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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색 Feb 10. 2022

비밀을 대하는 자세

2010년도 습작 산문

  누군가 나에게 비밀을 털어놔 준다면 내 성격상 기분이 꽤나 좋을 것 같다. 막상 비밀이라고 해서 진지하게 들어보니 “그게 왜 비밀이야?”하는 반문이 나올 만한 이야기라 해도 비밀이란 전제 없이 얘기를 들을 때보다 “이건 비밀인데”하고 조심스레 말문을 열면서 하는 얘기에 귀가 더 솔깃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때론 그 비밀이 나를 위험하거나 곤란한 처지에 빠뜨릴 수도 있다. 아니면 정말 비밀을 알아버리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거나 비밀이라는 그 사실이 없었던 일이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되거나 말이다.

  사람의 마음을 여는 데에는 진심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깊은 공감과 존중하는 마음으로 나오는 이해의 시선이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해서 내게 자기 생각을 터놓는 사람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알아. 이해해. 겪어보지 않아서 다는 모르지만 조금은 알아.”였다.


  나는 그날이라고 말하는 어느 날 약속 장소로 정한 낯선 카페에 혼자 앉아 있었다. 주문은 이따가 할게요,라고 말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참 조그만 카페였다. 답답하고 밀집되었다고 해야 하나? 나는 작은 공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탁 트인 야외에서라면 더 좋을 것 같았지만 초봄이었고 날씨가 꽤 쌀쌀했다. 그리고…….

  조그만 카페에 조그만 테이블과 조그만 의자가 불편해서 자꾸 이리저리 옮겨 앉았다. 시간은 더디 가는 것 같았지만 어느새 밖이 어두워져 있었다. 왜 이리 늦는 걸까? 혹시 이 카페가 아닌가? 아니면 역시 아직은 만나기가 어려운가? 성격이 급해 점점 조급증이 온다. 그냥 집에 갈 걸 그랬나? 하면서 또 자리를 옮겼다. 안절부절못하는 내 모습에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연인들도 덩달아 심란해졌을 것 같다. 곧 있으면 나는 비밀과 조우하게 된다.

  바깥 카페 유리문에 하얀 얼굴이 바싹 붙는다. 얼굴이 맞는지 아닌지 뚫어지게 살펴본다. 바깥에 있는 사람도 나를 뚫어지게 본다. 그러더니 결국 들어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도 나는 잘 모르겠다. 원래 사람 얼굴을 잘 못 알아본다. 그 애가 내 옆에 앉아서 “수진, 잘 지냈어?”라고 해서야 알았다.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사람이 달라 보인다. 아니, 너무 낯선 분위기에 낯선 느낌. 나와 과는 달랐지만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고 함께 교회를 다니던 그 친구가 맞는지,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건지 혼란스럽다. 나는 친구 혜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혜미가 왔는데, 이 사람은 혜미가 아니었다.

  그날 그 카페에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거의 몇 마디 오가지 않았다. 한 마디 꺼내면 대답도 한 마디 이상은 아니었다. 그건 내가 아직 그날 만난 혜미에게 적응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내가 원래 혜미에 대해서 잘 몰랐던 걸까? 그렇기도 할 것이다. 혜미는 도통 자기 얘기를 잘하지 않는 비밀주의랄까, 신비주의랄까. 일부러 그랬다기보다 나중에 듣기로는 자기는 다른 사람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고, 그러니까 남도 별로 관심 없을 것 같아서 일부러 얘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끊긴 혜미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나도 포함되어 있었고. 나와는 꾸준히 연락이 닿기는 했지만 만날 수는 없었다. 또 연락을 끊은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고 여전히 자기 소식으로는 그저 “잘 지내고 있어.”가 전부였다. 나는 성급하게 재촉하지 않았다. 급하고 직설적인 성격으로 여러 번 피 본 경험이 있어서 혜미가 굳이 말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캐묻지 않으려고 절제하고 절제했다. 그렇게 2년, 햇수로 3년을 인내했고 혜미가 드디어 나와 약속을 잡았다.


  그랬는데 얼굴을 맞대고 나서도 특별한 얘기가 오가지 않는 상황이다. 나는 전화 통화를 할 때보다 더욱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마도 1년 같은 1시간, 20년 같은 2시간 정도 지났을까? 아니면 겨우 20분 정도 지났을까? 혜미는 말한다.

   “나 결혼했어.”

