닥에 폭포수처럼 토를 쏟아냈다. 작은 뱃속에 무슨 음식물이 그렇게나 들었는지 양이 꽤 많았다. 다들 놀라서 엉거주춤하는 사이에 생각할 겨를 없이 1층으로 내려가 젖은 걸레를 가져와 얼른 훔쳐냈다. 이미 윤진이의 엄마 혜미가 두루마리 휴지를 둘둘 풀어내서 바닥을 닦아내고 있었다. 민폐를 끼쳤다고 여기는지 민망하고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윤진이는 아침부터 체기가 있어 기운 없이 엄마 무릎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점심에는 기운을 조금 차려서 누룽지 과자를 양손에 들고 먹는 걸 보았다. 오후 예배가 끝나고 종일 앓고 있는 윤진이가 안쓰러웠는지 요석이가 번쩍 안아서 토닥여주었다. 잠시 어깨에 얼굴을 기대는가 싶더니 왈칵, 토를 해버렸다. 먹은 것을 다 게워낼 때까지 토한 자리 주변에 세워놓고 마저 비우게 했다.


  혜미와 함께 토를 닦아내는 동안 한 가지 걱정이 들었다. 최근에 일자리를 얻은 혜미가 아픈 윤진이를 유치원에 보낼 수 있을까 싶었다. 말을 꺼내봐야 나도 별도리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묻지는 못했다. 바닥이랑 의자, 윤진이 옷에 묻은 토를 전부 닦아내고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곤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동안 윤진이 일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예상치 못하게 지애가 다니는 어린이집 원아가 코로나 양성 반응이 나와서 3일간 휴원 명령이 떨어졌다. 아직도 잠자리에서 휴대폰을 보며 뒹굴던 월요일 아침에 출근했던 지애가 금방 돌아오니 반가웠다. 함께 점심으로 토스트를 해 먹고 코로나 자가검진키트로 콧구멍도 쑤셔보고 집 대청소, 빨래, 분리수거도 하고 선물 받은 책도 읽으며 오후를 보내었고, 또 늦은 오후 즈음 영어학원에서 돌아온 요석이에게 지애가 일찍 퇴근한 이유를 얘기해줬다.


  요석이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뜻밖의 이야기를 전했다. "혜미 누나가 치킨을 보내줬어. 양복 더럽혀서 미안하다고."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차암."에 이어서 나온 나의 질문은 "무슨 치킨?"이었다. 치킨을 먹으려니 신이 나서 더 중대한 문제는 생각조차 나질 않았다. 그저 이런 계획뿐이었다. 6시가 되기 전에 치킨을 시켜야 제때 배달이 온다, 지애가 치킨을 못 먹으니 남은 갈비를 구워줘야 한다, 그리고 그 생각에 맞춰진 빠른 행동력으로 저녁 식사는 완벽한 타이밍에 준비되었다.


  오래간만에 롤 계정을 찾아보았다. 상 치우기와 저녁 설거지 임무 완수, 일반 쓰레기와 종이 쓰레기 갖다 버리기 임무 완수, 양치 임무 완수, 추억의 사진과 동영상 감상까지 끝내니 게임이나 한 판 할 생각이었다. 게임을 다운로드하는 동안 어제 주일 기도 녹취를 하는데, 기도 말씀이 무감각했던 심장을 콕콕 찔러댔다.



