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없는 영국인

우리는 왜 삶의 모든 변수를 통제하려 할까

by 양수경


영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아들이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중 하나는 비가 오는데도 우산을 쓰지 않고 집을 나서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애써 챙겨준 우산을 현관에 슬쩍 두고 나가는 아들을 보며 나는 묘한 괴리감을 느꼈다. 하루는 우산을 들고 밖으로 따라 나갔다가, 빗속을 그냥 걸어가는 또래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고는 이내 체념했다. ‘저 나이엔 저렇게 비를 맞는 게 쿨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그렇게 짐작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영국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이곳에서는 웬만한 비쯤은 그냥 맞고 걷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국은 비가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애매하게 내린다. 그래서 매번 우산을 펴거나 거추장스럽게 챙겨 다니는 것보다, 그저 코트 깃을 세우고 걷는 쪽이 일상으로 굳어진 듯하다. 변덕스러운 4월의 날씨 속에서 사람들은 후드를 쓱 뒤집어쓰고 묵묵히 빗속을 걸어간다.


그래서 우산 없는 영국인은 단순히 준비성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다. 불편함을 호들 갑스레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 날씨와 싸우기보다 그저 날씨를 통과해 내는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다. 오랫동안 예측 불허의 날씨를 견디면서,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조금은 무심해지고 기꺼이 체념하는 법을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비를 멈추게 할 수 없다면, 영국인은 그 비를 농담과 체념으로 견디는 쪽을 택했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일기예보가 비를 예고해도 해가 쨍쨍 나고, 맑다고 예보한 날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예보를 참고는 하지만, 하루의 운명을 날씨에 온전히 맡기지는 않는다. 영국의 기상청(Met Office)조차 장기 예보의 본질적인 불확실성을 인정하며, 과장된 날씨 헤드라인을 조심해서 보라고 당부할 정도다.


얼마 전 영국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에는 영국인들이 궂은비를 견디기 위해 기묘한 농담을 만들어내며, 이 우울한 날씨마저 일종의 '문화적 스토이시즘(Stoicism, 금욕과 극기)'으로 받아들인다는 기사가 실렸다. 가십을 다루는 타블로이드가 아닌 정론지 브로드시트의 기사마저도 지극히 영국적이었다. 비를 어떻게든 없애거나 피하려 하기보다, 비와 함께 어떻게 버틸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작가 빌 브라이슨은 자신의 책 『작은 섬에서 온 편지(Notes from a Small Island)』에서 영국의 날씨 예보를 이렇게 요약했다. “Dry and warm, but cooler with some rain. (건조하고 따뜻하되, 더 서늘하고, 비도 오는 날)” 앞뒤가 서로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모순된 문장인데, 이상하게도 영국의 날씨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 명문장이다.


영국은 비를 예측하는 나라라기보다, 비를 농담으로 견디는 나라에 가깝다.


바로 어제도 그랬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리치먼드 공원을 친구와 걷고 있었는데, 일기예보와 달리 햇볕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그러다 금세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곧장 비가 쏟아졌고, 10여 분쯤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해가 났다. 그러니 영국의 일기예보는 '틀린 예보'라기보다 '모순된 현실' 그 자체에 가깝다. 이곳 사람들은 날씨를 예측하고 통제하려 하기보다, 차라리 날씨를 가벼운 화제로 돌리며 웃어넘기는 데 익숙해진 듯하다.


반면, 한국에서 살던 나는 비 예보가 있으면 늘 우산을 완벽하게 챙겼다. 지금도 비를 맞는 것을 꽤 큰일처럼 여긴다. 외출 전 날씨를 확인하고 가방 안에 작은 접이식 우산 하나를 넣어두는 일은 내게 거의 강박에 가까운 습관이다.


그런데 예측 불허의 순간은 늘 존재한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 그럴 때도 나는 여전히 가방이라도 머리 위로 들어 올린다. 비를 맞는 것 자체보다, 손질한 머리가 젖어 볼품없이 망가지는 일이 더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단순히 젖는 것이 싫어서만은 아니다. 흐트러지는 것, 망가지는 것, 내가 예상한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 그 안에 들어 있다.