  심장이 찌릿하다. 마치 아주 이상하고 희한한 얘기를 들은 것 같다. 그렇지만 다시 감정을 추스르고 인내한다. 여기까지 와서, 이제야 마음을 열기 시작한 혜미와의 일을 그르칠 수가 없다. 나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까 까다롭게 고민했다. 그냥 혜미 식으로 나가본다. 아주 담담하게 혜미 이야기를 듣는다. 네가 잘못한 건 없어. 사람은 다 그런 법. 나라도 별 수 없을 거야. 난 너보다 더했을지도. 이런 말들을 했던가? 사실 내가 혜미에게 무슨 말을 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렇게 담담하게 들으려던 나는 왜 결혼이란 단어에서 미리 예상하지 못해서 두 번 연속 타격을 받고 말았을까? 혜미가 카페 근처에 있는 친정집에서 예쁜 아기를 데려왔다. 인형처럼 생긴 너무나 귀여운 여자아이. 그런데 이 아기가 혜미가 배 아파서 낳은 아이란다. 이렇게나 큰 아기를? 어떻게 저 조그만 배에서? 그리고 닮은 것도 모르겠는데. 결혼도 아기도 다 거짓말은 아닐까? 사실은 혜미의 조카가 아닐까? 그리고 공부를 잘하던 혜미는 나보다 더 좋은 대학교에서 하고 싶다던 화학을 전공하며 나처럼 하루하루 과제에 치이거나 다가오는 시험에 노심초사하고 또 방학이면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등록금을 마련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혜미가 아기 엄마라고? 거짓말.

  나랑 혜미는 다 식은 커피를 앞에 두고 테이블에 기대어 울었다. 커피가 참 쓰다. 시럽을 얼마나 많이 넣었는데, 카페 모양만 그럴듯하지 커피는 별맛이네. 우리는 그만 일어나기로 한다. 아기가 밥을 먹은 지 꽤 돼서 배가 고플 것이라고 혜미가 염려스럽게 말했다. 나는 커피를 계산하고 혜미는 아기를 데리고 먼저 나갔다. 길 건너편에서 차 한 대가 경적을 빵빵 두드린다. 운전자석에 하얗고 작은 얼굴의 혜미가 보인다. 낯설다. 아, 이제 알겠다. 혜미가 왜 그렇게 낯설어 보였는지. 나는 뒷좌석에 앉았다. 조수석에는 혜미와 닮은 여자, 곧 혜미의 언니가 남산만 해진 배를 가누며 앉아있다. 언니는 곧 쌍둥이를 낳을 거라고 한다. 혜미는 언니를 어딘가에 내려주고 우리는 피자를 먹으러 갔다. 혜미가 주차를 하는 동안 나는 아기를 앉고 2층에 있는 가게로 올라간다. 올라가다가 전에 함께 일했던 학원 선생님을 만난다. 아기가 누구냐고 묻는데 “친구 딸이에요.”라고 대답하면서도 틀린 답을 내놓은 것 같다. 아기와 단둘이 앉아 혜미를 기다린다. 혜미 딸이 맞긴 맞나 보다. 낯선 사람과 있어도 차분하고 얌전하게 말을 잘 듣는다. 그런데다 보면 볼수록 신기할 정도로 예쁘다.

  혜미와 밥을 먹는다. 혜미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조그만 아기 입에 밥을 넣어주고 놀아주고 맨발로 돌아다니는 아기 발에 신발을 신기고 또 멀리까지 가면 다시 붙잡아오기를 반복한다. 덩달아 나도 몇 번을 일어났다 앉았다, 정신이 없다. 엄마들은 늘 밥을 대강 먹는다고 하는데, 혜미 덕분에 처음으로 피자를 대강 먹고 나왔다. 터미널까지 태워준 혜미와 악수를 했다. 또 보자고 하면서.


  혜미는 끊었던 연락을 다시 연결했다. 안 나오던 교회도 나오고 연락도 자주 한다. 이제는 남편을 도와 맞벌이를 한다. 나는 가끔씩 “언젠가는 학교 갈 거지?”하고 마음을 떠보지만 혜미는 아직까지는 집안일을 하느라 여유가 없다. 사실 나는 혜미를 가끔은 부러워하고 있다. 걔는 모르겠지만 존경한다. 결혼은 쉬운 게 아니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혜미에게 더 이상 “알아. 이해해. 겪어보지 않아서 다는 모르지만 조금은 알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아직 모르는 것들이 많다. 배우고 겪어야만 알 수 있다고 말할 자격이 되는 것도 있다. 혜미가 그 당시 카페에서 내게 “너는 몰라. 너는 이게 어떤 건지 전혀 몰라.”라고 말해서 약간 충격을 받았지만 이제는 인정한다. 그건 비밀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고 현실이었다. 감출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코에 닿아있는 현실. 나는 알지도 못하고 이해도 못하는 혜미만의 현실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사람의 마음을 여는 데에는 진심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깊은 공감과 존중하는 마음으로 나오는 이해의 시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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