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중적으로, 특히 여성들을 중심으로 유행해온 단어를 죽 떠올려본다. 힐링, 소확행, 욜로, 감성이 가장 보편적으로 유행을 탄 단어 혹은 신조어이다. 이렇듯 생소한 의미를 지닌 어휘들은 자세히 보면 시대 흐름에 따라 발전되어가는 한 가지 경향이 읽힌다.
우리는 이제 꽤 잘 사는 것 같다. 음식 아까운 줄 모르고 욕심껏 먹어치우는 먹방 영상도 즐겨 보고, 온갖 명품으로 치장한 부자 유튜버가 부를 자랑하고 그걸 수치심 없이 선망하고, 천문학적인 값으로 치닫는 부동산을 너나 할 것 없이 영혼까지 끌어 모아 소유한다.
얼마 전 영화 <돈 룩 업>을 보니 이 시대가 앓고 있는 병중이 무엇인지 더 선명해진다. 발길을 어디로 돌려도 넘쳐나는 먹을 것과 입을 것, 그에 따른 연쇄작용의 결과 처치곤란일 정도로 넘쳐나는 쓰레기, 너무 많은 취향과 너무 많은 물건, 나 하나 행복하기 위해 온갖 종목에서 남발하는 커스텀,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잘 사는 모양이다.
물질이 이토록 풍요한데 우리의 정신은 왜 날이 갈수록 피폐해지는 걸까? 피폐해짐의 근거는 아까 말한 생소한 단어들이 점차 본격적이고 구체적으로 디테일하게 발전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발견했다.
아무리 맛있는 걸 매일 먹고 좋은 옷가지를 새로 사도 소비의 즐거움은 순간에 불과하고 고통은 매우 느리고 지속적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우리는 치유되고 싶고 무엇으로부터의 치유인지 몰라 가설을 세워 치유의 방식을 찾아 나선다. 처음에는 우습게도 기본적인 연명을 위해 필요한 의식주 자체에서 치유 방식을 찾는다. 하지만 가설이 타당하지 않은 탓인지 치유되기에는 역부족이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기약 없는 다음을 위해 현재의 불행을 감수한다는 건 모순인 것 같아 이번엔 내일은 없다는 듯 살아도 본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그러나 떠올리면 어쩐지 마음을 적시는 아름다운 것들이 일상에 범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좋아하는 노을, 좋아하는 옛 노래, 좋아하는 빛깔, 오감을 통해 느끼는 온갖 감각적 자극을 심도 있게 추구하면 그 속에서 기쁨과 행복, 위로를 받을지도 모를 것 같다. 그런 식으로 새로운 가설과 갖가지 방법으로 날 행복하게 해주고 치유해주기 위해 끊임없이 고심한다.
방송생활을 상당히 길게 한 정신과 박사 오은영 선생님은 요즘 들어 그 전보다 대단해진 인기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의 원하는 바가 뚜렷해진 시대인 만큼 오은영 선생님의 막힘없는 지식과 언변, 논리적이고 설득력 높은 문제 해결 방식이 큰 신임을 받는 걸로 보인다. 무엇보다 오은영 선생님의 문제 해결 방식의 핵심은 ‘치유’에 있고, 그게 현시대 우리의 관심사를 관통했다. 수많은 사례를 다루며 보이는 강단 있고 사려 깊은 태도에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매료되었다.
‘사람이 찾는 사람’이 된 오은영 선생님의 새로운 방송 프로그램 <금쪽 상담소>는 그동안 주로 아동심리의 대변자로 비췄던 포지션을 ‘어른이 되었으나 아이였던’ 사람들에까지 확대시켰다. <금쪽 상담소>에 내담자로 출연한 방송인들은 다른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익히 얼굴을 알린 사람들이었다. 누구나 사연이 있다는 걸 알지만서도 그들이 꺼낸 사연이 하나같이 의외였다. 다른 방송에서 봤던 모습에서는 조금도 유추할 수 없는 각자의 속사정이 실로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폭력적이고 통제 성향이 강한 아버지가 이토록 세상에 많다는 사실, 하지만 낯빛에서는 단서도 발견할 수 없는 예쁘고 정돈된 모습, 그 엄청난 간극을 평생 감춰 왔고 이 세상 모두가 감추고 살아갔다.