“맑고 따뜻하되, 더 서늘하고, 비도 오는 날.” 영국 날씨의 모순을 가장 영국적으로 포착한 책.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왜 그토록 삶의 모든 변수를 완벽하게 통제하려 할까.


궂은 날씨를 대하는 태도에는, 어쩌면 삶의 고난이나 통제할 수 없는 변수를 대하는 방식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끝까지 우산을 펴고 어떻게든 젖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어떤 사람은 피할 수 없는 비라면 그냥 후드를 뒤집어쓴 채 묵묵히 걸어간다.


물론 통제하려는 태도가 나쁜 것은 아니다. 통제감은 삶을 정돈하고, 위험을 줄이며, 우리의 불안을 다독여 준다. 유난히 계획과 대비를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실수의 비용은 몹시 크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되기에 작은 비 하나도 미리 철저히 막아야 할 위협적인 변수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삶에는 아무리 큰 우산으로도 막을 수 없는 비가 내린다. 갑작스러운 상실, 관계의 균열, 몸의 아픔, 피할 수 없는 나이 듦, 그리고 실패. 그런 것들 앞에서 끝까지 '통제'라는 손잡이만 꽉 쥐고 있으면 사람은 너무 쉽게 부러지고 지쳐버린다.


그래서일까. 피할 수 없는 비를 그저 온몸으로 맞으며 걷는 영국인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그 무심함 속에 내가 배워야 할 어떤 단단한 태도가 숨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무기력이 아니라 유연함이고, 포기가 아니라 수용(Acceptance)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내 뜻대로 바꿀 수 있다는 오만한 환상을 내려놓고, 바꿀 수 없는 것과 나란히 걷는 힘. 어쩌면 진짜 성숙함은 삶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데 있지 않고, 통제되지 않는 것들을 기꺼이 견뎌내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일도 여전히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가방 속에 작은 우산을 챙길 것이다. 그러나 예전보다는 조금 덜 불안해할 것 같다. 삶에는 튼튼한 우산이 필요한 날도 있지만, 때로는 우산 없이 비를 흠뻑 맞으며 걸어야만 비로소 배우게 되는 날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에필로그] 영국과 한국 사이에서


<한국과 영국 사이에서>라는 주제로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두 나라의 다른 점만 본 것이 아니었다. 영국의 낯선 일상을 거울삼아 그 차이를 들여다보는 동안,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지금 어디에 발을 딛고 서 있는지도 조금 더 선명하게 보게 되었다.


나의 뿌리는 분명 한국에 있다. 내 감정의 결, 관계를 맺는 방식, 익숙하게 몸에 밴 정서와 언어는 여전히 그곳에서 왔다. 하지만 오랜 시간 발을 딛고 살아온 영국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또 다른 층을 더해 주었다.


익숙한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내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기준도 다른 문화 안에서는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곳에서 자주 배웠다.


문화의 차이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서로의 다름을 아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생각의 폭을 넓히고, 타인을 조금 더 서둘러 판단하지 않게 만들었으며,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유연하게 해 주었다.


어쩌면 ‘사이(Between)’라는 낯설고도 눈부신 경계에 서 본 사람만이 얻게 되는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어느 한쪽만 볼 때는 결코 알지 못했을 삶의 넓이일 것이다.


이 연재를 쓰는 동안, 나 역시 많이 배웠다. 내가 떠나온 곳을 다시 보게 되었고, 지금 살아가는 곳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서 흔들리기도 했지만, 바로 그 흔들리는 사이에서 나는 조금 더 넓어졌다.


그동안 〈영국과 한국 사이〉를 함께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


잠시 숨을 고른 뒤에는, 또 다른 주제로 삶과 문화의 결을 들여다보는 에세이로 다시 찾아오려 한다. 다름을 이해하는 일이 결국 우리를 더 넓고 깊게 만든다고, 나는 여전히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목요일 연재