  어제는 두 가지 고민거리를 동생들과 서울로 돌아오는 도로 위에서,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함께 나눴다. 그러다 요석이와 한 차례 언쟁을 벌였고 나는 잠자코 있다가 싸늘한 말투로 요석이에게 따졌다. "야, 요석아, 내 고민이 같잖니?" 뒤돌아 앉아있던 요석이는 마음을 바꿔 먹었다. 한결 누그러진 따뜻한 어조로 살벌해진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아니야, 누나. 내가 누나 말이 헷갈려서 그랬어." 그러나 내용은 한층 더 촌철살인이었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모순된 사람인지, 평소에는 이기적으로 굴다가 반짝 이타심을 부리는 모습에서 얼마나 진정성이 안 보이는지를 꼬집어냈다. 뭐라고 반박을 할지 머리를 굴리다가 다 맞는 말이어서 수긍했다. 그래도 변명의 여지는 조금 남겼다. '네 말이 다 맞아. 하지만 나도 힘들어서 더 이상 못하겠어. 고갈됐단 말이야. 내가 얼마나 사람 좋아하고 애썼는지 알잖아. 이젠 힘들어. 다시 충전할 시간이 필요해.' 따위의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합리화 전략이었다. 요석이는 내 변명도 인정해주었다. '알지, 누나가 여태 많이 해왔지. 힘든 거 알아.' 그렇게 말해주니까 눈물이 스며 나왔다. 되도록 울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말을 이었다. "너한테 오늘 좋은 아이디어 많이 얻었고 배웠어. 네 말이 다 맞아. 기도하고 잘해봐야겠다. 마저 할 일 해." 다행히 대화는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그게 바로 어제 하루에 일어난 일인데, 내 재미 추구를 위해 게임을 다운로드하는 동안 윤진이가 아팠던 일을 또 까맣게 잊고 있었고 -치킨은 맛있게 먹었으나- 출근해야 하는 혜미가 아픈 윤진이를 어떻게 할 생각인지 일부러 묻지 않았던 기억이 선연히 떠올랐다. '이럴 수가... 난 왜 매번 이런 식이지... 정말 덜 된 인간이다.'


  기도 녹취를 끝내고 늦게서야 혜미에게 문자를 보냈다. 혜미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평펜션에 놀러 왔다고 기별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은 무슨, 지난주에 연락할 때 이번 한 주 통으로 휴가를 받았다고 혜미에게 직접 들은 걸 그새 까먹었다. 도대체 정신이 어떻게 된 걸까? 윤진이 언니들도 학교 방학 중이라서 유치원을 안 보내도 되는 사정이었다. 혜미는 신경 써줘서 고맙다고 했지만, 모든 기억이 소실된 내 정신머리는 어질어질했다.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일까, 생각이 너무 없어서일까? 나야 어찌 됐든 혜미에게 곤란한 일이 벌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대신 마지막 방학은 좀 바빠지고 말았다. 수요일까지 휴원이라 쉬게 된 지애와 시간을 보낼 테고, 목요일 하루는 온전히 혼자 보내는 마지막 하루이고, 금요일과 토요일은 혜미네와 함께 하고, 다음 주 설은 가족들과 보내면 첫 출근 전까지의 일정은 하루가 바쁘게 흘러가고 만다. 꼼짝없이 출근할 날만 남았다.



  이제는 점점 나잇값을 하는 정신상태로 새로운 업무를 잘 배우지 못할까 봐 걱정된다. 전에는 기억력이 하도 좋아서 들어간 회사마다 사람들이 입을 떠억 벌리곤 했는데 것도 이젠 다 옛말이 됐을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 씀씀이는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도 담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인격이라서 흘려버린 기억들이 많아진 것이다. 기억은 뇌세포가 아니라 마음에 저장되었다. 마음이 자꾸자꾸 좁아지고 나만 알수록 중요한 건 다 놓치고 잃어버렸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지난 일이 또 떠오르면 과거에 이미 단정 지었던 닫힌 생각들이 다시 깨어나 변모한다. 그때,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한참을 깨닫지 못했던 본질적인 문제의 원인도 알게 된다. 문제의 원인은 그러나 항상 같은 값이 나왔다. 나의 어리석음, 나의 교만, 나의 이기심이 그 전부였다. 슬프기도 하고 낙담도 되지만 금방 오늘을 또 잊을 것이다. 나는 뭐든 잘 잊고 인생은 또 그만큼 바쁘게 돌아가니까, 이런 식으로 합리화에 타고난 이기주의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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