유년 시절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금쪽 상담소>에서 토로한 김윤아 씨의 방송을 보고 나서 들었던 수많은 감정을 한 마디로 일축해서 동생에게 말했다. “왜 사람들은 어두운 걸 감추려고 할까?” 그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습성은 도대체 왜 그럴까 하는, 궁금한 건 무엇이든 분석해서 답을 찾아야 직성이 풀리는 기질적인 자문이었다.
<금쪽 상담소>에서 폭력적인 아버지로 인한 불운한 가정사를 고백한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양치승 씨라는 우락부락한 스포츠 트레이너였다. 양치승 씨의 아버지는 이미 고인이 되셨다. 살아계셨으면 방송에 나와 말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세상에 말하기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들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는 궁금증이 들어 김윤아 씨의 아버지는 살아계시는지 검색을 해보았다. 그도 몇 해 전에 돌아가셨다. ‘아, 그래서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겠구나. 그동안 얼마나 답답하고 말하고 싶었을까? 지금의 난 그럴 수 없는데, 난 언제쯤...’
아무래도 양치승 씨는 남자이고 김윤아 씨는 여자라서 김윤아 씨의 감정에 더 많이 공감되었다. 김윤아 씨는 아버지의 억압과 폭력과 통제 속에서 어떻게 버티고 살아왔을까? 어떤 심정이었기에 그녀는 무력감으로 좌절하지 않고 젊어서부터 목청을 높여 노래할 수 있었을까? 기질적으로 대범한 데가 있는 것 같다. 나는 기질적으로 소심하고 의기소침한 사람이라 더 벗어나기 힘든 걸까?
가장 공감한 대목은 자꾸만 밖으로 소리를 뱉어내고 싶었다는 표현이었다. 나는 이런 욕구를 한 마디로 ‘고발자 정신’이라고 불렀다. 나의 상처와 피해를 세상에 고발하고 폭로하고 싶었고, 그 방편으로 사회문제나 사람의 모순 따위를 예리하게 짚고 비판하는 심리가 발동했다. 대리만족 같은 거였다. 정말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고발하고 싶은 건 다른 것이지만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게 되었다.
하루는 아빠에게 흠씬 얻어맞은 적이 있었다. 그날 아빠는 대출 빚을 갚으려고 우리가 다니는 공장에 함께 취직해서 출근하는 엄마를 아침부터 들볶아댔다. 대학교 1학년 2학기 학자금 대출을 신청하려고 나는 그날 근무를 쉬었다. 대출 신청이 처음이라 부모님 도움이 필요한데 엄마는 출근 때문에 함께 가줄 수가 없었다. 아빠는 귀찮은 일을 마지못해 떠안았다. 함께 농협에 가서 창구에 앉아 설명대로 몇 글자 적기만 하면 될 일이었고, 아빠가 할일은 거기까지 나를 차로 데려다주는 일, 옆에서 함께 설명을 들어주는 일이었다. 아빠는 체면 구기는 일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했다. 그래서 짜증을 부리며 자기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거냐며 엄마를 다그친 거였다. 나는 아빠의 태도에 진절머리가 났다. 화가 치밀어 올라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게 내가 얻어맞은 이유였다. 아빠에게 화를 표출했기 때문이었다.
김윤아 씨의 아버지는 목공소에서 크기 별로 각목을 맞춰왔다고 했는데, 우리 집은 튼튼한 팔과 다리가 훌륭한 맷감이었다. 아빠에게 난타당하듯 얼굴과 몸을 가리지 않고 주먹질을 당하면서 나는 참혹하고 비참했다. 나는 개나 돼지가 아니었다. 누구도 사람을 이런 식으로 다루어선 안 되었다. 나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발로 짓밟히는 동안 아빠를 향해 마구 발길질했다. 오히려 부작용으로 적당히 얻어맞을 것을 말 그대로 흠씬 얻어맞게 되었다. 아빠는 내게 심한 쌍욕을 퍼부었고 패륜아라고 불렀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아빠는 엄마에게 나의 패륜적인 행위를 고발했지만, 전후 사정을 뒤바꿔서 거짓을 말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내 마음은 또 다른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내가 패륜을 저질렀다는 것이, 아빠를 발로 차려했다는 게 마음에 걸리고 위축되어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자리에 형벌을 구형받을 범죄자는 아빠가 아니라 나라고 정해진 것 같았다. 나는 조금도 내키지 않았으나 여기서 사과하지 않으면 나락에 떨어질까 두려워 아빠에게 용서를 구했다. 아빠는 나를 흔쾌히 용서했다.
그때 내 나이는 스무 살이었다. 15년이 흘렀지만, 아빠에 대한 마음은 그 이후로 더 확실히, 굳건히 닫혔다. 내가 당한 건 고작 일부이고, 그의 악행은 우리 가족 모두가 골고루 당해왔다. 가장 모질고 끔찍한 악행의 피해자는 엄마였다. 내가 오래도록 집을 떠나지 못한 건 엄마를 보호해주고 싶어서였다. 우리는 아빠를 떠나려고 여러 번 시도했었다. 그러나 오로지 관용으로, 신앙적 요구로 번번이 도중에 그만두어야 했다. 마지막 시도 이후로 성정의 변화는 조금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아빠의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 새롭게 바뀐 태도는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사람의 악함은 그 끝이 없다는 걸 실감했다. 이제 그는 우리에게 당한 피해자이고, 그는 크나큰 부정을 가진 따스한 아빠였으며, 엄마는 그런 자신과 아이들을 이간질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수정된 시나리오를 교회 식구 중에도 동조하며 우리 가정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때때로 나는 투철한 ‘고발자 정신’을 발휘해서 아빠의 악행을 교회 식구 여러 사람에게 떠벌렸지만, 역효과만 일어났다. 사람은 자기가 겪지 않은 일은 사실로 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그런 짓은 안 한다. 알고 싶은 대로, 보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둔다. 나 역시 그대들의 가정사를 나 알고 싶은 대로, 보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싶은 대로 두겠다는 소심한 복수심을 안고서 살아갈 뿐이다.
나에게 모든 사람은 아주 똑같을 정도로 다 거기서 거기이다. 단 한 사람도 여기서 못 벗어난다. 나조차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솔직하지 못하고 꾸미고 감추는 사람을 혐오한다. 솔직하지 못할 바에야 말하지 않는 게 낫고, 꾸미고 감출 바에야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음 싶다. 장식이 화려할수록 보잘것없는 알맹이를 보면 실망감이 훨씬 커지는 법이다.
나의 의기소침한 면은 유년시절 할아버지의 정서적, 신체적 학대 때문인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방이 네 칸 있는 24평짜리 한옥에서 삼대가 함께 살며 할아버지, 할머니와 한 방을 썼다. 원래도 조심스러운 성향을 타고난 데다가 문지방 밟으면 회초리, 조금 큰소리 나면 회초리, 마음에 안 들면 회초리, 거기에 더해진 윽박지르기까지 어린 인생이 처음부터 참 무던하지 못하고 각박해서 살길 찾기도 버거웠다. 특히 둘째는 아들이길 원했던 내가 딸로 태어나자 할아버지의 미움을 몹시 사고 말았다. 옆 칸 부엌에서 밥 짓던 엄마는 당신 자식들을 상대로 모진 학대를 놀이처럼 일삼는 할아버지에게 살인충동을 느끼곤 했다. 우리는 많이 참고, 인내하고, 견디고 긴 시간을 버텨왔다. 오죽하면 가해자로 둔갑해버린 아주 기나긴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가해자가 아니라고 단언하지는 못하겠다.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일이 많다. 나같이 병든 사람이 얼마나 다른 사람을 아프고 힘들게 했을까?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거다. 내 진정한 치유는 상처 보듬기 같은 간지러운 방법은 안 통한다. 화해 밖에 답이 없다. 아빠가 밉지만, 아빠와 화해하고 싶다. 나도 누군가에게 주었을 상처이고, 인간이란 다 이런 험악한 존재라서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고 싶다. 용서 같은 거창한 걸 하지는 못하겠다. 내게 그럴 자격은 없는 것 같다. 서로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는 무섭고 잔인하고 끔찍한 사람들끼리 덤덤하게 악수하고, 또 잘못하겠지만, 지금까지 한 일은 넘어가 주자고, 끊임없는 굴레의 속박에서 벗어나자고 말하며 끝내버리고 싶다. 그러면 먹을 것으로도, 좋은 옷으로도,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으로도 치유되지 않던 마음의 무거운 짐에서 훌훌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늘 미안한 마음이다. 불특정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산다. 나는 아직 모두가 밉다. 그래서 글을 쓴다. 내 맘을 알아주지 않는 모두가 미워서, 그리고 또 미안해서이다. 밤새도록 지칠 때까지 미움으로 생각을 발전시키고 그걸 토해내지 않으면 갑갑해서 못 살겠다. 내게 없는 걸 갖고 싶은 마음, 없어도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 이렇듯 우리의 지향점은 본디 두 가지 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